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왜곡과 공격
최근에 노동자연대 분들이 박가분 씨, 오세라비 씨 등의 책들을 추천하고 격찬한 것이 논란이 된 것을 봤다. 이 책들이 담고 있는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공격을 “돌직구”라거나 “예리한 통찰력”이라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도 했다.
새삼스럽진 않다. 노연 분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가 저 필자들이나 책들과 가까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노연 분들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이 계급투쟁을 분열, 약화시킨다고 보며, 남성 여성의 단결을 추구하는 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젠더 모순을 부차화시키며 기계적 단결을 추구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고 토론해 봐야 한다고 본다.
진짜 문제는 노연의 이러한 행보 속에 보이는 성폭력 사건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정당화다. 이 맥락에서 노연은 이번에 저 책들뿐 아니라 예전부터 계속해서 비슷한 책들을 계속 추천하고 칭찬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왔다. 그것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가장 심각한 수준의 2차가해와 괴롭힘을 앞장서 한 분들이 그런 글들을 도맡아 썼다.
이런 글들을 통해 노연이 주장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성폭력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 미묘한 문제”이며 “회색 지대가 많고 까다롭고 민감한” 문제여서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하는 일”이나 ‘피해자다운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완장”을 찬 사람들이 “피해 호소 여성의 진술을 무조건... 그대로 믿어 줘야 한다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가지고 “무책임한 ‘성폭력’ 피해호소와 성급한 낙인찍기”를 하면서, 죄없는 남성들이 “거짓된 성범죄 혐의로 엄청난 고통을 받는 일이 반복”돼 왔다는 것이다. 노연은 이런 “온라인 상의 무책임한 폭로와 이를 진실 검증 없이 기정사실화”하는 ‘마녀사냥을 통해 삶이 망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어찌보면 딱히 문제삼을 게 없어 보인다. ‘죄없는 사람이 무고한 누명을 쓰고 삶이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에 누가 반대할까? 문제는 이것이 현실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쉽게 입을 열기도 어렵고, 입을 열었다간 오히려 인생을 망치기 일쑤인 사회다.
하지도 않은 성폭력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아니라,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아무 문제없이 잘 사는 가해자들이 훨씬 많은 사회다. 성범죄 중 무고는 0.78%에 불과했다는 최근 조사 결과도 이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구조적 젠더 불평등 때문이다.
계급문제에서도 구조적 불평등 때문에 노연을 비롯한 많은 좌파들은 노동탄압의 피해를 호소하는 노동자들 앞에서 먼저 진술의 신빙성을 따져보자거나, 피해노동자다운지를 가리자거나, 무책임한 폭로와 거짓 고발로 낙인찍히고 고통받는 억울한 기업주들을 걱정하는 것을 강조하고 우선하진 않는다. 계급과 노동탄압에 대한 이런 강조점과 우선순위는 젠더와 성폭력에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그런데 노연은 이중잣대를 적용할뿐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과장된 곡해까지 하고 있다. ‘페미니즘 완장을 차고 피해호소를 아무 검증없이 무조건 진실로 기정사실화하면서 죄없는 사람에게 낙인을 찍어서 마녀사냥하고 인생을 망치고 있다’? 대표성이 없는 극단적 일부에서 볼 수 있는 행태를 마치 반성폭력 운동 전반의 문제인 것처럼 모는 것이다.
무엇보다 노연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의 제기는 자신들의 피해호소를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말이 무조건 진실이고 기정사실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들의 피해는 조사나 검증이 필요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피해호소를 하자마자,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짓고, 행실과 평판을 문제삼고, 정신질환으로 낙인찍고, 사생활과 사적정보와 프라이버시를 유출하고, 심지어 성폭력 상담기밀까지 누출한 것이 그 자체로 폭력이고 가해라는 것이다. 그런 글들은 지금도 노연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가 있다.
노연 지도부야말로 조사도 검증도 없이 무조건 가해자를 믿고 피해호소를 거짓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온라인 상의 무책임한 폭로’를 한 것이다. '피해호소의 신빙성을 평가하고 피해자다운지를 검증해야 한다'며 그런 가해를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성차별적인 가해자중심적 사회에서 계속 벌어져 온 일이고 노연 지도부도 답습한 잘못이다.
따라서 피해자와 연대자들이 노연 지도부에게 그런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낙인찍기’도 ‘마녀사냥’도 아니다. 정말로 망가진 것은 노연의 명예와 활동이 아니라 피해생존자들의 일상과 삶이다.
온갖 논문과 책까지 소개하고 추천하면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할 온갖 논리를 복잡하게 계속해서 발전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피해생존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들여다보고 공감해보려는 데 그 시간과 노력을 쓸 것을 강력 권고하고 싶다.
