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트랜스젠더 여성 나화린 선수의 용기있는 도전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것을 공개한 나화린 선수는 지난주 강원도민체육대회 사이클 경륜 일반여성 1부 경기에 출전하면서 "나는 논란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남녀로 딱 잘라 정해진 출전 부문에 성소수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내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남녀로 딱 잘라져’ 있다. 이러한 성별 이분법은 ‘인간은 호르몬, 염색체, 생식기 등에 따라서 두 개의 성별로만 나누어져 있다’고 가정한다. 이에 따라서 두 개의 성별만을 기준으로 특징과 규범을 부여한다.
두 개의 성별에 들어맞는 사람만 ‘정상’이 되고, 나머지는 ‘비정상’이 된다. 두 개의 성별 안에서도 다시 위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인종과 계급에 따라서 권력의 차이가 생긴다. 하지만 실제 자연과 동물, 인간 속에는 호르몬, 염색체, 생식기에 따라서 단 두 개의 분류 중에서 어느 하나로 나눠지지 않는 존재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이런 존재들을 우리의 눈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가부장적 계급-인종 질서와 성별이분법을 유지하기 위한 해결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질서의 권력자들이 특히 집착하는 것이 스포츠, 화장실, 목욕탕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성별 이분법을 전제로 만들어진 공간과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주목할수록 젠더 질서에 어긋나는 성소수자들을 ‘일탈자’라고 낙인찍으면서 대부분 허구적인 ‘공포와 위협’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게 할 수 있다. ‘성소수자가 스포츠의 공정한 경쟁을 망가트렸다’, ‘성소수자가 화장실과 목욕탕에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소식들이 끝없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다.
누구나 가지는 다양한 정체성과 개성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어떤 형태의 외부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가’에만 끝없이 집착한다. 반면, 모든 사람이 두 개의 성별로 나누어지는가? 스포츠는 반드시 두 개의 성별로 나누어져 경쟁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한가? 두 개의 성별로 구분될 수 없는 사람들은 화장실과 목욕탕에 갈 권리도 빼앗겨야 하는가? 이러한 성별 이분법 사회는 언제부터 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 질문들은 제기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스포츠 경쟁에서의 공정성은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존재에 대한 부정과 차별, 비가시화가 가장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성소수자는 ‘공포와 위협’이 아니라 거리와 작업장과 교육현장에서 가장 일상적인 차별과 폭력에 직면해 있는 사회적 소수자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따라서 예상대로 수많은 악플에 직면하고 있는 나화린 선수의 이번 시도는 성별 이분법 사회에 대한 의미있고 용기있는 도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생태사회주의자 조너선 닐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모두 나름의 소중한 삶을 살고 있고 그가 누구든 서로 평등한 인간이다.
”트랜스젠더의 이슈는 트랜스젠더의 삶이 소중하기에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른 이유로도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거짓말은 계급 사회의 발명 이후 모든 종류의 불평등에 대한 근본적 주장이었다.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우리 모두에게, 서로의 눈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 동일성은 모든 평등과 연대의 기초이다.“(조나선 닐)
● 북한 우주발사체와 남한 우주발사체에 대한 노골적 이중잣대
오늘 새벽에 벌어진 경계문자 오발령의 한바탕 소동은 결국 수도방위사령부와 행정안전부와 서울시가 서로 손발이 안맞아서 벌어진 난장판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북풍몰이를 하려고 긴급문자를 보냈는데 반응이 안좋으니 집어넣은 것일지도 모르고. 오세훈은 오늘 민주노총의 총파업 집회도 앞두고 종북몰이 사이렌을 울린 것인데, 왜 ‘눈치없이 너무 오바했다’며 욕을 먹는 것인지 억울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사실, 며칠전 북한이 인공위성 우주발사체 계획을 발표할 때부터 보였던 윤석열 정부의 반응을 보면 경보와 대피에 대한 새벽 긴급문자가 전혀 어색하지는 않다. 외교부는 “역내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이고 “어떠한 구실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했고, 윤석열은 “끝내 발사를 강행한다면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와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 기시다 정부는 한술 더떠서 “격추”를 경고하며 요격 미사일 부대를 준비시켰다.
