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지난 2월 7일 언론노조에서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해고하고 고소한 디자인소호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나는 그 기자회견에 참가했다가, 피해자가 직접 나와서 그동안 겪은 끔찍한 고통들을 토로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우울증, 불면증, 폭식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자살충동...
이 사건에서 사측이 보인 태도는 그동안 내가 목격한 여러 사건들에서 본 잘못들의 종합이자 반복이었다. ‘혹시 여러 사건의 가해자들이 모여서 토론하면서 서로 배우고 있는 거 아냐’라는 누군가의 우울한 농담처럼 패턴은 비슷했다.
핵심은 고통에 대한 공감의 실종이었다. 디자인소호는 뛰어난 실력으로 업계에서 인정받고 명성을 날리던 자신들의 명예가 이 사건으로 훼손될 것이라는 점만 앞세웠다. 그래서 회사 내의 어떤 문화와 분위기가 이런 사건을 낳았는지, 회사의 책임은 무엇인지 돌아보지 못했다. 위로와 공감을 기대한 피해자에게 디자인소호는 오히려 해고를 통보했다.
왜 이토록 매정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을까? 아마도 회사 측은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왜 직원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일어난 일에 우리가 큰 책임을 져야 하지? 우리가 성폭력을 하라고 가해자에게 지시한 것도 아닌데. 업무 시간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강간 같은 심각한 수준의 사건도 아닌데, 왜 저 사람은 그런 문제로 회사를 시끄럽게 하고 업무까지 차질을 만들고 있지?’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하면서, 이런 잘못된 사고와 논리가 계속 발전해 나갔던 게 아닐까. 회사에 ‘분란’을 일으키는 피해자를 쫓아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면 사측이 갑자기 ‘당신은 원래 정직원이 아니라 인턴’이라고 허위사실을 둘러대며 성폭력 피해자를 해고한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무정한 태도가 피해자가 온라인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도록 내몬 것이다. 즉 온라인 공론화를 통해서, 만약 가해자와 회사 측이 잘못한 것 이상의 비난을 받으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책임은 바로 스스로에게 있고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피해자를 그런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측은 명예훼손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가해자와 함께 피해자를 고소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어진 법적소송은 전형적으로 피해자 입막기용이었다. 피해자의 SNS는 전부 증거로 캡쳐됐고, ‘근태 불량’은 피해자의 신뢰를 깎아내리기 위한 근거가 됐다.
이렇게 근무 태도가 불량하고 수시로 지각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냐는 논리였을 것이다. ‘페미니즘과 여혐 프레임’은 허위비방으로 사측의 명예를 훼손하는 데 피해자가 사용한 무기로 지목됐다.
이런 비정한 압박과 공격 속에서 피해자는 미흡한 합의금을 받고 성폭력 고소를 취하하고, 나중에는 사측 앞에 무릎 꿇고 빌면서 울기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직접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온라인에 퍼 날라진 글을 지워야 했다고 한다.
학자금 대출 빚에 시달리는 가난한 디자이너로서 피해자는 디자인 업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많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고, 국가인권위 잡지까지 제작하고 있는 사측의 압박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고 비난이 쏟아지고 사태가 불리해지자, 사측은 최근 공식입장문을 발표했다. 늦게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직 피해자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하지 않았고 직접 만나서 사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고소 역시 아직 전부 철회되지 않았다
공식입장문이 ‘일단 급한 불끄기’가 아니라면, 피해자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하고 즉각 소송 취하와 보상에 나서야 한다. 가해자들을 감쌀 것이 아니라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거듭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럴 때 진정으로 명예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번 기회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돌아보고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징계나 사과마저 피해자의 치유와 재발 방지를 위한 진심어린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들의 손실을 막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던 오류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디자인소호에서 일하는 직원들 속에서 이런 성찰이 등장했으면 한다. 내 동료이고 우리 회사라고 감싸고, 눈과 입을 닫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마 피해자가 좌절했던 이유도, 가장 듣고 싶었던 것도 바로 옆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의 응원의 한마디였을 것이다.