● 성평등 수업과 페미니즘
광주에서 <억압받는 다수> 영상을 보여주며 성평등 수업을 한 선생님이 학생민원을 받아 직위해제와 수사의뢰된 사안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보기에 서로를 강화하는 두 가지 극단적 입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그 선생님의 수업은 의도, 내용, 과정, 결과까지 아무 문제없는데 악의적 학생들이 거짓 신고를 했고, 교육청이 불순한 정치적 의도로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짜 스쿨미투’라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는 특권적 위치에 있는 중년의 남성 교사가 한 수업은 그 자체로 따져 볼 거 없이 성폭력이니 당연히 징계,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소명이나 진상파악도 없이.
이런 극단적 입장들을 배제하고서, 서로 강조점이 다른 의견들을 살펴보면 대체적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광주교육청이 무조건 직위해제와 수사의뢰라는 관료적 조처부터 한 게 적절치 않았다는 문제의식이다. 이같은 관료적 형식주의와 행정, 사법처리 일변도는 이 사안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해당 선생님과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억울해하고 있다. 젠더 불평등을 알리고 성평등 의식을 높이려는 의도였고, 문제된 발언들은 맥락과 다르단 것이다. 노골적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저지른 경우와 분명 다른데, 한 교사의 모든 게 부정되는 상황에서 전교조가 적극적 방어를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전교조 여성위 등에서는 해당 선생님의 좋은 의도와 억울함을 일부 이해하면서도, 그걸 너무 강조한 나머지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의 목소리가 위축되고 사라져버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 나아가 스쿨미투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에 악용될 가능성도 걱정한다.
실제로 그 선생님을 방어한다면서 ‘스쿨미투가 교권을 침해하고 있다’, ‘거짓신고와 억울한 교사가 많다’, ‘전교조 여성위가 무소불위다’ 등의 과도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그 선생님을 나서서 방어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도, 그것에 서운함을 느끼는 반응들도 모두 이해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서로를 쉽게 단정하며 벽을 쌓기보다,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고 경청하면서 합리적 부분은 수용하며 토론과 협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반면, 문제를 풀기보다 꼬이게 하는 일부의 태도는 우려스럽다. 대표적으로 노동자연대(노연) 분들의 태도가 그런데, 그 선생님을 방어하는 것을 넘어서 과도한 일반화를 하고 있다.
“페미니즘 특유의 도덕주의와 반지성주의”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여)학생 편”이고 “남자 교사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급진 페미니즘의 분열주의와 개량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주관적 느낌만으로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따른 것”이며 “스쿨미투가 국가기관으로 흡수된 것의 결과”란 것이다.
‘국가 탄압에 굴복한다’며 전교조 여성위에 대한 반감도 부추기고 한다. 이런 식으로 교사와 학생을 대립시키고, 여성위와 반여성위로 줄을 세우는 것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자신들이 성폭력 사건에서 저지른 잘못을 덮는데 이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실제 노연 홈페이지 대문에는 아래처럼 특별코너가 마련됐다. 그 선생님을 방어하는 기사/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을 비판하는 기사/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하며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섞여서 배치돼 있다.
이런 문제섞기와 끼워넣기는 마치, 노연도 아무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게 성폭력 2차가해 누명을 쓴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 반대로는 광주의 그 선생님마저 잘못을 하고도 아무 반성없이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둘 다 적절치가 않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자 곧바로 그 여성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정신질환자로 낙인찍고, 명예훼손 역고소를 해서 입을 막고, 평판과 행실을 문제삼고, 그런 내용을 담아서 책까지 발간하고, 성폭행 가해당사자로 하여금 피해자를 비난하는 글을 올리게 조직하고, 사생활과 신상정보에 심지어 상담기밀까지 까발리고...
2차가해가 명백한 이 모든 것을 한 것은 노연 지도부이지, 광주의 그 선생님은 아니다. 또 ‘성평등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온 그 선생님과 성폭력 피해자의 ‘재발방지를 위한 조직내 반성폭력 교육 실시’ 요구를 한사코 거부해 온 노연 지도부는 같지가 않다.
따라서 노연 지도부는 이런 식으로 갈등을 부추기고 문제를 악화시키기보다 자신들부터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피해자의 성폭력 상담기밀을 유출한 핵심 책임자가 이런 기사들을 계속 쓰는 것도 참 보기 그렇다.(피해자들에 대한 가해 중단과 사과가 우선이다) 또 광주의 그 선생님을 지지하는 분들도 이런 점들을 살펴봤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사안은 스쿨미투가 이뤄온 의미있는 노력과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면서 고민을 더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 있다. 스쿨미투는 분명히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분출할 길을 열어주었고, 이것은 용기있는 학생들과 믿고 손을 잡아준 교사들이 만든 성과다.