이 모든 호들갑을 보면서 정말이지 이 뻔뻔스러운 이중성에 기가 막혔다.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누리호의 우주발사 때 보여준 반응과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한국 정부와 모든 언론들은 결코 이것을 ‘도발’이라거나 ‘불법’이라고 하지 않았다. 침이 튀기도록 기뻐하고 축하하고 찬양하면서 ‘세계 7위의 우주강국이 됐다’며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날 저녁 뉴스의 절반이 이런 소식들이어서 지겨울 정도였다. 그런 누리호 발사가 몇 달이나 몇 년전도 아니었다. 5일밖에 안됐고 그 때 자랑하고 칭찬하던 이들의 입에서 나온 침이 마르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인가? 북한의 우주발사체는 군사위협용이지만 남한의 우주발사체는 우주탐험용인가? 눈가리고 아웅하면 안 된다.
‘AP통신’은 “누리호 발사는 한국이 군사 정찰 위성을 운용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기술과 지식을 축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두 나라의 발사를 비교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우주 경쟁’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핵무장을 추진하고 있지만, 남한은 아니라고? 남한 독자 핵무장을 계속 주장해 왔고, 한미정상회담 이후에도 ‘포기하지 말자’던 이들이 이번 누리호 발사를 가장 기뻐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은 최첨단 살상무기들을 총동원해 앞으로 한달간 역대 최대 규모의 ‘연합·합동 화력 격멸훈련’을 진행한다. 한미일의 해상군사훈련도 진행 중이고 이 때문에 욱일기를 단 자위대함도 부산항에 들어왔다. 윤정부는 미국핵무기도 우리 것처럼 쓸 수 있다고 ‘느끼고’ 있다. 누리호 발사만이 아니라 이것들은 왜 ‘도발’이 아니고, 북한의 우주발사체만 ‘도발’이라는 것인가? 더구나 남한 우주발사체는 성공했고, 북한 우주발사체는 실패했다.
남한은 군비예산 규모와 무기수출에서 자타공인 세계 6위에 오른 상태다.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런 ‘위선과 이중성’ 때문에 바이든, 윤석열, 기시다가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러시아의 침공과 폭격을 반대하는게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저런 위선자들과 같은 입장으로 보일까봐 찜찜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늘 새벽에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의 요란한 경보음에 잠이 깨면서, 어제 본 뉴스들이 같이 떠올랐다. 국민의힘은 어제 ‘시민단체 선진화 특별위훤회’를 구성해서 앞으로 ‘시민단체의 회계부정과 폭력시위를 뿌리뽑겠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는 어제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면직시키며 방송 장악을 위한 거침없는 폭주의 정점을 찍었다.
경찰은 한동훈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는 핑계로 MBC 뉴스룸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한동훈, 윤석열, 김건희를 비판하거나 감시하는 언론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과 경고다. 또 어제 경찰은 6년만에 다시 캡사이신 분사를 부활시켜서 ‘민주노총의 불법폭력집회에 대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촛불 이후의 성과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와 역사의 진보를 거꾸로 돌리는 소식들이 매일같이 몇 개씩 들려오고 있다. 지금은 잠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경계경보와 대피의 사이렌이 계속 울려퍼져야 하는 상황이 맞다. 우리가 피할 곳은 없고 윤석열 정부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게 유일한 탈출구로 보인다.
● 키신저의 100세 생일을 기념하고 찬양할 일인가
헨리 키신저가 며칠전 100세 생일이었다고 여기저기서 축하하며 그의 ‘업적’과 ‘총명함’을 찬양하는 기사와 글들을 올리고 인터뷰도 싣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저명한 유력 언론들’이 주도적이고 한국에서는 족벌언론들이 앞장서고 있지만 사실 진영을 넘어서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걸 지켜보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여러번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했던 키신저는 미국과 제3세계 친미독재정권들이 저지른 쿠데타, 살인, 폭격, 납치, 대량 학살 등에 관여했고 책임이 있는 장본인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과 폭격,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의 확전과 폭격에서 키신저의 책임은 결정적이다.
당시 그의 ‘움직이는 모든 것을 날려버려라’는 폭격 명령은 악명 높았다. 그는 칠레에서 아엔데 정부를 제거한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를 지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때도 그는 ‘무책임한 국민들이 선택했다고 공산화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며 미국을 정당화했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가 저지른 ‘더러운 전쟁’에서도 미국과 키신저의 후원과 책임은 중요했다. 미국 좌파 언론들은 키신저의 여러 전략적 결정과 직간접적 책임 속에서 제3세계에서 죽어간 사람의 수를 최소 3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것이 ‘날카롭게 국제 정서를 분석하고 대담한 전략 전술적 결정을 내리는 키신저의 탁월함’이 낳은 결과이다.
