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정혜신-이명수 <당신이 옳다> 초청 강연회
지난달 도봉지역에서 정혜신-이명수 <당신이 옳다> 초청 강연회가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 책을 너무 감동적이고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시간 예정을 두배 정도 넘겨서 진행된 강연과 질의 응답은 역시나 최고였다. 아주 행복한 치유와 위로의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우리가 감정적 리액션과 감정노동은 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잘 이해하거나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최악의 경우는 ‘왕따 아이에게 조언한 부모’같은 경우일 것이다. 왕따 당하는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아이의 말을 들고 부모는 ‘너도 다른 애들에게 따돌려지면 안 되니 일단 그 아이와 거리를 둬라’고 조언한다. 다음날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왕따당하는 친구 이야기는 바로 아이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처럼, 낙인찍혀 공격당하는 사람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 흐름에 동조하거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 거리를 둔다.
또 다른 최악의 경우는 고통과 상처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대응이다. 창문으로 투신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학교에서 창문에 쇠창살을 설치해 버린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해당 지역의 교육당국은 그것을 ‘모범사례’라고 선정했었단다.
아주 안 좋은 태도는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에게, 먼발치의 얕은 곳에서 팔짱끼고 서서 ‘그렇게 손과 발을 움직이지 말고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서 빠져나오라’고 훈수 두는 자세다. 나도 내가 고통에 신음할 때 ‘차분하게 잘 이겨낸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감정적인지 실망스럽다’는 주변의 반응을 듣고 큰 좌절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럴 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출렁이는 것이다. 내 고통을 인지하고 그것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사람은 안전함을 느끼고 차분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두 분 선생님은 특히 서로 눈을 포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구제역 살처분 과정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동물의 눈을 마주친 공무원이 괴로워하고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사례를 말해 주셨다. 고통의 순간에 서로 눈을 보는 것은 ‘존재와 존재가 무방비한 상태로 서로 마주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와 다른 존재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안한지 온전히 이해하고 느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고통은 대신하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물어봐야 한다. 특히 편견을 버리고 존재 자체에 주목하면서 그 고통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피해자에게 주변에서 해준 가장 최악의 위험한 말은 바로 ‘이제 그만 거기서 벗어나라. 당신을 위해서도 그 힘든 기억을 잊어라. 가해자를 용서해라’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피해자는 ‘역시 아무도 나를,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하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됐다.
반대로 가해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이고 반드시 그러고 말겠다는 그 피해자에게 위로가 된 것은 ‘왜 죽이고 싶은지 충분히 알겠다. 반드시 꼭 잘 준비해서 그것이 성공하길 바란다’고 말해 준 것이었다. 그 말은 살인을 부추긴 위험하고 무책임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 반응들을 접하고서부터 피해자는 조금씩 차분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곁에 필요한 것은 자기 일처럼 그것에 분노하고 함께 아파하고, 먼저 나서서 가해자를 향해 싸워주려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볼 때 피해자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조금씩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그날 두 분의 주옥같은 강연을 들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강연 막바지에 내 휴대폰에는 노동자연대 지도부와 간부가 성폭력 피해자를 2가가해한 온라인 글과 댓글을 올렸다는 알림음이 계속 울렸고, 그런 마음의 평화는 결코 지속될 수 없었다. 주말은 사라졌고 그 힘든 시간은 일주일 내내 계속됐다.
●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콘서트’에 다녀와
얼마전 ‘정태춘 박은옥 40주년 콘서트’ 서울 첫공연은 메이데이 전날밤이었다. 그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과 감동의 장소에 가있었다. ‘북한강에서’, ‘5.18’, ‘92년 장마 종로에서’, ‘시인의 마을’... 이어지는 명곡마다 뜨거운 박수가 나왔고 막바지엔 모두들 기립박수를 쳤다.
두 분은 아주 좋아보였고, 멘트는 모두 웃음 짓게 가슴을 따듯하게 해줬다. 이 노래가 왜 안 나오지 싶었는데 결국 앵콜곡으로 나왔다. ‘사랑하는 이에게’ 듀엣으로 부른 노래 중에 이처럼 아름답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노래는 별로 없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3곡 중에 한 곡은 나왔으면 했던 노래들이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죽음’, ‘일어나라 열사여’, ‘아 대한민국.’ 특히 ‘우리들의 죽음’(https://www.youtube.com/watch?v=mOTBeTOZCUs)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내 인생을 흔든 노래다. 비록 이 노래가 나오진 않았지만 공연을 보면서 그 시절의 기억들이 계속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군대 갔다 와서 매일 도서관에서 가서 무슨 의무처럼 자본론을 힘들게 읽던 기억, 집에 가는 길에 ‘우리들의 죽음’을 듣고 또 들으며 마음을 다잡던 기억, 결국 졸업이고 취업이고 다 포기하고 집을 나가 새벽 알바를 하면서 활동하던 기억, 어느 해던가 명동성당에서 경찰에 잡혀서 수갑을 찬 채로 도망가던 기억.
