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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포스트 트럼프/ 이석기와 보안법/ 전태일과 이소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1. 20.

 

전지윤

 

포스트 트럼프와 혐오의 시대

 

트럼프의 재선 실패가 거의 분명해지고 있고, 미국과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뻐하고 있다.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고 극우 무장 민병대까지 부추기던 사람의 패배는 명백히 함께 반가움을 나눌 일이다. 더구나 이번 대선과 함께 진행된 상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소속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후보들이 상당한 약진을 했다.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는 이번에 총 29명의 후보를 냈는데 그 중에 현재 20명이 당선했다고 한다. DSA는 몇 가지 의미있는 주민투표도 지지하거나 발의했는데 그 결과도 나쁘지 않다. 플로리다에서는 최저임금 15달러 인상 결의안이 통과됐고, 인디애나에서는 공립학교 지원금 확대가, 그 외에도 몇몇 지역에서 임대료 인하와 퇴거 금지 방안들이 통과됐다.

 

그러나 민주당 전체로 보면 상하원 선거 결과는 별로 좋지 않다. 상하원 모두 민주당 바람이 크게 일어날 것이라던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은 모두 틀렸다. 따라서 미국의 언론을 칭찬하는 일부의 지적들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미국 거대언론들도 한국언론처럼 기층 민중의 정서와 어긋나있고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거대언론, 기업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반감을 이용해 하층민들과 일부 노동계급들에게까지 파고들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주요언론의 반대 속에서도 트럼프가 이번에 얻은 7천만표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극우적 혐오정치와 혐오선동이 단지 소수에게만 먹혀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불안과 분노, 불만에 기반해 있다.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트럼프가 계속 그 구심이 되거나 아니면 더 똑똑하고, 더 소름끼치고, 더 카오스적인 네오트럼프에 의해 이끌려질지 모른다. 거대기업과 거대언론과 공화당 일부의 지지까지 얻은 바이든과 민주당 주류가 그것을 잘 막아낼까? 물론 버니 샌더스가 후보였다면 더 쉽게 트럼프를 이겼을 거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버니가 후보가 됐다면 민주당이 얻을 표가 있었겠지만, 잃을 표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지 민주당은 대안이 아니라며 무조건 비판과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동적 절망의 대안이 아니라 급진적 희망의 대안을 실제로 건설하고 그것이 미국 민중 다수의 지지와 공감을 얻도록 만들어내는 것이다.

 

트럼프의 패배에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사기저하와 냉소를 겪고있는 미국의 일부 급진좌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그것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있지 못하다면, 사람들이 웃을 때 울고, 울고 있을 때 웃는다면 자신이 과연 누구와 함께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트럼프의 패배를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 바이든의 문제점에 침묵한다는 뜻은 아니다. 타라 리드 등 바이든의 성폭력을 고발했던 생존자들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를 돌아보고 공감할 필요도 외면할 수 없다. 이미 거대기업과 언론들은 트럼프 지지자들도 달래기 위한 초당적 협력을 주문하고 있고, 친기업적 민주당 인사와 일부 공화당 인사까지 포함한 바이든 인수위와 내각 명단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한국의 우리에게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구도와 요소들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이용해 혐오와 적대를 부추기는 권력자들, 거리에서 혐오를 표출하는 극우 지지자들, 음모론을 퍼트리는 극우개신교 지도자들, 반대편을 친중국 사회주의자로 몰아가는 마녀사냥, 신뢰를 잃어가는 주류언론과 그것을 이용하는 극우 유튜브들, 민주당의 한계와 좌파의 분열과 취약함... 지난해 전광훈이 광화문에 수십만을 모으고, 올해는 윤석열이 대선후보 1위로 오른 것을 보자.

 

이런 문제를 풀어가기는 쉽지 않고 단지 가장 좌파적 입장만 취한다고 풀리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만 단순히 악마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점에서 정치적 입장 차이를 떠나 마사 누스바움이 지적한 것들에도 공감이 간다. 누스바움은 4년전 트럼프 당선 때 깊은 비탄과 두려움에 빠졌고 걱정으로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작된 고민과 그 내용을 풀어낸 책이 <타인에 대한 연민>이다.