이 과정을 돌아보면 단순히 주관적으로 수치심을 느꼈으니 성폭력이라는 식이 아니었다. 또 단지 몇몇 교사 개인들의 인격이 문제였던 것도 아니다. 여성차별적인 사회와 학교라는 실제구조 속에서 젠더 등의 위계를 이용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구체적 사건들이 있었다.
오래동안 입이 막히거나 증언을 의심받고 괴롭힘을 당하던 피해자들은 이제야 조금씩 신뢰와 보호를 얻기 시작했다. 피해호소를 하면 일단 안전한 공간을 보장하고 진상조사에 들어가는 절차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성과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아직도 우리 사회와 학교는 여성과 학생과 피해자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형식화되고 기계적으로 적용된다면 취지가 왜곡되고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성폭력은 단순히 가해자 지목, 처벌과 추방만이 아니라 함께 교훈을 배우고 감수성을 높이며 공동체의 문화와 규범을 돌아보고 개선하는 과정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단지 고발만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 과정의 주체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광주 교육청의 관료적 행정처리와는 거리를 두면서, 가려진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소통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시행착오 속에서 더 많이 소통, 토론하며 학교를 더욱 평등한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 <스쿨미투와 페미니즘 교육> 토론회
얼마전 대학로에서 역사적인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함께 하다가 뒤늦게 <스쿨미투와 페미니즘 교육> 토론회에 갔다. 너무 늦게가서 아쉽게도 토론회 내용을 다 듣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매우 알차고 유익한 토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정 사건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적 판단이 아니라 더 폭넓은 틀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됐다. 스쿨미투로 분출한 목소리들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 자신이 놓인 특권과 위계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의 중요성 등이 기억에 남는다. 위계는 단순하지가 않고 남학생과 여교사라는 관계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될 수 있다는 지적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가해자를 지목, 처벌, 추방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했다. 듣다보니 최근 나타난 문제들은 매뉴얼의 기계적 적용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공감이 들었다.
가해자 중심적인 공동체의 문화와 규범이 바뀌고, 피해자가 두려움없이 말할 수 있을뿐 아니라 문제 해결의 주체로서 지지받고 힘을 갖게되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매뉴얼이라도 형식적 제도에 머물 것이다. 피해자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는 잊혀지고, 매뉴얼에 따른 관료적 행정절차만 남고, 성차별적 공동체는 그대로고, 피해자가 죄책감과 탓하는 시선들에 시달리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결국 요즘 노동자연대(노연)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피해자 중심주의[관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족해서 문제인 것이다. 성폭력 사건의 생존자가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반성폭력 운동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해져야 한다.
그런데 어제 토론회에서 노연 소속의 한 교사는 바뀌지 않은 생각과 태도만 드러냈다. 광주 사건을 예로 들며 ‘이 자리에 스쿨미투를 문제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국가 탄압에는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격을 방치하면 어떤 교사도 안전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나는 손을 들었지만 토론회가 바로 끝나 발언 기회를 얻진 못했다. 하지만 그분의 발언은 솔직하지 못했다. 지금 노연은 자신들의 기관지를 통해서 분명 스쿨미투를 문제삼고 있다. ‘국가기관으로 흡수된 스쿨미투가 무조건 여학생 편만 들면서 남자 교사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분열주의와 개량주의를 보이고 있다’는 논리다.
학생들의 문제제기가 국가탄압의 일부로서, 전체 교사를 위협한다고 보는 것은 더욱 적절치 않다. 이것은 결국 학생들의 문제제기를 의심, 비난하게 만들고 교사-학생의 대결 구도를 부추기게 될 수 있다. 어제 토론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광주 사건에서 직위해제나 형사처벌 등은 적절치 않고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히던 상황이었지만, 노연의 이런 식의 주장들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청을 비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잘못된 대응을 반성하고 성찰해야할 당사자인 노연이 저런 말을 한다는게 더 문제다. 심지어 어제 토론회 자리에는 자신이 상담했던 성폭력 피해자의 직장내 성폭력 상담기밀을 온라인에 공개한 당사자가 직접 왔다. 자신을 믿고 상담했던 내용을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해 공개해버린 것인데, 이것은 성폭력피해자보호법률상 불법이다.(이 사람은 요즘 광주 사건에 대한 기사와 인터뷰를 도맡아 쓰면서 전교조 여성위를 비판하고 있다.)
나는 그 피해자를 도와온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직접 보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끝나고 나오다가 마주친 그 사람에게 ‘제발 당장 그 기사를 내려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당황해서 나를 피해 화장실로 가더니 곧 건물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노연 소속의 한 교사는 나를 막아서더니 ‘여기서 왜 이 이야기를 꺼내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토론회 주최측에 ‘우리는 여성들인데 남성인 저 사람이 우리를 몰아세웠다. 저 사람을 분리해달라’고 요구했다.
