전지윤
주말 저녁에 모처럼 좋은 영화를 하나 봤다.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 중세 시대에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끔찍한 고립과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는지 다루는 영화였다.
영화의 압권은 막바지에 나오는 재판 장면인데 거기서 그 주인공은 그야말로 공개적으로 난도질 당한다. ‘성폭력 당했다는 게 거짓말 아닌가’, ‘가해자를 좋아했던 것 아닌가?, ‘성폭력을 당할 때 쾌감을 느낀 것 아닌가?’, ‘지금 임신한 아이가 가해자의 아이가 아닌가’... 재판관들의 심문은 산채로 인간을 해부하는 장면을 보는 느낌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성폭력 당했다는 호소가 거짓이라면 죽어야 한다’는 판정에 따라서 주인공이 화형대 위에서 곧 불에 타서 죽을지 모르는 순간에는, 입술이 바짝 바짝 타들어갔다. 영화를 다보고, 정말 저 시대에는 저 폭력적이고 강고한 가부장제 속에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살았고, 얼마나 기막히고 억울한 피울음들이 있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이한 생각은 금방 산산이 부서졌다. 들어가 있던 한 단톡방에 "성폭력으로 원치않는 임신.. 신상털기 멈춰달라"는 전 민주당 조00 공동선대위장에 관한 기사가 뜬 걸 보자마자 나는 영화에서 지옥같은 현실로 돌아왔다. 맞다. 한 사람(특히 여성)을 낙인찍고, 집단적으로 괴롭히고, 폭력적으로 유린하는 것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집단 괴롭힘과 극악한 폭력은 결국 “아무리 발버둥치고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안다”고 했던 조00 님이 스스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경험을 고백하고 자신의 아이가 바로 그 가해자의 아이임을 인정하게 만들고 말았다. 평생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에 묻고서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을 비밀을 말이다. 이처럼 잔인무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00 님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공동선대위장 사퇴 이후에도 가세연 강용석과 조선일보와 그 동조자들의 괴롭힘과 공격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세연은 그 이후에도 “조00은 악마 그 자체”, “동정론을 만들어보려는 X수작”이라고 했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곧 “전 남편 측에 대한 2차 가해”라고 했다. 자기들은 끝낼 생각이 없고 “곶감 빼먹듯이 장기전”으로 상대를 괴롭히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사설까지 실어서 공격을 이어갔다.
솔직히, 더 끔찍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침묵과 방관이었다. 진보와 개혁과 상식과 좌파적 가치를 말하던 많은 이들이 침묵했다. 일부 지식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지 보여주기 여념이 없었고,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대선 판도와 각자의 진영에 어떤 식으로 유불리할 것인지 계산하기에 바쁜 것 같았다.
심지어 일부는 ‘어쨌든 남편을 속인 것은 문제’라며 같이 돌을 던졌다. 대부분의 개혁 언론들은 대충 못본척하거나 적당히 양비론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정치네트워크’라는 단체도 그랬다. ‘검증도 없이 졸속으로 인재를 영입한 민주당도 문제고 사생활을 캐고 인권을 침해한 강용석과 족벌언론도 문제’라는 것이었다.
검증하라고? 도대체 뭘 검증하란 것인가? 왜 이혼했는지? 당신이 낳은 아이는 ‘혼외자’가 아닌지? 왜 재혼했는지? 이런 것을 검증하란 것인가? 무슨 목적과 자격으로? 나는 공포를 느낀다. 누구의 지적처럼 ‘불이 나면 소방차가 달려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누가 나를 지켜줄 것인가?’ 저런 식으로 내 사생활이 까발겨지고, 여기저기서 나에게 돌을 던져댈 때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
이번 사건은 다시 한번 냉혹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봤을 때 ’나쁜 여성‘은, 이혼한 여성은, 함부로 몸을 굴리고 남자를 배신한 여성은, 우리 반대 편에 서 있고 그들을 돕는 여성은 용서할 수 없다. 그 가족과 아이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가부장 사회 기득권들의 무시무시한 경고다. 그렇게 조00님과 그 가족들과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살해당했고 매장당했다. 그리고 아무도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오늘 아침부터 또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돌아가고 있다. 다들 또 ‘대선을 앞두고 더 크고 중요한 문제들’로 달려간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저들에게 낙인찍히고 가족과 아이들까지 괴롭힘을 당하고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여성들(정경심, 윤미향...)이 떠오른다. 내가 돕던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과 고통도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평생 가슴이 묻고 싶었던 성폭력 피해사실이 강제로 공론화됐고, 그래도 피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어서 피해자의 또다른 성폭력 피해상담기밀도 강제로 공개했다. 제발 그 글들을 내려달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진상 규명과 검증’이라고 했다.
드라마 <지옥>을 만든 연상호 감독의 상상력은 현실과 비교해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지옥>은 마지막에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냐’며 지키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니라고?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성폭력으로 원치않는 임신.. 신상털기 멈춰달라"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한번 확인해 보라. 그리고 가세연 유튜브 페이지의 구독자 수가 얼마이고 수익금이 얼마인지 확인해 보라.
● ‘지옥 사자들’의 다음 ‘시연’ 대상이 된 민주당 선대위원장
또 시작됐다. 누군가를 표적 삼아서 ‘죄인’이라고 ‘고지’를 내리고, 무슨 ‘지옥의 사자’들처럼 몰려와 만신창이가 되도록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온 몸과 마음이 숯덩이가 되도록 ‘시연’을 하는 일들이 말이다. 이번에 ‘고지’를 받은 것은 민주당에서 영입한 조00 씨다.
