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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국적 차이와 계급 차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7. 24.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1995년에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러시아 국적이었고 결혼 상대자는 한국 국적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긴 했습니다. 1995년 한국 국내에서는 국제결혼의 건수는 약 6천 건, 그러니까 전체 결혼들의 3% 안팎이었습니다. 주변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격려도 많았지만, "양놈이 우리 나라 계집을 이렇게 훔쳐가면 되겠느냐"는 말도 종종 듣곤 했지요. 그러나 격려든 농담반 진담반 '문제 제기'(?)든 좌우간 좀 '보통이 아닌' 일로 치부됐던 건 사실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흔한 일이라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기만 합니다. '국제'의 의미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좀 퇴색한 것이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여러 나라, 여러 지역들을 '획일화'시키는 부분은 아주 큽니다. 가령 오슬로의 부촌인 오슬로 서부 지역이나 런던의 부촌인 런던 남부 지역의 출신이 서울 서초구에 가면 과연 어디까지 '이질감'을 느낄 것일까요? 아마도 별 이질감도 없을 것입니다. 오슬로나 런던이 보유한 모든 것을 다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서초구는 소비자로서 훨씬 편하기도 합니다. 배달시키면 당일날 오고, 편의점이 24시간 다 일하고 주말에도 문이 다 열려 있는 건 오슬로에선 상상 못할 일이죠. '소비자의 편리함'의 대가를 하급 노동자들이 어떻게 치르는지 또 다른 문제지만, 좌우간 런던이나 오슬로 부촌의 출신이 결혼해서 서초구에서 살게 되면 이질감을 느낄 일은 그다지 없을 것입니다. 서초구 주민들이 구사하는 영어의 수준만 해도, 이태리나 서반아와 같은 일부 남구 국가에 비해 훨씬 좋을 것이죠.

 

결혼에 있어서는 '국내''국제'는 이제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제 결혼은 쉬워도 한 가지 넘을 수 없는 장애는 바로 학력과 문화자본 등을 포함한 '계급'의 경계선입니다. 한국에서의 국제결혼의 양상을 봐도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국경을 넘어도 대개는 저학력자는 저학력자끼리, 고학력자는 고학력자끼리 결혼을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최초로 1997년에 만난 또 하나의 '-러 커플'의 경우에는 대졸인 아내가 수도권 명문대에서 교편을 잡고 남편은 '조중동' 중의 한 신문의 기자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수십 쌍의 '-러 커플'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역시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엔 학력이 확실히 매치(match)된 것이었습니다. 재력은 대개 한국 국적의 상대자쪽은 더 강했지만, 러시아쪽 상대자가 대졸이나 그 이상의 경우엔 한국에 정착해 전문직 직업을 가지고 나름의 수입을 올리리라는 기대/예상은 대부분 다 있었던 것이죠. 인종, 국경을 넘는다 해도, '계급'을 역시 넘기가 훨씬 더 힘들다는 걸, 재차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인생에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직업 선택과 결혼/동거/출산/육아의 여부입니다. 이 두 결정은 다 거의 완전하게 계급적 배경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꼭 금일의 한국만의 현실도 전혀 아닙니다. '평등'을 그토록 내세웠던 후기의 쏘련 사회는...그리 큰 차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제 눈으로 본 제 부모의 친구나 친척 등 중에서는 육체노동을 하는 노무자도 농민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고학력자이었기에 그 사회적 네트워크에 저학력자는 없었던 것이죠. 일면으로 그 네트워크에는 고급 간부도 없었습니다. 고급 간부는 고급 간부끼리 사귀고 결혼했습니다. 그 세상을 중간급 인테리는 체험적으로 알 수 없었죠.

 

동시에는 노동자 출신으로서 인테리 여성을 사귀는 것도 거의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임금이나 생활조건은 거의 비슷해도 사용하는 언어, 구사하는 어휘부터 서로 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평등'을 사회의 핵심적 이념으로 여기고 있다는 노르웨이의 경우는 어떨까요? 글쎄, 저는 여기에서도 예컨대 대졸과 고졸 사이에서의 결혼을 아직도 본 적은 없습니다. 얼마 안 되는 최고 부유층이 '일번인'들과 결혼하는 것도 쉽게 볼 수 없지요. 재학 시절에 '사귀는' 거야 가능해도 결혼은 재산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서 또 다릅니다.

