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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에릭 블랑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평 - 1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4. 1. 5.

피터 후디스PETER HUDIS

번역: 두 견

이 글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새로운 혁신적 재해석을 시도한 에릭 블랑Eric Blanc의 저작<혁명적 사회 민주주의: 러시아 제국의 노동계급 정치 1882-1917>,(Haymarket Books, 2022년 6월)에 대한 서평이다. 비록 이 책이 한국에 번역 출판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관련된 서평을 계속 번역하고 소개해 왔다. 특히 인상적이고 유익한 이번 서평은 이 책의 장점과 기여 뿐 아니라 몇가지 한계와 공백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분석하고 있다. 이 서평의 필자인 피터 후디스는 구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오크톤Oakton 커뮤니티 칼리지의 철학과 교수이자 <프란츠 파농: 바리케이드의 철학자>의 저자이며 로자 룩셈부르크 전집의 총편집자였고 ‘국제 마르크스주의-휴머니즘 조직’의 회원이다. 글이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것은 첫 번째 글이다.

출처https://spectrejournal.com/review-of-eric-blancs-revolutionary-social-democracy

역사적 발전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을 연구하는 렌즈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자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드물다. 에릭 블랑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1882년부터 1917년까지 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폴란드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핀란드인, 그루지아인, 아르메니아인 등 그가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을 발전시킨 사람들과 수많은 사회주의 정당의 구성원들에 초점을 맞추어 러시아 제국의 노동계급 정치를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렌즈를 제시한다.

8개 언어로 이루어진 1차 연구를 바탕으로 한 블랑의 포괄적인 연구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계와 활동가들의 논의를 망쳐온 일련의 오독과 고정관념을 독자들이 바로잡도록 도전하는 독창적인 공헌이다.

독창적인 공헌과 바로잡기

다음은 그의 연구가 제공하는 많은 통찰력 중 일부이다:

*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와 레닌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이 제국 전체에 걸친 훈련된 마르크스주의 지하당 결성의 선구자라는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는 유대인 노동 총동맹인 분트Bund(RSDLP보다 1년 먼저 결성된 단체)가 그 시초였다. 1903년까지 분트의 당원 수는 RSDLP의 5배에 달했으며, 후자는 분트를 자신들의 멘토로 여겼다.

* 폴란드 사회주의당은 폴란드 독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애국주의'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국제주의, 러시아 노동자와의 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다. 1905년 혁명 패배 후 (요제프 필수드스키Jozef Pilsudski가 주도한) 일부는 오른쪽으로 이동했지만, 다른 일부는 폴란드 독립 요구를 중단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훨씬 작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과 연합하기 위해 왼쪽으로 더 이동했다.

* 중앙집권주의와 위계적 조직 형태에 반대하는 타협하지 않는 민주주의자라는 룩셈부르크의 초상화와는 달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은 실제로 제국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정당이었다. 폴란드의 자결권에 대한 완강한 반대에 의문을 제기하는 당원들을 반복적으로 제명하고 이를 지지하는 정당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급진화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민족적 독립을 분명히 지지했던 1918년 폴란드 봉기에서 이러한 종파주의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 우크라이나 마르크스주의가 RSDLP의 단순한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은 독립적인 궤적을 가지고 있었다. 레프 유르케비치Lev Yurkevich와 같은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사회적 해방은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의 동맹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으며, 민족적 요구를 촉진하는 것이 더 광범위한 계급 투쟁을 해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심적 테제들

여기에 열거하기에는 너무 많은 다른 통찰들도 블랑의 프로젝트의 핵심 논지에는 그 가치가 미치지 못한다. 블랑의 핵심 논지는 레닌의 지지자뿐만 아니라 반대자들도 볼셰비키가 191710월에 제2 인터내셔널의 뿌리 깊은 개혁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창당하고 집권했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국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경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제 2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그중에서도 1910년 이전의 칼 카우츠키를 무시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카우츠키의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확산된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 또는 준민주주의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당원을 의회에 선출해 보내고, 지상에서 활동하며, 폭력적인 반란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재적인 러시아 제국의 혁명가들에게는 이러한 선택지가 없었고, 극심한 국가적 탄압으로 인해 합법적인 활동과 불법적인 활동을 결합한 단단히 짜여진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카우츠키의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특수한 조건에 맞게 채택해야 했고, 실제로 채택했다.

블랑은 10월 혁명을 특정 정치적 또는 물질적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가 따라야 할 모델로 삼은 사람들은 독재적 체제와 민주적 체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과제 사이의 이러한 기본적인 차이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레닌이 1917년 혁명 직전에 발표한 국가 '분쇄'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자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기존 형태의 정치적 대의제에 대한 개입자체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이렇게 썼다,

“러시아 제국 전체를 분석해 보면 독재적 체제의 존재가 러시아 지하 사회주의자들의 궤적을 유럽 전역의 사회주의자들과 차별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변경 지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1917년 이후 레닌주의자들이 봉기적 전략과 소비에트 권력을 해외 민주주의 국가에 수출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조명할 수 있다. 동시에 1918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사례는 의회주의적 조건에서 반자본주의적 파열구를 내기 위해서는 국가의 민주적 제도에 대한 노동자 정당의 사전 선출이 필요하다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방향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모든 비합법 마르크스주의 정당과 카우츠키와 같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단순히 정부와 의회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서서 "지배계급의 군사적 조직을 해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해하는 맥락에서 국가 권력을 분쇄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블랑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낡은 (비군사적) 국가 관료제를 즉시 분쇄하라는 요구"를 언급하며 이를 인정한다.

