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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동독과 소련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6. 7. 16.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며칠 전에 베를린에 갔다왔습니다. 숙소는 옛 서백림 (서베를린)에 있었고, 제가 강의했던 베를린 자유대도 서쪽의 부촌 안에 있지만, 저는 옛 동백림 (동베를린)도 몇 번 가고, 그쪽에 있는 동독사 박물관도 관람했습니다. 베를린에서 이런 나들이를 하면서 저는 계속해서 동독과 소련 사이의 '인연'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련도 동독도 없어진지 이미 30여년이 됐지만, 이 인연을 베를린에서 거의 피부로 느낄 정도입니다. 동독 시절의 제1 외국어였던 러어를, 제 나이 이상의 동독 출신들은 지금도 종종 영어 이상으로 잘 합니다. 동독의 정계에 비상한 영향을 미쳤던 옛 소련 대사관은 지금도 그대로 러시아 대사관이고, 꼭 모스크바를 방불케 하는 동독 시절의 아파트촌들은 지금도 베를린의 변두리에 꽤나 보입니다.

이 인연에 대해서 동독 출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곧 느끼는 것은 어떤 이중성이랄까, 양가성 같은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미군 범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지만, 동독 시절의 주독 소군의 강간 등 흉악 범죄나 자연 파괴 등에 대해서는 지금도 별로 안좋은 기억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한데 동시에 진보적인 한국인들이 미국의 좌파 지식인인 촘스키나 하워드 진 등의 저서를 탐독해왔듯이, 과거의 동독 체제에 비판적이거나 거리를 두었던 옛 '재야' 출신들 역시 불라트 오쿠자바와 같은 야당적 분위기의 소련의 비주류 노래 시인의 레코드를 즐겨 들었던 시절을 거의 그리움이 찬 목소리로 회상합니다.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소련과 동독의 인연이란 태생적이었고, 거의 숙명 그 자체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발터 울브리히트 (1893-1973) 등 동독의 건국 주역들의 집단, 즉 파쇼 독일의 감옥이나 망명지인 모스크바에서 히틀러 집권기를 보낸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스탈린의 소련이란 신이자 악마였습니다. 동시에 그 양면을 가졌단 이야기입니다. 일면으로는, 그들이 소련 없는 '사회주의 혁명'이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치명적 위기에 빠져도 지배계급이 1933년의 독일처럼 파시즘을 선택하면 선택하지, 혁명을 일으킬 여지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는 건 그들의 경험적 시각이었습니다. 전차와 대포, 전투기가 없었던 그들에게는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변혁'을 위해서는 소련군의 전차, 대포, 전투기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소련을 결코 그대로 모방하려 하지 않았지만, 대략적으로는 그 변혁의 모델 역시 소련이었습니다.

한데 그들에 대한 스탈린의 잔혹성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의 조선인 혁명자들도 거의 전원 다 총살에 처하게 하거나 유배지에 보내버렸지만, 모스크바에서의 독일 공산주의 망명객들도 아주 호되게 당했습니다. 전체의 약 3분의 1, 지도부의 7할 정도 총살 당한 것이죠. 약간이라도 "말을 안들을 사람"이면 살아남을 리가 없었습니다.

울브리히트가 살아남아 나중에 스탈린으로부터 동독에서의 권좌를 '하사'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 스탈린의 의심을 받은 다른 독일 공산당원의 숙청에 대한 당 지도자로서의 그의 승낙 등이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잘 몰라도 당간부 사회 안에서는 그의 손이 스탈린에게 죽임을 당한 동료 독일 공산당원들의 피에 묻어 있다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습니다.

울브리히트는 동아시아에 관심 많은 국제주의적 지향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1956년 북경 방문 때에 그가 만리장성을 보고 베를린 장벽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는데, 그와 동독 지도부는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들을 늘 예의주시했습니다. 1954-62년에 동독이 함흥의 재건을 책임지고 지원하는 등 대북 사업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습니다.

