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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사회재생산 이론이 여성억압을 더 잘 설명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3. 30.

콜린 윌슨 (Colin Wilson)

번역: 박상우

 


이 글은 낸시 린디스판 (Nancy Lindisfarne)과 조너선 닐(Jonathan Neal)이 얼마 전 쓴 글(http://rreload.tistory.com/152)에 대한 반박이다. 낸시와 조너선은 국제사회주의 저널(ISJ) 139호에 <젠더의 역할 (what gender does)>이라는 이에 대한 더 자세하고 긴 글을 쓴 바 있다. 이것은 여성 억압의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이다.

 

출처:http://rs21.org.uk/2015/02/19/a-reponse-to-nancy-lindisfarne-and-jonathan-neales-what-gender-does/

 

여성 억압은 전세계에서 정치적으로 중심적인 의제가 되었다. 혁명가들이 여성 억압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 중 일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우리는 여성 억압을 포함한 모든 억압에 반대한다. 우리는 여성 억압에 맞서 싸우는 여성주의자들과, 그리고 성희롱과 강간 등을 포함한 억압을 경험한 여성들과 함께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진보적 시각을 가진 광범위한 부류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다른 질문들도 있다.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위한 더 광범위한 운동과 연결되어 있는가? 애초에 여성들은 왜 억압 당하는가?


 

19세기 중후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저술하기 시작한 이래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50년이 넘는 기간동안 같은 문제들에 대해 고민해왔다. 여성주의 운동의 가장 최근의 경향은 사회재생산 이론의 부활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사회재생산 이론의 부활은 특히 1980년대부터의 리즈 보글 (Lise Vogel) 의 연구에 기반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의 질문들 중 최소한 몇 가지에는 답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2013년 여름에 낸시 린디스판과 조나선 닐은 ISJ 139호에 실린 그들의 논문 <젠더의 역할: What gender does>에서 이와는 상당히 다른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사회재생산 이론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 대부분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여성 억압의 기원과 동역학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석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존 작업이 어디에서 잘못 되었는지에 대해 그들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을 한다.

 

첫째, 그들은 젠더를 계급 불평등을 지탱하기 위해 작동하는하나의 현상으로 본다. 둘째, 지배 계급이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젠더를 의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그들은 가족이 여성 억압의 기원이라는 엥겔스의 주장에 반대한다. 이제 차례로 각각의 논점들을 살펴보자.

 

낸시와 조나선은 모든 계급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은 자의적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지배 계급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지배하는 사람들보다 더 유능하거나, 지적이거나 더 존경할만하지 않다. 피지배 계급도 어느 정도는 이를 부당하다 여기고 있고, 따라서 공공연한 봉기부터 유순한 복종 (“영주께서 지나가실 때 조용히 방귀를 뀐다던가 하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저항한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계급 통치를 정당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낸시와 조나단의 주장은 바로 젠더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계급 통치를 정당화하는 시도들이 언제나 수상쩍은데 반해, 젠더는 강력하게 작동한다.

 

만일 사람들이 성적인 사생활과 가족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평등함을 경험한다면, 일터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의 불평등은 훨씬 덜 용인될 것이다”.

 

우선, 나는 계급 간의 차이가 항상 명백하게 기만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려고 한다. 중세시대 농노는 영주의 삶이 자신의 삶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영주는 (농노들과는) 전혀 다른 집에서 하인들과 가족들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무기를 가질 수도 있고, 무기를 다루는 법도 훈련 받았으며, 그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울 사람들도 있다.

 

만일 글을 모른다면 영주는 글을 아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들의 도움으로 지식과 교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농노들에게는 배제된 것들이다. 최종적으로, 영주의 지배는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농민은 내가 좋은 영주가 될텐데라던가 영주와 나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존재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동등하고 공식적으로 평등하다는 생각은 자본주의 특유의 사고방식이다.

 

우리 사회에서조차도, 대부분의 노동자들 중에 나는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있고, 내 직장 동료들도 그러하다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그들은 혁명적인 과정을 통해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그때까지는, 지배 계급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그들의 지배를 수용한다. 따라서 낸시와 조나선이 계급 통치가 절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계급 사회에서 이는 대체로 상식이다.

 

낸시와 조나선은 젠더가 계급에 비해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들은 사랑, 부모로서의 삶, 삽입 성교, 출산, 모유 수유와 같은 사적인 성관계 및 가족 관계와 관련한 경험들에 집중한다.

 

젠더에 대한 이러한 개념과 행위들은 사람들이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수용하고 자신들의 삶에서 재생산하면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낸시와 조나선의 주장의 문제점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은밀하고 사적인 경험을 계급의 더 일반적인 경험으로부터 구분해내는데 치중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분리된 사적 영역이란 개념은 그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혹한 공적 세계가 사적인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사적 세계는 더 자연스럽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더 많은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느끼는 영역이 됐다.

 

마르크스가 언급하였듯이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며 노동 안에서는 자신의 외부에 있음을 느낀다. 노동자는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또는 기껏해야 그의 거주지와 멋내기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 자신을 동물 이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온다.”[각주:1]

 

공과 사의 구분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가 Ruth Mazo Karras는 자신의 책 <중세 유럽의 섹슈얼리티 Sexuality in Medieval Europe>에서 우리 사회와의 차이를 설명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침실에서 무엇을 하던 그것은 그들만의 사정이고 따라서 국가가 이를 규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것이 그들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어떤 성적 상대를 선택하는가는 그의 가족과 유산 상속에 영향을 미쳤다. 어떤 성적 활동을 선택하는가는 사회 질서에 영향을 미쳤고 따라서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였다.[각주:2]

 

농노들은 열려있는 창문 아래에 숨어 남의 사적인 대화를 엿듣거나 남녀가 간통을 저지르는 것을 나무 위에 앉아서 지켜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집에서도 사생활이란 없었다.