레닌의 소책자는 혁명이 부르주아지의 폭력 독점을 제거해야 한다는 완전히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주장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의 비군사적 측면까지 무너뜨릴 필요성을 강조했다(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와 다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전에 주장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국가기구의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매우 논란이 많았다.

레닌, 레닌주의, 사회민주주의

1917년의 레닌이 국가를 무너뜨린다는 광범위한 개념이 10월 혁명과 이후 수십 년 동안 그 영향을 받은 혁명의 진로를 정의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미일까? 나는 두 가지 관련 이유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첫째, 레닌은 40년 전 칼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뮌의 "비국가주의적 국가 형태""사회의 경제적 변혁을 위한 적절한 정치적 지렛대"로 규정했던 것을 다시 언급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제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공산당 선언에서 그의 입장), 입법권과 행정권의 분리를 무효화하는 분산된 형태의 대중 참여를 통해 국가를 무너뜨리는 것이 과제라고 주장했다

최근의 논의에서 이 점이 종종 간과되지만, 레닌은 자신을 포함해 제2인터내셔널에서 무시되거나 당연시되었던 마르크스 개념으로 돌아간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카우츠키가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술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도한다는 관점이 그들의 정치적 지평을 정의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둘째, 국가를 분쇄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레닌의 마르크스 재해석이나 이후 레닌주의자들과 반레닌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10월 혁명은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이나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따라서 국가를 분쇄하지는 못했다.

레닌이 말년에 인정했듯이, "우리는 짜르체제로부터 [국가 기구를] 이어받아 소비에트의 기름을 살짝 부었다"고 할 수 있다. 블랑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나온 "낡은 (비군사적) 국가 관료제를 즉시 분쇄하라는 요구는 1919년에 이미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객관적 상황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볼셰비키의 주관적 정책 때문인지는 여기서 정리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뿐 아니라 그 이후의 실패가 레닌의 국가 분쇄라는 '극좌'적 관점 때문이 아니라, 그 관점이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많은 사람들은 레닌이 국가를 분쇄하라는 요구를 대의제 민주주의를 없애는 것과 동일시하여, 노동계급이 통제하는 민주 공화국이 사회주의로의 전환에 적합한 형태라는 개념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둘 사이에 반드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룩셈부르크도 "소비에트에게 모든 권력을"을 요구했지만 191710월 혁명 이후 레닌의 민주주의 탄압에 반대했다.

블랑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내에서 필독서가 되었고, 모든 나라에서 의회적 통치를 봉기적 수단에 의한 노동자 평의회로 대체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는 이유로 국가와 혁명이 보여주는 관점을 거부한다. 블랑은 그 결과 레닌을 추종한 서구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정치적 대의제 형태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에서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독재적 체제에 적합한 반의회적 접근 방식이 민주주의 체제에도 적용된다고 가정한 레닌 이후의 레닌주의자들은 결국 대중적 기반을 확보할 기회가 없는 주변적 종파를 만들게 되었다. 자발적인 봉기가 대중을 자신들에게로 끌어들일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지난 세기 동안 급진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관련성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만들어낸 전략적 막다른 골목 안에서 계속 활동해 왔다"는 블랑의 말이 맞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카우츠키의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로의 복귀가 지난 세기의 쓰라린 실패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블랑의 책임 속에서 특수한 사회적 조건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국제적 관련성을 지나치게 일반화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블랑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 즉 핀란드 사회민주당(SDP)에 대한 논의에 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의회 과반수를 확보한 후 혁명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정당의 독특한 사례이다. 핀란드는 1809년 짜르 제국 내에서 자치국가 지위를 획득한 후 독자적인 의회를 갖게 되었다. 1906년에는 세계 최초로 남성과 여성에게 보통 선거권이 도입되었고, 1916년에는 사민당이 47%의 득표율로 의회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그 이후로 핀란드에서 이렇게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은 없었다. 이것은 요행이 아니었다: 핀란드는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도 1인당 사회주의자 수가 많았다. 또한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그루지야, 유대인 분트 등의 변경지대 정당은 1905년 혁명 패배 이후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1905년 이전에 노동자 운동을 자유주의에 종속시켰던 핀란드 정당은 반대로 왼쪽으로 이동했다.

19172월 혁명 이후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집권 엘리트들은 의회를 해산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더욱 왼쪽으로 이동하게 된 사민당은 19181월 혁명적 봉기를 통해 집권했다. 블랑은 "반자본주의로의 전환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으로부터의 단절을 요구하지 않았다: 1918년 핀란드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보편적 참정권, 의회, 공화주의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입장을 이념적으로 고수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몇 달 후 반혁명에 의해 전복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핀란드에서 일어난 사건이 카우츠키의 전략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면 왜 반복되지 않았을까? 블랑은 "이 사례가 거의 반복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1917년 이후 레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부상하면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공화제적 민주주의를 확대하여 혁명적 변혁을 추진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블랑이 1916년에서 1918년 사이의 핀란드 사민당을 오늘날의 모델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포용성이 매우 낮은 의회 체제 하에서 조직되었기 때문에 독일과 핀란드의 급진주의자들이 엄격한 계급적 비타협성을 위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포용성이 높은 의회 체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 제도를 활용해 혁신적인 개혁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이 혁명적 해결책을 채택하려는 경향이 적고,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의회적 타협의 딜레마와 반자본주의적 통치의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타협적인 혁명 정치를 추진하면서 그 과정에서 주변적 종파가 되지 않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임이 입증되었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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