‘우리들의 죽음’을 들으며 뜨거워지던 눈가와 가슴이 그런 길을 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가사가 지금도 전부 기억나고 특히 절정 부분이 그렇다.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저기 옮겨 붙고 훨~ 훨~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훨”
‘훨~훨’ 부분에서 정태춘의 목소리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꾹꾹 눌러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소재삼은 그런 비극은 그 후로도 잊을만하면 뉴스에 나왔다. 몇 년 전에도 이번엔, 이주노동자의 가족이 같은 비극을 겪은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는 천사들이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이라고 말할 때, 무너진 가슴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뜨거운 가슴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내던지게 만들었던 시간들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요즘은 그러면서 무엇을 놓치고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던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문재인이 아직 재판도 끝나지 않은 삼성 이재용을 또 만나서 '1등할 자신있냐'며 전폭적 지원을 약속한 다음날, 메이데이에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행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정태춘이 노래한 ‘아 대한민국, 저들의 공화국’은 여전하다는 걸 확인한다. 아무리 숭고한 대의라도 인간적 아픔이나 상처보다 위에 있어선 안되는데 하물며 아직도 ‘경제’, ‘성장’, ‘수출’같은 것들을 더 앞세우는 사회와 정부라니...
●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매력과 위안
넷플릭스가 거대한 공룡처럼 미디어 산업을 먹어간다지만, 매력적 콘텐츠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최근엔 미국 DSA(민주적사회주의자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에 대한 흥미있는 다큐가 올랐다. 이처럼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깊이있는 다큐들도 좋은데, 괜찮은 드라마도 많이 보인다.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여성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오뉴블). 현재 시즌 6까지 나온 오뉴블을 최근에야 다 봤다. 분량이 많기도 하지만 짬날 때 간간히 보다보니 꽤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런 마음의 여유도 잘 내기 어렵도록 훼방한 요인들(노연 지도부의 끊임없고 잔인한 성폭력 피해자 괴롭히기)도 원망스럽지만, 오뉴블을 보면서 위안도 얻었다.
그동안 가끔씩 오뉴블을 언급해 왔지만, 종합적으로 돌아보자면 오뉴블이 매력적인 핵심 이유는 정말 다양한 인종, 젠더, 계급, 연령, 외모, 정체성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수인종, 성소수자, 이민자, 정신질환자 등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다. 백인 레즈비언 커플이 주인공인 듯싶지만 갈수록 다양한 소수자들이 진짜 주인공들이 된다. 백인들이 멍청하고 한심한 집단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도 순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악역이라 하더라고 타고난 악인은 아니다. 옛날에 영화에서, 주인공에 의해 무수히 죽어나가는 악역들을 보면서, 그 악역 하나하나의 삶을 마치 부록처럼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그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떻게 자라고 왜 악인이 됐는지를 보여준다면... 오뉴블은 바로 그런 공상이 실현된 듯한 드라마다.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오고, 심술을 부리거나 서로를 괴롭히는 캐릭터들의 지나온 뒷얘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하나하나 풀어간다.
더구나 이 드라마는 오늘날 (미국)사회의 다양한 핵심 이슈들을 거의 빠짐없이, 결코 간단치 않게, 또 대체로 타당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페미니즘, 인종주의, 블랙라이브스매터, 이민, 마약, 정신질환, 빈부격차와 계급, 민영화... 이런 문제가 각 캐릭터의 구체적 삶 속에 녹아서 어떤 땐 슬프게 어떤 땐 웃기게 다가온다.
인상적 장면들이 아주 많은데 단연, 교도소 당국의 억압에 짓눌리던 재소자들이 하나둘씩 다같이 식탁 위에 올라서던 장면, 폭동 진압경찰의 진입을 앞두고 다같이 팔짱을 끼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왜 강간 가해자를 용서했냐고 다그치는 친구의 말에 두깃의 ‘계속 이런 엿같은 기분으로 병든 닭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라던 답도 기억나고.
코미디라서 유쾌하고 웃긴 장면이 정말 많은데, 시즌 3에서 부가 후원금 뜯어내려고 이성애자 기독교도로 개종한 척 연기하다 우파 목사의 빻은 말에 더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여성들이 입던 팬티에 집착하는 변태남들 덕분에 번창하는 팬티사업도...
어떤 캐릭터가 제일인지 참 고르기 어려운데 터프함과 유머가 넘치는 퀴어 부와 니키, 영원한 대장 레드, 사랑스러운 푸세와 소소 커플, 엉뚱한 두깃, 항상 유쾌통쾌한 신디, 트랜스젠더 소피아, 거친 매력의 블랑카, 똘끼넘치는 롤리와 수잔 중에서 수잔으로 기울지만, 그래도 역시 테이스티를 꼽겠다.
그녀가 이렇게 투사로 거듭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후회는 자유를 가진 사람의 특권이고, 지옥에 갇힌 우리들에겐 사치에요. 갇혀있는 건 우리지만 짐승은 저들입니다.” 재판 끝에 반드시 테이스티를 위한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세워지길 바란다.
오뉴블 시즌 6의 마지막은 악명높은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등장으로 끝나는데, 곧 다가올 시즌 7에서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 모든 교차된 모순과 억압과 폭력들을 뚫고서 어떤 마무리들을 만들어낼지 기대된다.
(기사 등록 201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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