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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러시아 혁명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어야 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2. 11.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두견 

 

근래 서구 좌파진영에서는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흥미롭고도 중요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레닌주의’적 사회변혁 전략의 타당성 등도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글들을 계속 번역, 소개해 왔는데 이번 글도 그것의 연장이다.

 

이 글은, 사회주의자들이 세대를 거쳐 러시아 혁명의 영감을 얻어왔지만, 그로부터 얻어진 많은 교훈은 우리 자신의 시대에 맞지 않고, 오늘날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SA) 소속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며, 역사사회학자로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논문과 저작,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21/07/democratic-socialism-russian-revolution-leninism-workers-movements

 

 

급진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정치적 그늘 아래 100년 이상 살아왔다. 1917년의 사례에서 영감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그들이 볼셰비키의 핵심 정치적 교훈이라고 끌어낸 것을 배우고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수백만 명의 활동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모든 것을 바쳤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이익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레닌주의 정당들은 발전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스스로 혁명을 만드는데 한 번도 접근한 적이 없다. 볼셰비키의 고무적인 모범의 비극은 그들이 스탈린주의의 공포에 너무 빨리 굴복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적 맥락에 맞지 않는 혁명적 접근을 과도하게 예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17년에 절정에 달한 혁명 운동은 자본주의는 영원하지 않고, 뒤집힐 수 있다는 중요하고 지속적인 교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재 정권 하에서 조직하는 것과 오늘날의 복지국가들 사이에는 극적인 차이가 있지만, 러시아의 대중적 노동자 운동에 뿌리내린 사회주의자들의 고무적이고, 놀랄 만큼 성공적인 노력에서 배울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내가 나의 새 책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러시아 제국의 노동계급 정치>(1882~1917)에서 보여줬듯이 이 역사의 관련성은 러시아 중부뿐만 아니라 짜르체제 하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인정한 국가였던 핀란드를 포함한 제국 전체를 분석할 때 특히 뚜렷해진다. 러시아 제국 전체의 경험에서 얻은 큰 전략적 시사점은 의회제 국가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에 이르는 유일한 그럴듯한 길은 급진적 형태의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볼셰비키 예외주의

 

"레닌주의"로 알려지게 된 것은 볼셰비키 예외주의의 신화에 기초했다.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그 이후 세대의 스탈린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추진된 이 사상 학파는 볼셰비키가 1917년까지 ‘의회 중심의 개혁주의적 지향으로 인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사민당의 악명 높은 지지를 만들어내고, 그 여파로 일어난 사회주의적 변혁에 반대하도록 이끈 칼 카우츠키(제2 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자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주요 이론가)의 얼룩진 말뿐인 사회주의’로부터 독특하게 단절했다고 주장한다.

 

볼셰비키와 독일 사회민주당 사이의 결별은 레닌이 "카우츠키주의"에서 전략적으로 단절한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문헌이 거의 독점적으로 제국 중심부의 혁명가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비러시아 변경지대 사회주의자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러시아인이 인구의 42%만을 차지하는 제국에서 조직화된 마르크스주의자의 75% 이상을 대표했다.

 

러시아 제국의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을 간단히만 살펴봐도 볼셰비키만이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 극적으로 다른 흐름을 보였다는 주장은 무너져 내린다. 독재적인 러시아의 모든 지하 정당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다르게 운영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짜르의 탄압으로 인해 모든 사회주의 정당이 서구에서와는 극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게 됐다.

 

러시아 급진주의자들은 카우츠키의 전략에 열광적으로 동의했고, 독재적 조건이 예외적으로 전투적인 노동자 운동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잘못된 것은 의회주의 정치의 개방과 걸림돌이 조직적 관료화와 결합되어 노동자와 사회주의 지도자 모두를 적어도 1910년부터는 카우츠키가 명시한 방향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핵심에는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는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선두에 서서, 자본주의와의 혁명적 단절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향해서 민주주의 투쟁과 계급투쟁을 전진시키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미래의 레닌주의자와 달리 카우츠키는 이 경로의 어느 시점에서 의회에서 사회주의자가 다수 선출돼야 하며 이 기구가 노동자 통치의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직적 질문에 대해 그는 좌파가 노동자 정당을 끈기 있게 설득하여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이행하도록 염원해야 하지만, 다수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한 온건한 사회주의자를 축출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다. ‘볼셰비키 예외주의자’들은 이것이 정확히 러시아 제국의 급진주의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전략적 비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민주적 집중주의’의 신화