 

결혼한 부부는 대개 침대를 같이 썼다. 농노 가족들 중에는 아이들과도 침대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 계층에서는, 하인이나 신하가 보통 영주나 귀부인의 침실에서 같이 잠을 잤다. 상류 귀족 계층의 경우에는 종종 부부가 각자의 침실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하인들은 언제 그 부부가 한 침대에서 자는지 잘 알 수 있었다.[각주:3]

 

여기에 은밀한 성생활이란 사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그저 공적인 계급 사회를 지탱하는데 어필할 뿐이다.

 

낸시와 조나선의 두번째 핵심 주장은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의도적으로 젠더를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배 계급이 어떤 때는 인종이나, 종파, 민족성을 사용해서 분할 통치하지만, 항상 사용하는 것은 젠더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지배 계급이 분할 통치를 하고 특정 그룹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자신들에 대한 반대를 다른 데로 돌린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장치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젠더에 대한 개념은 특정한 물적 토대에서 발생한다. 즉 지배 계급은 노동력의 재생산이 보장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지배 계급에게 다음의 두 종류의 인간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바로 출산이 가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는 것이다.

 

출산이 가능한 대부분의 사람이 시스젠더(cisgender) 여성 (, 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닌)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있어서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식으로 여성은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영국과 같은 나라들에서 자본주의는 법 앞에서의 형식적 평등 여성은 동일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고 등등 - 이란 개념과 연결되어 있고, 사회보장제도는 여성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임금)노동을 하도록 부추긴다.

 

여성에 관한 사회적 질문들에 대해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왔다. 이는 지배계급 안에서의 일련의 논쟁거리,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사상에 끌리는 이데올로기적 구성, 자본가 계급과 다른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을 낳는다. 이런 갈등 속에서 부상한 사상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가능한 것들이고, 그것이 상식을 낳는다.

 

게다가 지배 계급은 대학이나 언론과 같은 여론 주도 세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이는 낸시와 조나선이 젠더는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복잡하면서 교묘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지배 계급이 단지 성차별주의를 지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음모론에 해당한다. 지배 계급은 이데올로기 생산 과정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전적으로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사상은 절대 변할 수 없을 것이다.

 

낸시와 조나선의 세번째 핵심 주장은 가족에 대한 것이다. 엥겔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여성 억압이 가족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는 가족이 전적으로 변화되거나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한 유명한 문구가 바로 부르주아 가족은 소멸할 것이다 자본의 소멸과 함께라고 주장한 부분이다.[각주:4]

 

낸시와 조나선은 자신들의 인류학적 현장 연구에 근거해서, 다양한 역사적 시대와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반박을 시작한다. 그들은 생산 활동이 많은 사회에서 남자들에게만 또는 여성들에게만 부과되지 않음에 주목하면서, 그래서 영국과 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형태의 가족이 대부분의 역사에서는 생소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모두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성 억압이 수천 년 동안 있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아는 가족이 최근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가족이 그 모든 역사에 존재하는 여성 억압의 근원이 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가족이 여성 억압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각주:5]

 

낸시와 조나선의 주장은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의 동역학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전제한다면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 최소한 노동 계급 여성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봉건 사회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의 계급적 지위가 재산의 소유에 따라 결정되었다.

 

영주는 농노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 그러나 농노도 가구, 세간살이, 농기구, 그리고 가축 몇 마리 정도는 소유하고 있었다. 가정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러한 물품들을 축적해야지만 남녀는 결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가족이란 늘 재산 소유에 직결된다.

 

영주들 사이에서는 결혼이 가문을 맺어주는 전략적인 방법이었지만, 농노들 사이에서도 여성들은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져와야 했다. 영주와 농노 모두에서 여성이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은 재산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다.

 

남편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아내는 부정을 저지를 수 있고, 사생아를 남편의 자식이라 속임으로써 재산 상속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여성들에게도 계속 적용되었다. 18세기 작가 사뮤엘 존슨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의 순결이 사회에 어떠한 중요성을 갖는지 생각해 보자. 세상의 모든 사유재산이 이에 달려 있다. 우리는 양을 훔친 도둑을 목매달지만, 부정한 여성은 양과 농장 그리고 모든 것을 정당한 소유주로부터 (다른 데로) 넘긴다.[각주:6]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계급의 계급적 지위는 재산 소유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따라서 노동 계급 여성이 겪는 억압은 재산 상속을 통제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여성 억압은 사유화된 가족 안에서 사회 재생산을 책임질 주된 의무가 여성에게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여성 억압은 가족 구조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연결고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가족 구조가 역사적으로 크게 변화해왔다는 사실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가족이 여성 억압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낸시와 조나선의 생각이 여성 억압을 이해하거나 이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면에 그들이 거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특히 사회재생산 이론은 수년간 그 전보다 더 선명해졌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그들이 제안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한 접근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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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x,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Estranged Labour [본문으로]
  2. Ruth Mazo Karras, Sexuality in Medieval Europe: Doing unto others, p. 22 [본문으로]
  3. Karras, Sexuality, p. 81 [본문으로]
  4. Section II: Proletarians and Communists을 보시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Aufhebung der Familie”를 주창한다. “Aufhebung (지양)”라는 어려운 단어는 헤겔로부터 나왔는데, 파괴와 변형을 모두 일컬을 수 있다. [본문으로]
  5. 이런 형태의 주장은 ISJ 논문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낸시가 연례 <역사유물론> 학술대회에서 이런 식의 주장을 여러 번 했다. [본문으로]
  6. James Boswell, The Life of Samuel Johnson: Volume One, Boston, 1832, p. 39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