 

누스바움은 여기서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최소한의 선을 행하고 또 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강조한다. 아무리 입장이 다르더라도 타인을 이성적 사고가 가능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다. 악한 행동과 사람을 분리해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로서 타인을 바라보고,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

 

입장이 다르면 상대방과 벽을 세우고 타자화하는 일, 견해가 다른 이들에 대해서 멸칭과 막말과 비난성 혐오로 대응하는 일, 표적을 정해가며 계속 누군가를 낙인찍고 증오하며 공론장에서 추방하는 일, 사라져 가는 대화와 늘어나는 차단, 이런 것이 우파는 물론 진영을 넘어 어디서든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화는 트럼프같은 정치세력이 등장하기에 더욱 유리한 토대가 된다. 이러한 혐오의 정치와 문화를 넘어서는 것 또한 좌파의 주요한 의제가 돼야 한다.

 

이석기를 석방하고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언론개혁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겨레나 경향도 크게 다르지 않고 조중동을 따라간다고 서운함을 토로하곤 한다. 그 이유와 심정을 충분히 공감한다. 나도 실망하고 비판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한겨레나 경향마저 없었다면 싶은 경우도 많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차별금지법 관련해 고맙고 빛나는 보도들도 많았다.

 

얼마전 한겨레에 실린 이석기 의원 인터뷰도 아주 반갑고 고마웠다. 무지막지한 마녀사냥 끝에 엄청난 증오의 대상이 돼서 7년 넘게 억울하게 갇혀있는 사람, 이제는 거의 모두가 그 존재를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는 마녀의 목소리를 실어주는 것은 큰 부담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겨레가 아니면 어디가 이런 노력을 하고 기회라도 제공했을까.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8163.html

 

그러나 굳이 이렇게 북한도 비판할 수 있어야라는 제목을 뽑아야 했을까, 종북몰이를 당해서 갇혀있는 사람에게 굳이 북한에 대해 평가를 물어야 했는지는 의문이고 아쉬웠다. 사상검증이나 십자가밟기를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마녀에게는 스스로 마녀임을 인정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마녀로 지목할 때만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 매카니즘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더구나 인터뷰는 한겨레 홈피 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검색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이석기 위원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단순히 반미나 친북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있었다. 한겨레는 이런 점을 지적하며 그의 생각의 변화를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석기 의원의 생각은 변한 것일까? 마녀사냥의 한참이던 2012년 당시에도 그는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그러나 낙인과 편견에 찌든 사람들은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석기 의원의 이런 발언이다. “마녀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냥은 벌어지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는 마녀사냥의 기회를 노리는 이들과 마녀사냥의 광기를 두려워하면서 가급적 '마녀로 의심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정치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 인터뷰가 이석기 위원 석방의 여론을 만들기 위한 선의의 정지작업과 노력의 일부였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싶다. 더불어 이 인터뷰와 함께 최근에 온라인에 올라온 국가보안법에 관한 다큐인 <게임의 전환>도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nYBR_XlqcY&feature=youtu.be

 

이 다큐는 독일 사민당을 탄압하던 법이 일본에서 치안유지법이 되고, 한국에서 다시 국가보안법으로 발전한 과정, 건국 초기부터 엄청난 마녀사냥과 학살범죄를 낳은 역사, 공포와 불안에 기반해서 끝없는 자기검열을 부추기는 매카니즘 등을 잘 보여준다.

 

또 이 법이 상대방을 공존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멋대로 혐오와 낙인을 찍도록 해주는 면허증과 면죄부가 되는 이유, 종북몰이가 일시적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이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태극기부대같은 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극심한 마녀사냥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말한다.