소식을 듣고 기꺼이 달려와 준 많은 사람들도 멋졌지만, 2월 7일 기자회견에서 내가 가장 감동한 것은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의 너무나 멋진 태도와 노력이었다. 조합원도 아닌 피해자를 수소문하여 노조에 가입시키고, 피해자 대리인 역할을 맡아 사측의 고소를 무죄로 이끌고 이 사건을 공론화시킨 것이다.
또 ‘끝까지 책임지고 피해자와 손잡고 싸우겠다’고 약속한 언론노조의 자세도 훌륭했다. 그날 피해자는 ‘제발 나같은 피해자에게 이 사회가 문을 닫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는데, 그것에 대한 강력한 응답이 바로 옆에 있었다.
GM노조의 채용비리, 민주노총 대대 유회 등에 힘 빠지는 속에서도 민주노조의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다른 피해자들도 이런 든든한 우군을 만났다면 얼마나 힘이 됐을까 정말 부러웠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에 나섰던 여성들이 곳곳에서 고소고발의 반격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이번 사건의 올바른 해결이 하나의 시금석이 돼서 차별과 폭력에 억눌리던 사람들이 더 굳게 손을 잡기를, 그 목소리들이 더 큰 힘을 얻기를 기대한다.
< 언론노조 기자회견문 >
디자인소호는 성폭력 피해 노동자에게 진심으로 속죄하라!
작년 5월, 유명 편집디자인업체인 디자인소호에 재직 중이던 한 디자이너가 직장선배 2명으로부터 신체적 ·언어적 성폭력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피해자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통보였다. 사측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내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갑작스럽게 해고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심적 고통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이 소식을 듣고 심적 고통을 담은 글을 올렸다. 사측은 이마저도 성폭력 가해자들과 모의해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죄 등으로 2차 고소에 나섰고,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두 고소 건에 대해 모두 기소 결정을 내려 피해자의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중시켰다. 지난 10개월간, 피해자는 하루하루 병원과 검찰, 법원을 오가며 평생을 안고 갈 상처와 싸워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난 2월 2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사측이 제기한 1차 고소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게시한 글이 허위라거나 피해자가 허위임을 인식하고 글을 게시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명확하게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곧이어 사측과 성폭력 가해자들이 제기한 2차 고소 관련 공판이 시작된다. 또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일상을 간신히 부여잡고 고소위협에 몸서리치며 지난한 싸움을 벌여야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작년부터 SN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증언을 목격했다. 그것은 단순한 고발이 아니라 몸에 각인된 기억들을 봇물처럼 쏟아 낸 폭발이었고, 고통의 증언이었다. 언론노조 역시 문화산업 전반에 걸친 성폭력 피해실태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응시하고 바로잡고자 지난 11월, <2016 출판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조사를 통해 놀라울 만큼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성폭력 피해경험을 안고 있고, 제대로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을 확인했다. 이처럼 문화예술계 많은 단위들이 스스로 성폭력 피해실태를 조사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썼지만, 피해당사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가해자들의 ‘명예훼손’ 고소였고, 업계 카르텔에 의한 암묵적인 은폐였다. 우리는 디자인소호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 역시 피해자에 대한 사측의 전형적인 보복과 탄압으로 규정하고 디자인소호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디자인소호는 즉각 피해자에게 사과하라.
하나, 디자인소호와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제기한 모든 고소를 즉각 철회하고, 향후 피해자에게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라.
하나, 디자인소호는 피해자가 그간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극복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책임 있는 보상을 다하라.
다행히 어제 오후, 디자인소호는 피해당사자에게 사과하겠다는 뜻을 언론노조에 전해 왔다. 이미 피해자가 소속된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성명이 나가고, 기자회견 일정이 공개된 뒤에서야 여론이 두려워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이다. 언론노조는 디자인소호가 말로만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자세로 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지 예의주시하고 행동할 것이다. 더불어 문화예술계 연대단체들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폭력적 문화 근절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다할 것이다.
2017년 2월 7일
전국언론노동조합
(기사 등록 201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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