이 모든 것은 공개된 기록들로 남아있어서 부정하고 덮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키신저가 닉슨의 대중국 화해를 주선했다’고 변호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중국 정책 때문에 닉슨의 베트남 전쟁과 국내적 억압 정책들에 대한 책임이 사라질 수 없듯이 키신저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대중국 화해는 대소련 봉쇄를 위한 전략적 술수였다.
키신저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오직 국익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에 따라 그런 선택들을 했다. 이에 따라서 최근 키신저가 미중 갈등보다는 협력을 강조하는 것은 일단 반갑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것인지,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인지는 의심스럽고 불안하다.
오로지 ‘국익’(이라고 쓰고 해당국가 기득권자들의 특수이익으로 읽는다)만을 따지는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주의는 미국의 선택지에서 언제든 ‘외교와 대화’보다 ‘항공모함과 폭격기’를 등장시켰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요즘 이러한 키신저의 정신을 가장 잘 따르고 있는 정치인과 정부는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푸틴 정부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폭격은 러시아의 ‘국익’과 국가안보를 모든 것에 우선하는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해 온 ‘국제 저명 언론’들과 한국에서 지금 친미적 입장 때문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비난하는 족벌언론들이 한편에서 키신저를 추켜세우는 것은 참 우스꽝스럽다.
미국의 ‘국익’을 위한 전쟁과 폭격을 기획했던 키신저를 찬양하고 100세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러시아의 ‘국익’을 위한 침공과 폭격을 기획한 러시아의 국가안보 전략가를 찬양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머리 속에서 강대국의 침공과 폭격 속에서 죽어가는 약소국 민중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 점에서, 미국의 전쟁과 폭격을 주도하던 키신저를 비난하던 일부 ‘친러 좌파’ 지식인들이 지금은 러시아의 전쟁과 폭격을 옹호하며 키신저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언제부터 ‘베트남 전쟁의 전범’이 ‘귀 담아 들을만한 똑똑한 전략가’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1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100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냉소적 격언은 바로 키신저같은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다. 푸틴이 전범이듯이 키신저도 전범이다. 키신저의 100세를 맞이해 필요한 것은 축하와 찬양이 아니라 반성과 참회에 대한 요구이다.
● 프랑스 연금 개악을 돌아보며 – 대중 투쟁과 제도정치의 관계
지난 반년 넘게 진행돼 온 프랑스 민중의 거대한 연금개악 반대 투쟁이 결국은 연금 개악을 막아내지는 못하고 소강 상태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대중 투쟁과 제도정치의 관계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프랑스의 경험은 대중의 직접 행동과 참여가 우선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제도정치가 가지는 중요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프랑스 시민의 대다수가 연금 개악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주요 노동조합 연맹들이 다같이 힘을 모아서 강력한 파업과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무려 300만 명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총파업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악은 현재 입법과 의회 절차를 거쳐서 통과되고 시행될 상황이다.
마크롱 정부는 야당이 복잡하게 분열돼 있고 좌파의 힘이 부족한 의회 내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서 표결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예외조항이나 정부 불신임안과 법안을 연결시키는 방법 등을 이용해 개악을 성공시켰다. 또 거대한 집회와 시위에 경찰력 강화와 폭력적 진압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거대한 투쟁이 낳은 아쉬운 결과에 대한 좌절감 속에서 인종주의적 극우인 르펜의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도 나타났다. 국민전선은 ‘비프랑스인에 대한 복지 지출을 줄여서 연금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선동을 하며 지지를 넓히고 있다. 제도정치에서의 난점이 대중 투쟁의 성과와 전진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노조 지도부가 하루 총파업을 반복하는 것이 문제였고 무기한 총파업을 했으면 승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큰 의미가 없는 평가다. 정작 왜 하루 총파업이 아니라 무기한 총파업이 가능할 정도로 대중의 결의와 자신감이 높지 않았는지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동력이 충분했다면 무기한 총파업이 아니라 바로 마크롱 정부를 전복하는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하루 총파업조차 공공부문을 넘어서 민간 부분은 거의 참가하지 않았고 동력이 줄어들어갔다는 것에 있다. 그러면, 다시 ‘혁명정당이 있었다면 승리했을 것’이라는 언제 어디서나 등장하는 ‘정답’을 들고 나온다.
이런 ‘정답’은 언제나 복잡한 고민을 하지 않도록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고립된 소규모 좌파들에게 ‘우리가 이토록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엄청난 자기위안을 주지만, 실제 투쟁의 전진에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여소야대 속에서도 야당들은 윤석열 정부의 폭주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고, 다가오는 총선에서 진보정치가 연대하며 성과를 낼 가능성은 잘 보이지 않고, 민주노총 총파업은 다가오는 상황에서 우리의 고민도 깊어진다.