 

이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두 가지는 먼저 2015년 신은미 씨의 강연회장에서 우익청소년이 사제폭탄 테러를 시도하던 장면이다. 종북몰이가 낳은 명백한 혐오범죄였던 그 장면을 영상으로 다시 보니 오싹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의 작동방식을 마피아게임에 비유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게임에서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된 참가자가 눈물까지 머금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과거에 동지들과 여행을 갔다가 뒤풀이에서 마피아게임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재미있게 웃으면서 하던 게임이 한 동지의 울음으로 끝나게 됐었다.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가면서 모두가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 그 게임 방식이 낙인찍기와 집단적 괴롭힘에 시달렸던 경험과 상처를 끄집어내는 효과를 낸 것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그런 게임을 안 하게 됐다.

 

그나마 최근 민주당의 이규민 의원 등이 국가보안법 7조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고 한다. 이 정부 들어서 차별금지법 제정, 사형제 폐지 등의 문제에서 너무 진전이 없지만,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이나 조작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런 법안을 발의한 것도 의미가 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반국가 단체를 찬양고무하고 국가변론을 선전선동해서 자유민주질서를 위태롭게 했다는 명분으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7조는 분명 국가보안법의 핵심이다. 국가보안법 피해자의 대부분은 7조로 탄압받았고 나도 7조로 두 번 구속된 적이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단지 7조만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폐지돼야지 그 악용의 여지와 뿌리를 도려낼 수 있는 악법이고,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이석기 의원부터 당장 석방해야 한다. 하지만 이석기 위원은 아직도 감옥에 있고, 국가보안법도 뒤늦게야 7조 폐지라는 전술적 타협으로 발의된 상황이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종북몰이를 자행해 온 기득권 우파가 아직도 얼마나 견고한 힘과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 문정부와 민주당도 그들의 눈치를 보며 계속 머뭇거리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7조 폐지는 당연히 통과되도록 도와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렇다면 정의당같은 원내 진보정당이 앞장서서 국가보안법 전면폐지안을 발의하고 이석기 의원 석방을 소리높여 요구하면서 단결된 운동을 건설해주면 어떨까. 간절한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다.


 


오해와 갈등을 증폭시켜서 이익보려는 사회

 

자신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했던 어느 진보적 지식인이 책에서 자신의 사건과 이름(활동명)을 거론했다는 이유로 삼성 직업병 피해자가 그 교수님을 비난하고 소송까지 가게 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게 되었다.

 

우선 그 교수님의 너무나 아프고 힘들 마음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 분이 쓴 좋은 책과 글들에서 아주 많은 도움을 얻었고, 언제나 소수자들의 편에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연대하고 힘을 보태온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취지와 선한 의도로 책에서 언급한 것이 이런 문제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하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를 제기한 삼성 피해자분을 너무 탓하고 싶지는 않다. 삼성 피해자로서 그 분의 투쟁은 큰 의의와 성과를 남겼지만, 이후에 자신의 사건과 이름이 좋은 취지로라도 거명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전혀 이해못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좋은 의도였고 매우 간단한 언급이었지만 책에서 언급하기 전에 미리 양해나 이해를 구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을 수 있다.

 

다만 그런 아쉬움과 섭섭함이 이토록 상대방을 비난하고 소송으로까지 갈 문제였는지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나치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합리적인 소통을 통해서 서로간의 오해와 감정을 푸는 식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함께 싸우는 사람들 속에서, 운동사회에서도 갈등은 벌어질 수 있지만 그것을 법적소송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언제 봐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인간적 관계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며, 피해자와 연대자의 관계도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된다. 아무리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함께 싸우더라도 그 과정에서 처한 위치와 느끼는 감정,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과 견해는 서로 조금씩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서로에 대한 감정도 고마움과 동지애, 연대의식만이 아니라 서운함과 원망, 오해같은 것도 얼마든지 끼어들게 마련이다.