 

‘레닌주의자’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 사민당과 전 세계적으로 그들의 추종자들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와 규율을 희석시킨 광범위한 정당을 옹호했지만, 볼셰비키는 1903년(또는 누구의 말에 따르면 1912년) 이후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건설했다. "기회주의자"(자유주의자들, 기업주들과 함께 계급-협조주의 블록을 지향하는 온건파)나 그다지 혁명적이지 않은 "중도주의자"가 아닌 노동계급의 가장 헌신적이고 전투적인 구성원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민주적 집중주의"의 숙고된 규율있는 방법을 구현한 단단하게 짜여진 조직 말이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선, 볼셰비키나 제국의 일반적인 지하의 사회주의자들이 특별히 조직적으로 규율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짜르 통치 하에서, 나중에 "민주적 집중주의"라고 불리게 된 것을 확실히 실행하지 않았는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1920년 회원 조건은 "당은 가능한 한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되고, 군사적 규율에 준한 철의 규율이 충만하고, 당중앙이 지휘하는 권위있는 기구이어야 그 임무를 다할 수 있다"는 이해로 이것을 정의했다.

 

독재 상황이라는 맥락은 사실 제국의 정당들을 외국의 그 자매 정당들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고 실질적으로 [중앙집권이 아니라] 지방분권화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정당 위원회들은 지속적으로 체포되고 해체되어 견고한 조직이나 일관되고 안정된 관료체계가 결속될 틈이 없었다. 비밀경찰을 피하기 위해 사회주의 정당 지도부는 대체로 망명생활을 해야 했고, 지역위원회 스스로 주도권을 쥐도록 강제함으로써 정당들이 대부분 불가피하게 아래로부터 의견이 위로 전달되는 방식으로 조직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망명 중인 혁명가들은 종종 사회주의자들이 고국에서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정당의 지역 간부는 자주 해외의 공식 정당 지도부와 충돌하거나 단순히 그들을 무시했다. 파리에서 통과된 결의안이나 제네바에서 작성된 기사가 반드시 러시아 제국의 현장에서 실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서의 대부분의 사회주의적 활동은 특정 마르크스주의 경향과 관련이 없는 평조합원 또는 도시 전체 위원회를 통해 작업장 투사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역사가 마이클 멜란콘Michael Melancon이 1917년까지에 대해 언급했듯이 “다양한 그룹 사이 경계선의 유동성은 러시아 정당이 아직 높은 수준의 규정력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정당이라기보다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움직이는 운동이었다.” 이렇듯, 볼셰비키를 포함한 짜르 제국의 거의 모든 지하 마르크스주의 경향들은 사실상 20세기의 모든 레닌주의 조직을 뛰어넘는 수준의 지역적 자치, 정치적 다원성, 열린 정치적 논쟁의 기능을 수행했다.

 

'새로운 유형의 당'은 없었다

 

러시아 제국 전역의 사건들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성공 비결이 “진정한” 혁명가들에게만 개방된 “새로운 유형의 정당”의 형성 덕분이라는 전통적인 레닌주의적 주장을 반박한다. 제국의 가장 유능한 급진주의자들은 “더 적을수록 더 낫다”는 격언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폭넓은 노동자 정당을 선의로 건설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성공은 그들이 카우츠키가 구상한 노선에 따라 SDP(핀란드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일했고 SDP를 변형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1899년에 설립되었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온건한 사회주의 정당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의 정당은 러시아의 첫 번째 혁명이 핀란드 노동자를 급진화시키고, 1906년에 젊은 "카우츠키주의자" 그룹이 SDP의 지도력을 장악할 공간을 만들어주면서 1905년 이후 계속 좌경화했다.