항상 이런 식이다. 페미니즘을 비판할 때는 ‘남 대 여의 잘못된 이분법이 문제이고,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면서 비판하더니, 이런 상황만 되면 ‘생물학적 성별’을 내세우며 그 뒤에 숨어서 피해자에 대한 반성과 사과 요구를 차단한다.
결국 나는 주변에 와서 궁금해하는 전교조 교사 분들에게 ‘믿고 상담했던 자신의 성폭력 피해경험이 온라인에 계속 공개돼 있으니 피해자는 하루하루가 힘들다. 제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저 분들이 그걸 내리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는 내내 여러모로 씁쓸하고 참담한 기분이 가시지가 않았다.
●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화해와 치유의 길이다
https://www.facebook.com/scatv567/posts/2266099733489375 사실 이 사건은 이토록 길고 자세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원하지 않은 여성에게 포르노를 보여준 것은 명백한 성폭력이다. 그것도 선배와 동기였던 남성 2명과 신입 여학생이 있던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가해자들 자신도 어떻게 동의를 구했는지 어떤 설명과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동의한 줄 알았다.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손가락 틈으로 봤을 것이다’는 동의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양 당사자를 불러서 직접 조사한 시립대양성평등위원회는 이것이 성폭력이라고 판정했다.
그런데 피해를 호소했더니 거짓말쟁이고,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고, 연애 결별의 앙갚음이고, 오히려 남성을 짝사랑해서 술먹고 성추행하려다 실패하니 무고를 한 것이고, 성매매를 하려한 여성이고, 포르노를 보여준 것은 성매매를 말리려고 보여 준 것이고... 이런 공격이 쏟아졌고 입을 막기 위한 역고소 소송까지 했다. 이것은 명백한 2차가해다.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저지른 이런 잘못들에 대해 어느 정도 여성인권 단체와 활동가들 사이에 공동의 인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달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성폭력, 인권, 사회변혁을 말하던 일부 활동가들이 홈페이지까지 만들어서 바로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 중의 1명(SF협회원인 이모 작가)을 적극 옹호하며 피해자와 연대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고소를 통해 얻어낸 판결문이 이 분들의 강력한 무기였고, 노연과 이모 작가가 피해자를 괴롭히는데 사용했던 온갖 논리들이 노골적으로 재반복됐다. 연대자들에 대한 비난, 피해자와 연대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몰기, 사과 요구를 괴롭힘으로 몰기, 피해자가 원치 않는 또다른 사건의 강제 공론화, 정신질환에 대한 혐오와 낙인... 아래에서 대책위가 반박하고 있는 SF협회의 조사결과는 바로 이 과정에서 저 분들이 피해자와 연대자들을 괴롭히고 공격하는데 동력을 제공해 줬다.
피해자 쪽의 문제제기에 답하지 않던 SF협회는 갑자기 피해자에게 알리지도 물어보지도 않고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복잡하고 건조하고 길게 쓰여진 조사결과의 핵심은 단순했다. ‘피해자는 거짓말을 했고, 성폭력도 2차가해도 없었으며, 오히려 피해자가 성추행을 했다.’ 그리고 이런 방식, 즉 자격도 절차적 정당성도 없이 피해자에게 알리지도 묻지도 않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조사결과를 내놓은 것도 바로 노연이 사용한 방식이다. SF협회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노연의 단순반복은 아니었다. 더 심한 측면이 있었다. 피해자와 연대자 개인에 대한 막말, 욕설, 폭언은 노연 지도부도 하지 않던 일이다. 또 이 분들이 노연의 2차가해를 비판했다는 역설이 있다. 과거에 이모 작가가 한 2차가해는 부정하고, 지금 벌어지는 2차가해에는 동참했다. 같은 행위를 노연이 하면 2차가해고, 자신들이 하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분들은 과거에 노연을 비판했을 때도 그 내용이 아니라 대응방식만을 문제삼았던 것 같다. 그리고나서 이 분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금 다시 반성폭력, 인권, 사회변혁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타인을 비판하기 쉬워도 자신을 성찰하긴 어렵다고 해도 정말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런 괴롭힘 속에서 피해자와 연대자들의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심지어 스스로 정신질환 병력까지 공개하도록 몰렸던 상황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것은 변할 수가 없고, 또 화해와 치유를 가능하게 할 유일한 길이다.
(기사 등록 2019.9.30)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 http://www.anotherworld.kr/608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억압과 차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괴롭힘을 중단하고 사과하라 (0) | 2019.11.25 |
---|---|
왜 ‘99 퍼센트를 위한 페미니즘’이 중요한가 (0) | 2019.11.01 |
멀지만 가야 할 길 (0) | 2019.09.25 |
케어 파국에 관한 소고: 조금 더 나은 공존을 위하여 (0) | 2019.09.20 |
20대 남성과 성평등 그리고 페미니즘 (0) | 2019.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