 

미국은 '계급간 결혼' (cross-class marriage)에 대한 상당한 연구 전통을 보유하는 사회입니다. 역시 '평등'의 껍데기와 달리 실제로 '계급'을 중심으로 해서 조직되고, 계급의 경계선을 잠시라도 흔들 수 있는 '사회적 혁명'을 겪어보지 못한 사회인지라 '계급간 결혼'은 다소 드물고, 그 만큼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됩니다. 그 관련의 연구 서적 (예컨대 Jessi Streib, <The Power of the Past: Understanding Cross-Class Marriages>, 2014)을 보느라면 참 중요한 부분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국적보다 계급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거리'가 훨씬 더 크다는 부분을 말씀드리는 거죠. 같은 '영어'라 해도 고학력자들이 쓰는, 희랍어나 라틴어 계통의 전문용어들이 섞여 있는 고급영어와 저학력자들의 구어는 서로 아주 다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인생'을 보고 '인생'을 사는 방식이 서로 너무 달라 '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학력자들이 그 하루를 정확히 '계획하고' 나아가서 인생에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 거기에 따라 크고 작은 결정들을 하지만, 저학력자들은 '흘러가는 대로' 사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뭘 '계획'해봐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을 하도 많이 겪어본 사람들이라 그런 거죠. 서로 '습관'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계급간의 결혼이 국제결혼보다 더 파탄나기가 쉽다는 것은 많은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계급'의 파워가 그 정도로 막강한, 거의 절대적인 것이죠...

 

제가 이 슬픈 이야기를 여기에다 왜 씁니까? '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혁명의 명분은 사회주의라 해도 이 명분은 당연히 그대로 실현될 리는 없습니다. 불란서 대혁명의 명분은 '자유, 평등, 박애'이었는데, 19세기 불란서의 자본제 사회에서는 '박애'는 과연 찾아볼 수 있었을까요? 알제리 같은 식민지에서는 불국인과 '원주민'들은 언제쯤 '평등'했나요? '사회주의' 혁명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완전한 평등의 사회를 그 명분으로 내세워도 그걸 달성할 가능성은 애당초부터 제로(zero). 완전한 평등의 사회를 뒷받침할 만한 자원이나 생산구조, 생산력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혁명의 과정에서는 엄청난 '판갈이'가 이루어집니다. 주변화된 인테리 출신의 '직업적 혁명가'나 노농대중 출신의 간부들이 새로운 지배층이 됨과 동시에 수백만 명의 노동자, 농민 출신들이 고위급과 중간급의 위치로 진입하고, 또 그 학력을 획기적으로 높입니다. 서구에서 1950년대부터 이루어진 고등 교육의 대중화는, 쏘련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이루어졌습니다. 노동자 출신, 농민 출신의 간부와 기술자를 대량으로 양산시키는 것은 당의 급선무이었으니까요. 사실 쏘련사에서 '계급간의 결혼'이 충분히 가능했던 시기는 바로 1920~40년대 정도입니다. 그 시기에 신분 이동이 하도 활발해서 '계급'의 경계선이 잠시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거니까요. 일례로, 1918년에 붉은 군대의 병사로 그 출세의 길을 시작한 기초 노동자 출신의 흐루쵸브는, 1920년에는 군의 일선 선전원이었지만, 1931년에는 이미 모스크바의 한 구역의 당서기, 즉 고급간부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당의 명령으로 대학 교욱도 이수했고요. 과거의 고관백작들이 운이 좋으면 하급 기술자로 어렵게 취직하고, 과거의 노동자나 농민들이 - 능력과 충성만 확인되면 - 바로 고급 간부로 자랄 수 있었던 시기에는 '서로 좋기만 하면' 다른 걸 눈치 볼 게 없이 결혼할 수 있었던 유일하다 싶은 시기이었습니다. 1941~45년 소독 전쟁 전후해서 새 사회가 어느 정도 골격이 잡히고, 새로운 계층 구조 (간부층-고학력 기술자층-노농대중)가 공고화돼 이와 같은 '계층간 결혼의 자유'는 점차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결혼을 위시한 거의 '모든' 게 다 계급적 위치에 달려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가 잠시나마 상대화됐던 '그 때'를 향수 어린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요....

 

(기사 등록 20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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