● 죽어간 건설노동자의 마지막 유서가 보여주는 것
어제 저녁 MBC 뉴스데스크가 또다시 윤석열 ‘정치검찰-족벌언론 연합 정권’의 시대에 진정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조선일보의 ‘유서대필 조작’ 시도를 엄밀한 팩트체크를 통해서 무너트린 것이다. MBC에게 필적감정을 의뢰받고서 건설노동자 고 양회동 열사의 유서들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모두 동일인이 작성했다는 것을 확인해 줬다.
그런데 어제 MBC 뉴스에서 더 놀랍고 가슴아팠던 것은 고인이 남긴 유서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YTN 기자, 즉 언론을 향해 남긴 유서였다. 이 유서에서 고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 탄압이 저 하나의 목숨으로 그만 중단하였으면 합니다... 정당한 노조 활동을 한 것뿐인데 구속영장 청구까지 하고 더는 탄압을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건설노동자는 80년대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는 죽지 않고 일하고 힘든 일하면서 천대받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현장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제발 노조 탄압 중단시켜 주세요. 그리고 죄 없이 구속된 동지들 풀어주세요.”
건설노동자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절절한 이 유서에서 고인은 민주노총과 사랑하는 동지들에 대한 정권의 탄압을 막아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건폭’ 마녀사냥에서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4개 야당만이 아니라 언론을 향한 유서를 따로 남긴 것이다.
언론이 쏟아내는 ‘건폭’, ‘공갈’ 등의 날선 단어들은 고인의 가슴에 비수로 박혔고 싸늘해지는 사회와 주변의 시선은 고인의 목을 졸랐다. 몸에 불을 붙이기 직전에 말리던 동료에게 고인이 했던 말도 “애들이 알까 봐 무섭습니다”였다. 따라서 이 마지막 유서를 보고 건폭 공세에 동참했던 모든 언론과 기자들은 고인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한다.
다시는 족벌언론과 정치검찰의 일방적 주장을 받아쓰면서 다같이 돌을 던지며 누군가를 마녀사냥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윤석열 시대에 정치검찰-족벌언론의 ‘연쇄 살인’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어제 MBC 뉴스에서 경찰이 고인에게 어떤 몹쓸짓을 했는지가 또 드러났다.
경찰은 이미 고인의 유서들을 즉각 유족에게 전달하지 않아서 비판받았는데, 어제 공개된 마지막 유서도 왜 한달 가까이 지나서야 공개된 것인지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고인이 죽어간 현장을 바로 흙을 뿌려서 깨끗하게 정리해버린 문제다. 유서를 뒤늦게 전달한 것도, 현장을 바로 정리한 것도 그 의도는 뻔하다.
이 비극적 죽음이 낳을 정치적 효과와 책임을 덮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분신 현장의 흙덩이 밑에서 MBC 기자가 한달 만에 찾아낸 것은 잿더미 아래 녹아 눌어붙은 명찰이었다. 거기에는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양회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윤석열 정부에서 고인처럼 돈없고 힘없고 노동자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즘 윤석열을 지지하는 극우유튜버들은 고인에 대해서 ‘혼자서 신나 끼얹은 아저씨’, ‘북한 지령받고 검찰 기소하니까 분신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는 방송을 하고 있다. 건설노조 집회현장에서도 경찰의 협조를 받으며 그런 방송을 하고 있다.
누구도 이런 혐오와 막말을 막지 않고 있고, 윤석열과 윤희근과 한동훈은 거꾸로 민주노총과 건설노조의 ‘불법집회’를 원천봉쇄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제 나온 지표들에 따르면 윤석열 집권 이후 지난 4년간 줄어들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는 다시 벌어지고 있다. 줄어들던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도 9년만에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사라졌고, 거꾸로 기간제 고용이 799% 증가했다.
그리고 어제 윤석열은 기업경영인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나온 77%의 지지율에 기뻐하며 ‘이것이 진정한 지지율’이라고 했다. 그가 정말 신경쓰고 대변하려는 것이 누구의 여론과 이익인지는 분명하다. 어제도 또 검찰은 ‘간첩’이라며 전교조를 압수수색했다. 언제까지 이런 정권을 지켜봐야 하는가, 언제까지 정치검찰-족벌언론에 놀아날 것인가, 언제까지 ‘나하고는 노선이 다르고 원래 맘에 안들었다’면서 각개격파 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것인가.