 

나아가 중간에서 자세한 그 과정과 내용을 모르면서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그냥 돌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문제는 풀리는 게 아니라 더욱 악화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지금 이 문제에서도 그 진보적 지식인분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적 판단과 평가를 퍼트리는 것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물론 문제를 제기한 삼성 피해자 분의 과도함에 대해서 너무 거칠고 과한 표현으로 문제삼는 것도 적절치 않다.

 

이런 것들은 모두, 특히 온라인의 부정적 특성과 결합되면서 문제의 해결보다는 악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는 이런 오해와 감정의 미묘한 엇갈림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낚아채서 그 틈을 더욱 벌리고 당사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구조와 힘들(재벌, 주류언론, 기득권 정치세력 등)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와 감정이 풀리길 기대하며 주변에서 돕는 게 아니라, 오해와 감정을 뒤틀고 극단으로 끓어올려서 폭발시키려는 구조와 세력들이 보이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유출된 삼성 미래전략실 내부 문건들에는 피해자와... 유족들을 배후 조종하는 불순세력을 분리시킬필요성과 불신을 심어 이격되도록 유도하자는 말이 나온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소위 들로서 이를 업으로 삼는 자들. 트집잡기에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라면서 이들이 소득 없이 명분 싸움만 한다는 점을 유족들에게 강조하여 결별 유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구조와 힘들이 작동했을 때 피해자와 연대자들 모두가 엄청난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으면서 지난하고 오랜 투쟁 성과들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면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할 수 있는지를 이미 지난 여름에 정의기억연대에게 닥쳤던 그 부당한 공격과 커다란 비극을 통해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다시는 어디서도 그런 구조와 힘들이 작동하지 않기를...

 

전태일과 이소선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지난주에 전장연 궁리소 차담회: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란 무엇인가?’에 토론자로 참가해 늦게까지 뒤풀이를 했고, 그 다음날은 전국빈민대회에 참가했다. 전국민중대회에도 참가하고 싶었지만, 코로나 상황 악화에 따른 방역지침과 인원제한 때문에 아쉬움을 달래며 동지들과 오랜만에 길게 뒤풀이를 하며 사는 이야기와 고민들을 나누었다.

 

정부와 경찰이 어제 집회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양상을 봤을 때, 조중동이 그렇게 난리치고 있는 문정부는 광화문에서 반정부 우파 집회는 금지해놓고, 자기 편인 민주노총의 집회만 허용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불만과 걱정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편인 민주노총과 좌파 단체들의 집회라는 말처럼 한국의 언론들이 얼마나 제대로 취재와 확인도 없이 기사를 쓰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요즘 민주노총 등의 집회처럼 문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반대와 규탄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고 있는 곳도 없다.

 

노동, 환경, 차별, 인권 문제 등에서 기대를 져버리고 못미치는 것에 대한 사회운동의 분노와 불만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주류언론들이 이 모양이니 어제 노동자 대회, 민중대회, 빈민대회, 농민대회 등이 왜 열렸고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언론 보도를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수준이다.

 

전태일 50주기여서 더 의미있는 집회들이었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태일 열사가 남긴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하게 보장되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이었다. 어찌보면 누군가는 감상적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생경한 가치보다 더 핵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불어 조영래 변호사는 자신이 쓴 전태일 평전이 지식인의 관점이라고 나중에 돌아봤다고 한다. 아마도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주역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의 그 지난하고 집단적인 투쟁과 연대들 보다는 개인의 고독한 결단이 강조되는 면을 돌아보신 게 아닌가 싶다. 그 점에서 이 시기가 오면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소선 님이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구체적 사안을 가지고 끝없이 집단적 투쟁과 연대를 조직하고 건설하면서 크고 작은 교훈과 성과를 만들어온 이소선 여사의 40여년의 치열한 투쟁과 연대가 없었다면 전태일 정신은 만들어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진정한 거인이고 투사였던 이소선 님의 삶과 투쟁을 통해서 전태일 정신은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됐다고 돌아보면서, 두 분을 같이 기억하고 추모한다.

 

(기사 등록 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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