 

그때부터 핀란드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유당과의 블록 만들기를 중단하고 사회주의의 혁명적 최종 목표를 확인하도록 당을 압박했다. 그러나 1905년의 혁명적 흥분이 식은 후에도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노동운동과 SDP 내에서 큰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과 서구와 마찬가지로 핀란드 정당 내부의 온건한 사회주의의 힘은 "잘못된" 정당 모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강력한 조직과 선거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증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의회적 맥락에서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 온건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카우츠키가 말했듯이 노동자들이 문자 그대로 “사슬 외에는 잃을 것이 없는 상태에 있던” 지하 러시아와는 달랐던 것이다.

 

1906년 이후, 핀란드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당 통합이라는 목적을 위해 급진주의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 극단적 파벌주의나 SDP 내부의 성마른 조직 분열은 급진파를 주변화시키고, 대부분의 노동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회주의 운동의 전진을 마비시켰을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 순수성을 고수하는 것이 낳을 비용적 손실은 실질적인 정치적 효과의 이점보다 더 컸다.

 

핀란드 노동자들을 집권시키기 위해서는 통합당이 필요하다는 이러한 믿음은 결국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핀란드의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1918년 혁명을 (어느 정도 마지못해) 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온건한 사회주의 지도자 안톤 후오타리Anton Huotari가 이어진 내전의 몇 주에 걸쳐 큰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통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후오타리는 자신과 그의 아내(또한 사회주의 운동가)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녀에게 당부하면서 두 사람이 권력 장악을 지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현재의 무장투쟁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국가 권력을 위한 투쟁을 결의한 이후에는 우리의 모든 활동력을 운동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한 의무에 따라 성장했다.”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유사한 조직적 역학 관계가 일반적이었다. 억압적인 독재의 조건으로 인해 급진적 세력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얻고 공고히 하기가 훨씬 더 쉬워졌다. 예를 들어, 강력한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짜르 전복 직전까지 제국에서 가장 큰 지하 마르크스주의 경향)은 현명하게도 1914년부터 소수파인 멘셰비키를 축출하라는 레닌의 요청을 거부했다.

 

급진적 지도력 하에 당의 단결을 유지함으로써, 당은 라트비아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고, 1917년 후반에 전체 인구의 압도적인 지지로 권력을 장악했다. 핀란드에서처럼 라트비아에서 집권한 정당에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1918년 5월에야 라트비아 멘셰비키와 마지막 조직 분열이 이루어졌다. 10월과 이어진 내전에서 그들의 중심적 역할로,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산파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또한 그들의 존재의 대부분을 폭넓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느슨한 경향으로 기능했으며, 자유주의와 블록을 옹호하는 비파벌적 사회주의자 및 멘셰비키와 함께 조직했다. 1917년 5월 멘셰비키가 자유주의 세력이 이끄는 임시 정부에 합류한 후 온건파와 완전한 조직적 분열이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 전역을 가로지르는 규범이 되었다.

 

한 역사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1917년 말에 볼셰비키가 이끄는 정당은 "대중적 신화에 나타난 철저하게 배타적인 분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내각을 뒤엎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전쟁을 끝낸다는 긴급한 필요에 동의한 급진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위한 포괄적 정당"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커다란 교훈은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적 규율이나 기회주의에서 벗어난 정당의 필요성이 아니었다. 폴란드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극도로 폭을 좁힌 정당의 교착 상태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더 큰 조직적, 정치적 응집력이 항상 더 큰 효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급진파의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더 넓은 노동자당을 가장 잘 건설하는 그 내부의 유기적 경향에 달려 있었다. 제국의 혁명가들이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투사들과 자신들 사이에 조직적으로 지나치게 벽을 세웠다면 불가능한 실천이었을 것이다.

 

다양한 경향의 "빅텐트"라는 정치적 기구를 통해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진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다양한 정치적 타협과 전략적 딜레마와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노동계급에 그들의 과업을 고박시키기 위해 필요한 절충이었다. 유감이게도 온건한 사회주의자와 급진적 사회주의자 사이의 세력 관계를 바꾸는 기묘한 조직적 속임수같은 것은 없었다.