● 러시아가 바흐무트를 ‘해방’했다는 말은 제발 듣고 싶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말할 때마다 먼저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러시아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지금 하고 있는 일 – 약소국을 침략하고 폭격하고 학살하는 – 은 모두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에서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제3세계에서 러시아의 악선전이 먹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 지역의 민중들이 그동안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에게 하도 많이 당하고 속아온 결과이기 쉽다. 그 점에서 젤렌스키 정부가 미국 등 서방 정부들의 지원에 기대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일이지만, 그것이 낳는 역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럴수록 제3세계 민중은 이 전쟁에서 러시아를 반대하는 것이 혹시 우리를 짓밟아 온 미국 제국주의를 도와주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좌파들은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에 반대하면서 ‘현실주의’라는 이유로 그것을 미국에 대한 지지와 혼동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윤석열은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의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침략, 폭격, 학살에 반대하는 것이고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과 저항할 권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어제 바흐무트에서 1년 가까이 이어진 전투 끝에 러시아가 마침내 이 지역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대한 일부 좌파들의 반응을 보고 정말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가 바흐무트를 해방했다’며 이 소식을 전하고 러시아 관영언론의 기사를 번역해서 소개하는 태도에서는 이것을 기뻐하는 감정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해서 저항하는 그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거기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고 점령한 것은 결코 '해방'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식이면 일본도 조선을 ‘해방’한 것이고 미국도 이라크를 '해방'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 1년간 바흐무트는 ‘고기분쇄기’라고 불렸다.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서 자신의 고향을 지키려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고기처럼 분쇄돼 죽어갔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환영하고 기뻐할 수 있는 요소가 도대체 무엇 하나라도 있는가.
부디 이 일부 좌파분들이 강대국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주변부 민중의 저항을 지지하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길 기대한다. 세계체제의 중심에서 주요 강대국들의 힘의 관계와 서열이 어떻게 정리될 것인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세계체제 주변부 민중의 저항과 연대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그것이 전세계적 저항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 아동 해외입양과 시설수용으로 돈을 벌던 한국사회
독재시절에 한국사회는 아동들을 해외입양과 국내시설로 사고파는 돈벌이로 삼았다. 이것은 삶과 생명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데 핵심이고 가장 큰 수익 사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노골적이고 중요한 사례이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트렸고 아래 조민호 동지의 사연도 마찬가지이다.
오랫동안 알아온 조민호 동지에게 이런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알아볼수록 얼마나 힘들게 버텨온 것인지, 그러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투쟁에 함께하고 연대해 온 것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나마 지난 몇 년간 해외입양됐던 사람들의 사연과 문제들은 어느 정도 알려지고 해결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지만, 국내시설에서 하나도 다를바 없는 고통과 피해를 겪은 사람들의 문제는 아직 형제복지원같은 대표적 사례들을 제외하면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문제를 풀어가려면 언론과 방송의 더 적극적인 보도와 정부와 국가기관 차원의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위는 극우음모론자를 위원장으로 올려놓고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예산과 인력을 축소하고 있다. 주요 언론은 윤석열을 감싸거나, 야당과 시민단체들을 공격하기에만 바쁘다.
검찰과 경찰은 이런 어두운 과거사의 책임자들을 수사하고 처벌하며 진실을 밝히는데는 아무 관심도 없고 한동훈을 위해서만 매일같이 압수수색을 하며 인력과 자원을 그런 곳에 집중하고 있다. 힘들게 진실과 뿌리를 찾고있는 조민호 동지에게 보탬이 되길 바라며 기사라도 공유해 본다.
“집에는 마당이 있었고 마당에는 큰 개가 있었다. 또 어릴 때 왼쪽 손이 찢어져 수술을 했던 기억도 있다. 수술로 생긴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어머니와 강원도 춘천시 육림고개에 있던 재래시장에 갔다가 어머니 손을 놓치는 바람에 길을 잃었던 기억이 있다""시장을 헤매다가 어떻게 오순절보육원에 맡겨지게 됐고 거기서 자랐다"
"성장한 이후 가족을 찾기 위해 오순절보육원을 다시 찾았지만 화재로 자료들이 소실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고아원은 당시 수용소 개념이었다. 강제노동도 시키고 해서 사는 게 지옥이었다" "결국 17살때 고아원을 탈출했다"
"가족을 찾기 위해 30년을 넘게 노력했다" "최근 마지막으로 찾아보자는 생각에 유전자 등록도 한 상태“
https://n.news.naver.com/article/014/0005019139
(기사 등록 20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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