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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인종과 계급의 이분법을 넘어서 - 2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4. 2. 27.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의 관점

피터 후디스Peter Hudis

번역: 두 견

계급과 인종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마르크스,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 프란츠 파농의 저작에서 근거와 자원을 찾아보면서 깊이있는 고민과 유용한 통찰들을 제시하는 유익한 글이다. 이 글의 필자인 피터 후디스는 구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오크톤Oakton 커뮤니티 칼리지의 철학과 교수이자 <프란츠 파농: 바리케이드의 철학자>의 저자이며 로자 룩셈부르크 전집의 총편집자였고 ‘국제 마르크스주의-휴머니즘 조직’의 회원이다. 글이 매우 길어서 5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것은 두 번째 글이다.

출처: https://www.historicalmaterialism.org/articles/beyond-binary-race-and-class

첫 번째 글에서 이어짐 

인종적 자본주의에 비추어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하기

오늘날 인종차별 반대 투쟁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는 유색인종이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 계약에서 배제되었다는 개념이다. '사회 계약이 깨졌다!"라는 표현은 수많은 포스터와 그래피티에 등장하고 거리 시위와 대중 집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킴벌리 존스Kimberly Jones는 일부 반인종주의 시위에 수반된 폭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자기 동네를 불태우느냐'고 물으면 우리 동네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네가 훔치거나 내가 훔치면 권위있는 사람이 들어와서 상황을 해결한다는 사회적 계약이 있는데, 상황을 '해결'하는 사람이 우리를 죽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사회 계약이 깨진 것이다! 길거리에서 우리를 죽였을 때 계약은 깨졌고, 400년 넘게 우리가 그들의 게임을 하며 그들만 부를 쌓을 때 계약은 깨졌다. 그들은 계약을 어겼다.”

이러한 견해는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종주의가 자유주의적 사회계약의 허상을 드러낸다는 개념은 찰스 밀스Charles Mills 등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제기하는 도전에 비추어 재검토할 가치가 있다.

계약 관계는 자본주의, 특히 임금 노동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계약은 계약서의 형태를 취한다. 상호 인정은 각 당사자가 상대방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데 동의하는 한 이루어진다. 자본가는 이윤을 증대하는 한도 내에서만 노동자를 인정하고, 노동자는 자본가가 자신을 계속 고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자본가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정은 제한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을 떠나 자본의 독재적 계획이 최우선으로 지배하는 생산의 '숨겨진 거처'에 들어가면 임금 노동의 계약적 성격은 사라진다. 이 독재적 계획을 정의하는 것은 '살아있는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지배이다.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를 통해서 인격화된다. 그러나 자본가는 그것에 필요한 평균 시간에 따라 생산된 상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보다 더 이상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다.

생산량이 이 시간적 격차를 준수하지 못하면 경쟁사의 이윤율에 맞추지 못하고 폐업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로 나타나는 자본의 전제적 계획은 비인격적인 힘, 추상적인 보편적 노동 시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자유 시장'을 근거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인들이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 결정권의 대상이 되는 전제주의이다. 따라서 단순히 계약의 조건을 변경하는 것은 (더 높은 임금을 얻거나 노동 조건을 수정하는 것과 같이) 노동자에게 확실히 이익이 되는 것이더라도 그 자체로 자본주의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무정부 상태'의 무효화는 '시간이 인간 발전의 공간이 되는' 작업장 안팎의 자유로운 관계가 확립될 때만 새로운 사회로 이어진다. 물론 가치 법칙은 자본의 인격화에 의해 집행되지만, 자본이 반드시 노동력의 사적 소유자일 필요는 없으며, 국가 공무원들도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계급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재산 형태와 교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소외된 노동에 대한 그의 비판은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관계를 대상으로 한다. 확실히 <공산주의 선언>에서는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유 재산의 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르주아적 재산권의 폐지는 생산자의 자유로운 결사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을 그대로 둔 채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것은 새로운 생산 방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다른 변종을 낳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조잡하고 생각 없는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공동체는 노동 공동체일 뿐이며, 보편적 자본가와 같은 공동체가 공동의 자본에 의해 지급하는 임금의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개별적 자본가를 제거한 후 공동체를 '보편적' 또는 '추상적 자본가'로 규정하는 것은 20세기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그리고 소외된 노동을 철저히 변화시키지 못한 비국가주의적 협동조합에 대한 놀라운 예견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는 자본가(또는 노동의 주인이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모든 사람)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유재산은 소외된 노동, 자연과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피상적 관계의 산물이자 결과이며, 필연적인 결말이다'라고 주장한다.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자유'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가 근대 시장 경제에 반대했던 이유는 그 가능성의 조건이 사회적 노동의 특이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노동의 산물은 그 자체로 구체적이지 않은 그에 상응하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때만 보편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 노동에 의해 공급된다.