 

독재적 러시아에서 국가와 혁명

 

스탈린주의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 모두가 항상 동의해 온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1917년 4월에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 관한 새로운 이론으로 볼셰비키를 “재무장”함으로써 10월 혁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이를 상향식 노동자 평의회 정부로 교체해야 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이러한 "이중 권력" 전략은 민주적 의회의 존재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에 관련이 있었고 여전히 관련이 있다.

 

이 해석의 기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사실이 틀렸다는 것이다. 레닌은 1917년 4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투쟁하려고 당을 "재무장"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1905년 이후부터 제국 전역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대중의 사회적 요구를 관철하고 국제적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해 소비에트와 같은 민중적 기구에 기반한 노동자 농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지향해 왔다. 이것은 1917년 10월까지 볼셰비키와 비러시아 동맹 정당들의 방향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 레닌은 1917년 초에 국가 전략을 재고하기 시작했지만, 당 전체를 볼 때는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자신들의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며 나머지 세계의 모범이라고 선언한 10월이 되어서야 전략적 단절이 발생했다. 역사가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의 놀랄만한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1918년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모델을 국제적으로 더 잘 수출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바꾸기 시작했다.

 

레닌의 새로운 이론이 1917년에 볼셰비키와 그 동맹자들인 비러시아 급진주의자들의 실천을 바꾸었다 하더라도, 러시아의 경험이 기존의 의회제 국가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평의회(즉, 소비에트) 통치로 대체하는 것을 전제로 한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 모델의 세계적 실행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부당한 도약일 것이다.

 

서유럽과 달리 1917년 러시아에는 무너뜨릴 의회도 자본주의 국가도 없었다. 2월 혁명의 봉기는 독재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선출되지 않았고 법적 근거가 없는 임시 정부와 새로 창설된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에 의해 위태롭게 채워진 정치적 공백을 남겼다. 대중은 당연히 후자의 권위를 전자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고 대표성 있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1917년 2월 전후에 러시아의 정치 영역은 노동자들이 급진적 사회 변혁을 촉진하기 위해 기존 의회를 폐기하기보다는, 그것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압도적이던 중부 및 서유럽의 의회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카우츠키, 국가, 그리고 핀란드 혁명

 

러시아 전역에 걸쳐서 카우츠키, 룩셈부르크, 레닌, 변경지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유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전략은 의회적 맥락에서의 사회주의 전략과 독재적 맥락에서의 사회주의 전략을 분명히 구분했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짜르체제 아래 러시아의 무장 봉기에 대한 지향은 지지했지만, 다수의 노동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기존의 민주적 경로를 사용하려고 하는 의회 체제에서의 봉기 전략의 적합성은 거부했다.

 

레닌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진 일반적인 허수아비 때리기 주장과는 달리, 이 접근법은 순전히 "사회주의로 가는 선거의 길"을 구상하지도 않았고 비의회적 경로의 대중 조직화의 중요성을 경시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선거 활동이 주로 국가 외부에서 계급의식과 노동자 조직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2015년 버니 샌더스가 바람을 일으킨 이후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부흥으로 충분히 입증된 동역학이다.

 

그러나 버니와는 매우 달리(전 세계의 1917년 이후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사회주의적 최종 목표를 촉진하는 데 대한 카우츠키의 완고한 초점은 그가 일반적으로 의회적 절충을 거부하고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 혁명 기간 동안에만 대통령직같은 행정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의미했다.

 

기존 국가를 민주화하려는 일관된 지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의회 다수를 확보하는 것이, 그 순간이 왔을 때 혁명적 단절을 이끌 충분한 권력, 대중적 정당성, 제도적 힘을 생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카우츠키는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가계급은 불가피하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회주의적 변혁을 저지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한 유권자의 권한 위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대중 행동과 필요한 경우 무장한 자기 방어가 요구될 것이다.

 

이 전략의 실행 가능성은 핀란드에서 잘 보여졌다. 1905년 이후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향해 인내심을 갖고 조직화하고 의회 활동을 통해 밀도높은 노동계급 권력을 구축하려는 카우츠키의 "시험되고 검증된" 접근 방식을 구현하려고 했다. 반면에, 러시아의 지하 사회주의자들은 독재적 조건이 강력한 노조 건설과 건설적인 의회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파괴적인 파업들에 훨씬 더 집중했다.