울브리히트에게는 북한이란 "동류의 분단 국가"이었고, 그는 북한의 운명에 대해 상당히 깊은 개인적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데 모택동이나 김일성과의 이런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 주석이나 김 주석과 같이 소련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다는 것을 스스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충실한 비밀 경찰 수반이었던 에리히 밀케가 정확히 표현했듯이 "소련이 없으면 동독도 없다"라는 건 그에게도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1953616, 베를린 등지의 노동자들이 동독의 집권당에 반대해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에 그 봉기를 진압해준 것은 바로 주독 소련군이었습니다. 그 주독 소군이 철수하는 순간 집권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 역시 다시 모스크바 망명길에 올라야 한다는 걸 울브리히트처럼 풍찬노숙을 다 경험한 노회한 정치인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한데 노동자들을 봉기로 내몬 것이 바로 전후 배상에 대한 소련 당국의 과도한 요구라는 사실도 그가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탈린 생전에 이런 요구를 거절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는 대숙청의 경험을 회상하여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이 신이었다면 이는 너무나 많은 제사를 요구했던, 너무나 무서운 신이었습니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요령을 부려서 열심히 버텼습니다. 일면으로 그들은 신의 보호를 종종 청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1961, 고숙련 전문가들의 서독으로의 '탈동'을 막기 위한 베를린 장벽의 축성은, 소련의 후견으로 인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소련과 달리 울브리히트 치하의 1960년대의 독일에서는 개인 사기업과 가족농 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1960년대말만 해도 개인 기업들은 소비재의 40% 정도를 공급했습니다.

1962년 서독에 이어 동독 역시 징병제를 도입했지만, 교회와의 타협 차원에서 종교적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들을 건설부대로 배치하는 등 소련과 달리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했습니다. 울브리히트는 서독에서의 좌파운동과 연대해서 언젠가 "사회주의적인 통일독일"을 건설하고 싶어했던 포부가 큰 정치인이었고, 특히 사민주의자 빌리 브란드트처럼 "말이 통하는 사람"1969년에 집권하자 동독을 서독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잘 살고 나름대로의 개인 자유의 폭이 있는 사회로 가꾸어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가면 갈수록 소련 지도자들에게 고자세를 취했습니다. 1960년대말의 동독이 소련보다 잘 살고 서구와 훨씬 더 가까웠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71년에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의 제자 격이었던 에리히 호네커는 그를 내밀어버리고 스스로 권좌를 잡아버리고 말았습니다. 호네커는 "통일된 사회주의 독일"보다 차라리 영구분단을 더 지향했던, 그 당시에는 서구 좌파보다 소련에 훨씬 더 가까웠던 정치인이었습니다.

동독을 만든 나라는 소련이었습니다. 한데 동독의 주도층인 독일 공산주의자와 소련 지도부 사이의 동거는 '동상이몽' 그 자체였습니다. 소련은 말을 잘 듣는 '후국'을 원했지만, 상당수의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히틀러와 싸우면서 키웠던 "사회주의 조국"의 꿈을 펼쳐보고 싶어했습니다. 서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서로 지향하는 바가 결코 완전히 같지 않았던 그 관계...정말 복합미묘하고 극도로 어려운 인연이었습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베를린부터 평양 내지 하노이까지의 유라시아의 대륙의 상당부분을, "사회주의"라는 간판을 내건 정권들이 지배했습니다. 간판은 단일했지만 그 정권의 성격으로 보자면 대체로 2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생적 혁명 세력들이 집권한 소련 내지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등에서는, 정권의 "코드"- 애당초에 "계급"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 결국에는 "민족 국가 주권 확립""개발"이었습니다.

고속 개발 없이는 탈식민지 내지 후진 사회에서의 민족 국가 주권 확립도 불가능하니까 좌파 민족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현실 사회주의" 정권들은 대체로 동시에 개발주의적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소련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권을 쟁취한 김일성의 친구,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바로 이 그룹에 속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일국 단위의 민족 국가의 완성과 초고속 공업화를 지향한 개발 독재자였습니다.