노동의 매 순간은 구체적이고 차별화된 작업을 수행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에 맞춰 추상적인 형태를 취하는 생리적 활동에 의해 가치가 창출되기 때문에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은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적 혁신과 같은 우발적인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것이 가장 '민주적'인 자본주의조차도 규정하는 자본 독재의 기초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다양한 종류의 노동이 단순 노동으로 환원되는 다양한 비율은 생산자의 등 뒤에서 진행되는 사회적 과정에 의해 측정 단위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종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은 추상화와 동질화를 위해 차이와 우연성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인종이나 인종주의라는 개념이 자본의 논리에 필수적이라는 개념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로디거David Roediger'인종은 자본의 논리 밖에 있다'는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등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자본>'인종적이고 민족적인 분할을 그 논리의 내부나 외부에 배치'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디거(및 비슷한 비판을 하는 다른 사람들)가 마르크스가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연관성에 대해 중요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본> 말미에 나오는 '소위 원시적 축적'에 관한 부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마르크스는 '아프리카가 검은 피부 사람들의 상업적 사냥을 위한 보호구역으로 전환된 것'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주요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그러나 <자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성찰이 자본주의의 탄생을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을 정의한 인종주의와 연결시킨다는 경험적 주장(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과 그 앞부분의 가치 이론적 범주에 대한 서술이 인종적 차별을 설명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부터 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 논리가치 형태이론가에 이르기까지 표준적인 이야기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가치 법칙을 제시하면서 인종이나 젠더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완전히 추상화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본> 1권의 첫 장은 고도의 추상성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대의 반인종주의 활동가와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오늘날 발견할 수 있는 풍부한 통찰력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자본>을 재산 형태와 시장 관계라는 현상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시간적 결정에 대한 서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인종주의와 자본의 논리 사이의 관계는 다른 시각에서 드러난다. 그 중심에는 <자본> 110'노동일'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선언, '하얀 피부의 노동자들은 검은 피부가 낙인이 찍힌 곳에서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를 발견한다. 이 선언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반흑인 인종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민감성을 보여주는 신호로 여겨졌지만, 마르크스주의 비판가들에 의해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방으로 이끄는 '보편적' 계급으로 특권화한 수사적 과장이라고 경시되기도 했다.

논쟁의 양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노동일에 관한 장이 <자본> 1권이 출판되기 직전인 1866년에야 작성되었고, <자본> 초기 초안에는 이 장의 어떤 버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국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흑인들이 농장에서 탈출하여 뒤 부아Du Bois가 다름 아닌 '대중 총파업'이라고 불렀던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고, 마침내 마르크스는 그의 가장 위대한 이론 작업의 한 장을 '나의 노동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가'라는 질문에 할애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마르크스가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향을 바탕으로 <자본>을 재구성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866년까지 마르크스가 노동일에 관한 70페이지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들린다 [...] 리카르도가 노동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잉여가치의 기원에 대한 전체 문제를 회피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토피아주의자들부터 프루동과 라살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 노동자 운동을 연구하기에는 너무 바빴기 때문으로 충분히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마르크스 자신의 주요 이론 저작에 노동일에 대한 부문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세번째 글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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