‘새진리회’, ‘화살촉’의 역할을 맡으려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 너무 많아서 문제지만, 역시 단연코 두각을 나타내 온 가세연 강용석과 <조선일보>가 나섰고 국민의힘이 거들고 있다. ‘사이버렉카’들이 그 뒤를 따르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북치고 장구치며 떠들어대고 있다. 이런 ‘지옥 사자’들의 ‘시연’에 견디다 못한 조00 씨는 결국 어제밤 “제가 짊어지고 갈 테니 죄 없는 가족은 그만 힘들게 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조00 씨가 ‘죄인’인 이유는 10년 전에 ‘이혼’한 여성이기 때문이고, ‘간통’을 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혼외자’를 낳았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란다. 친자확인 소송 재판 기록까지 들고 나왔고, 자녀들의 생일과 실명이 공개됐고, ‘DNA 결과 보고서’까지 공개하겠다고 한다.
그동안 강용석과 <조선일보>가 가짜뉴스를 퍼트려온 전력이 워낙 악명높기 때문에 전혀 믿음이 안가지만, 그래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혼한 게 죄인가? 간통죄는 벌써 옛날에 폐지된 게 아니었나? 성적 관계와 출산은 혼인 관계에서만 이뤄져야 하는가?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가? 고 장자연 씨 사건에서 드러난 족벌언론사 사장들의 변태적 사생활이 더 문제 아닌가?
도대체, 누군가의 결혼과 이혼과 출산,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미워하는 과정의 그 많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돌을 던지고 있다. 특히, 이 나라에서 이혼이나 재혼한 사람(특히 여성)이 사회적 차별과 편견과 낙인 속에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 속에 삶을 이어가는지 보려 한 적이나 있는가? 모르면 차라리 왈가왈부말고 그냥 신경꺼라.
미드를 보면 가장 부러운 것이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전혀 다르고 아직도 멀었다. 배우 김선호 씨의 사생활 논란에서 가장 기가 막혔던 부분도 그것이었다. 처음 문제를 공론화한 것은 김선호와 연인이었던 여성이긴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적 연애관계에 왜 족벌언론들까지 열을 올리며 뒤를 캐고 생중계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초반에는 김선호가 엄청 욕을 먹다가 반전이 일어난 것은, 상대 여성이 ‘이혼녀’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여성에게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해도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 인기있는 TV 프로그램 중에 <돌싱글즈>가 관찰예능으로서 모든 단점을 떠나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적어도 이 프로그램 안에서는 이혼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 되고 부끄러운 과거처럼 서로 그것을 숨기고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 동시에 이 프로에서 서로 신세한탄을 하는 것을 들어도 이혼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사회적 편견과 낙인 속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이 프로에서마저 이혼자들은 그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 따라 또 등급이 나눠진다. 그리고 그 편견과 낙인은 여성에게 더 가혹하다. 조00 씨처럼 육사 출신의 교수인 엘리트 여성까지도 여기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조00 씨에 대한 저들의 ‘고지’와 ‘시연’이 문제인 또 다른 이유는 정치인이나 공인의 가족과 자녀는 사생활과 인권도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무서운 ‘사회적 합의’를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명과 생년월일뿐 아니라 ‘DNA 결과 보고서’까지 공개하겠다는 저 태도는, 조국 교수의 부인과 자녀들의 모든 전자기기와 학교생활 기록들과 심지어 일기장까지 다 뒤져도 거의 아무도 막지 않고 같이 돌을 던지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지금 조00 씨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조00 씨만이 아니라 그 자녀가 느낄 엄청난 고통에 대한 조금의 고려도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의 정치권과 언론과 공론장이 이런 수준이라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고도 이 길에 나선 조00 씨의 용기가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방송에서 ‘이혼 이후에 숨소리도 못내고 살아왔고, 죽을만큼 버텼다. 저같은 사람은 꿈과 도전의 기회도 없는 것인가?’라고 울먹이는 조00 씨를 보면서 그 아픔이 느껴졌지만, 결국 이 지옥같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조00 씨는 왜 차별금지법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국가보안법조차 폐지하지 못하고 우파의 눈치만 보고 타협하는 민주당에 들어갔는가라고 비판하면 차라리 토론이 가능하다. 조00 씨가 이라크 파병 부대에 갔었던 군사전문가로서 과연 반제국주의나 반전평화와 군축을 고민한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야말로 생산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저열한 인신공격이고 말초적 사생활 캐기인가. 강용석과 <조선일보>는 막상막하이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화려한 콤비플레이를 펼쳐왔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 해악성은 <조선일보>가 더 클 것이다. '화살촉'은 결국 '새진리회'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니. 이들의 사생활 캐기와 영혼까지 털어내기는 언제나 보수우파와 족벌언론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것도 명백하다. 물론 여기서, 어느 편이든 모두 ‘공정’하게 ‘시연’을 당해야 한다는 결론은 절대 나와선 안 된다.
이런 ‘새진리회’와 ‘화살촉’ 지망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드라마 <지옥> 시즌2를 찍고 싶으면 연상호 감독에게 양보하고, 그래도 정 하고 싶으면 세트장을 만들어서 드라마로만 찍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라. 현실로 자꾸 <지옥>을 불러내지 말라. 너무 지긋지긋해서 당신들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그래서 안되는 줄 알면서도) 혐오감까지 생기려고 하니까.
(기사 등록 20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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