한데 예컨대 동독 같은 경우에는 "민족 국가"의 신화나 "개발"에의 욕망과 좀 사이가 멀었습니다. 냉전이라는 시스템 안에서는, 동독에서 338천명의 소련군 병사들이 사실상의 치외법권을 보장 받으면서 주둔하고 있었던 이상 독일의 "민족 국가 완성", 즉 통독은 불가능했습니다. 소련의 ''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독의 집권세력들은 이미 1970년대 초반에 '영구분단'을 기존사실로 수용하여 서독과의 관계 기조로 '평화공존''경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보다도 훨씬 더 선진화돼 있었던 독일이라는 지역에서는 "고속 개발" 역시 그다지 매력포인트는 없었습니다.

한데 매력 포인트는 동독 정권으로서는 정말 필요했습니다. 38선이 요새화돼 있는 한반도나, 홍콩을 통한 '탈주'의 루트가 제한적이었던 중국과 달리,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 이후에는 동독인들은 가족 재결합 건 등으로 계속해서 서방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합법, 비합법을 다 합치면 동독의 총인구의 약 1,5% (26만 명)1961년부터 1989년 가을 이전까지 "탈동"하고 한국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귀순"을 한 것입니다. 참고로, 1989년 이전까지의 탈북자 ("귀순자")들의 총수는 607명에 불과했습니다. , 북한인과 달리 동독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약간 더 컸습니다.

정말 딱하게 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서독행"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동독의 집권 세력들은 뭔가를 "제공"해야 했으며, "뭔가"는 상황상 불가능한 "민족적 긍지""개발의 성공"과 질적으로 달라야 했습니다. 스스로 그 다수가 노동자 출신들인 동독의 집권층은, 독일 노동계급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다수가 사민당이나 공산당을 지지해온 독일 노동자들이 원했던 것은, 1. 민주적 권리와 2. 신분상승의 가능성, 그리고 3. 소비이었습니다.

일단 1, 즉 민주주의는 집권층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스탈린주의적 의식도 문제였지만,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의 개혁파에 의한 민주화의 시도를 소련 전차들이 깔아뭉갠 것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손쉬운 것은 2이었습니다. 동독에서 '노농대중' 출신들에게는 대학 입학과 지식인으로서의 신분 상승은 비교적 아주 잘 열려 있었습니다. 군 장교들은 거의 전부 다 "출신성분"은 노동자나 농민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취업률이 90% 이상이 되어 "세계 최고"의 명예를 얻고, 탁아소, 유치원 시스템 역시 "세계 최고"로 꼽혔습니다. 노동자, 여성 등 '약자' 출신들은 대체로 동독의 이념과 체제에 가장 득을 많이 본 것입니다. 한데 신분상승은 좋은데 궁핍 경제, 즉 물자 부족을 그 출발점으로 하는 경제에서는 아무리 선반공에서 화학박사로 "출세"를 해도 삶은 그다지 윤택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은 동독이라는 '실험 국가'의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전후의 냉전이라는 시스템 속에서는 미국 진영 국가들의 축적 과정에서는 미국 등 기존의 축적 중심으로부터의 1. 차관과 2. 투자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한국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부자나라가 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부자나라"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국제 금융 기관 등으로부터의 차관과 투자였습니다. 예컨대 한국은 1948-1991년 사이에 미, 일로부터 유입 받은 총자금 (원조, 차관, 그리고 투자 등)은 약 270억달러에 달하는데, 그 중에서는 투자는 약 90억달러였습니다.

1965년 그 당시 한국의 총국민생산이 30억달러 정도였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건네 받은 거죠. 그런데 동독 같은 경우에는 소련으로부터 이런 "돈벼락"을 맞을 리는 없었습니다. 구매력 대비로 대조, 비교해도 소련 경제는 1989년에 미국 경제의 45%밖에 되지 않았고 해외 투자 등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동독은 애당초부터 미국의 투자 등의 덕을 본 서독과는 경제적 "경쟁"이란 불가능했습니다. , 자원 치고 약간의 (질 나쁜) 석탄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동독은 1970년대의 소련과 달리 "오일머니"로 소비품을 사가지고 국민을 달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완제품 수출로 외화를 획득해 충분한 소비품을 사오지 않으면 인민들의 저항과 대대적인 서방으로의 탈출 시도 등 정치적 참사는 불가피했습니다.

1971년 이후 에리히 호네커의 지도부는, 이 딱하디 딱한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는 그냥 계속 소련과 서방 사이에서는 "곡예"를 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들의 "능력"을 우리가 좀 평가해야 합니다. 1982년 등 디폴트 위기에 빠졌던 동독은, 그리고 디폴트 등 국가부도를 면하여 1989년까지 그나마 "버틴" 것만 해도 그 통치자들의 엄청난 "수완"을 입증합니다. 일단 소련으로부터 투자를 얻지 못해도 그나마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글로벌 가격보다 싼 값에 파는 파이프라인 석유와 천연가스 정도였습니다.

1970년대 이전에, 소련으로부터 들어오는 석유의 값이 배럴당 2,4달러 정도였을 때에는 동독이 지은 정유공장에서 그 싼 원료로 만든 석유 상품의 서방으로의 수출로 그래도 상당한 외화 소득을 얻어 소비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데 197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의 석유 가격은 5배로 올랐고, 1981년에 다시 올라 거의 세계 평균 가까이 갔습니다. 공급량도 2백만 톤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빠진 동독을 살린 것은 1983-4년에 서독이 제공한 거의 2백만 도이츠마르크 어치의 차관이었습니다.

나카소네로부터의 차관이 한국에 제공돼 한국의 외환 문제를 풀어준 것과 같은 시기인데, 일본이 한국에 차관뿐만 아니라 대대적 투자도 실시한 것이죠. 반대로, 임금이 제3세계만큼 낮지도 않고 적어도 그 당시 한국보다 높았던 동독은, 서독 자본으로서 그다지 매력적 투자처는 아니었습니다. 동독에의 서독 자본의 투자는 1989년에 약 10억달러 미만이었는데, 한국에의 일본 투자의 4분의 1도 안될 것입니다. 한국과 같은 수출 지향적 경제 구조를 가졌던 동독은 한국과 같은 기간, 1980년대에 반도체 개발 등에 손을 대보기도 했지만, 역시 일본과의 보다 가까운 협력을 할 수 있었던 한국에 비해 큰 진척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동독이 망한 1989년에는 동독이란 나라는 이미 거의 부도 직전의 커다란 공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축적의 중심으로부터의 대대적인 투자가 결여돼 있었던 축적 구조상 수출 경제로서의 동독은 서독이나 한국과는 경쟁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체제상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 '독일 사회주의'의 너무나 재미있는 실험은, 이렇게 석패를 보게 됐습니다. 소련의 군사력은 투자력보다 훨씬 컸습니다. 전성기의 소련은 유럽의 상당부분을 군사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 구역에다 미국 만큼 '투자'를 하여 서구만큼의 소비 경제를 발전시킬 만한 '경제력'은 부족했습니다.

소련의 이런 한계도, 본국 노동계급이 원했던 부분들도 뻔히 잘 알았던 동유럽 공산당들의 지도자들은, 소련의 싼 원료와 서방의 차관, 서방으로의 수출, 그리고 서방 소비재 수입 등의 여러 수단들을 같이 써가면서 인민/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 했었습니다. 한데 소련으로부터의 석유가 막 비싸진 1980년대에는 이 모델 역시 더 이상 가동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동독을 포함한 과거의 동구권은 1989년 이후에 서구의 투자처로 재편되면서 기존의 자생적인 생산, 연구 능력 등의 상당부분을 글로벌 시장의 요구에 따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기사 등록 202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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