 

1907년까지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핀란드당에 가입하여 인구 1인당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조직이 되었다. 그리고 1916년 7월,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모든 국가들 중에서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됨으로써 역사를 만들었다. 1917년의 사건들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예견한 혁명적 시나리오와 매우 밀접하게 발전했다. 1917년 2월 짜르 체제가 전복된 후, 핀란드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의회와 대중의 선거적 위임 권한을 활용하여 경찰의 해산과 노동자 주도의 인민민병대 창설을 포함한 일련의 급진적 민주적 및 사회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핀란드와 러시아의 지배 엘리트는 7월에 핀란드 의회를 독단적으로 해산했고, 이것은 1918년 1월에 사회주의자가 주도하는 권력 장악을 위한 방어적 무대를 마련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다수 의회를 회복하고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핀란드 학자 리스토 알라푸로Risto Alapuro의 말을 인용하자면, “투표함은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혁명가들의 관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핀란드의 경우 투표함은 그들의 요람으로 밝혀졌다.” 카우츠키가 추구한 진정한 공화적 민주주의에 충실하게, 새로운 붉은 정부의 헌법 초안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핀란드의 경험은 의회적 조건 아래에서 반자본주의적 균열이 국가의 민주적 제도를 통해서 노동자 정당이 미리 선출되는 것을 필요로 할 수 있다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방향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카우츠키의 전쟁 전 독일이나 핀란드에 대한 비타협적 전술을 오늘날까지 과도하게 일반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나라들은 불안정한 정치적 및 노동조합적 자유를 가진 "저포용적" 입헌군주국, 지역적으로 제한된 참정권, 선출되지 않고 책임성이 없는 행정부, 뿐만 아니라 부분적 권한만 가진 의회 등을 가지고 있었다. 효과적인 사회주의 정치는 독재 정치냐, 저포용적 의회 체제냐, 또는 변혁적 입법 개혁과 강력한 노동조합주의를 위한 훨씬 더 큰 공간이 있는 민주적 복지 국가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해외에서 이중권력의 기획

 

핀란드 경험의 교훈을 무시하고, 1917년 이후의 새로운 볼셰비키 지도부는 사회주의를 수립하려면 보편적 참정권를 통해 선출된 의회 제도를 부정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결별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1920년 "공산당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는 모든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 의회 제도가 공화정이든 입헌 군주국이든 상관없다"고 선언했다.

 

짜르 정권의 두마(1905년 이후에 설립된 불법적인 가짜 의회)에 대한 볼셰비키의 전술이 나머지 세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테제는 "새로운 [공산주의적] 의회주의가 의회주의의 절멸을 위한 도구로 등장한다"고 결론지었다. 의회는 여전히 급진적 선동을 위한 유용한 플랫폼이 될 것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개혁을 위한 투쟁, 노동계급의 지위 개선을 위한 경기장이 될 수는 없다."

 

최근 일부 레닌주의 저술가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봉기주의적"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지만, 테제는 의회 체제를 모든 곳에서 노동자 평의회로 교체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를 위한 즉각적인 정치적, 기술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트로츠키는 봉기가 모든 이중권력 전략에서 필요한 단계라고 계속 확언했다. 왜냐하면 낡은 국가는 자발적으로 노동자 평의회로 가는 길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일부 사람들이 제안한 것처럼 그것이 "폭력의 물신화"나 소수파적 "폭동주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요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것은 실제 의회 제도의 대중적 정당성과 모순적 성격을 극적으로 과소평가함으로써 급진주의자들을 주변화시키고 반자본주의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날 좌파의 논쟁은 의회를 사회주의자들이 친노동자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경기장이 아니라 기껏해야 오직 사회주의적 선동을 위한 플랫폼으로 취급하는 이러한 경향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볼셰비키에서 영감을 받는 사회주의자들은 선거 분야에서 작업보다 시위와 “기반 구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선거 활동이 전략적으로 동등하게 중요하며 상호 강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제로 입증했다.

 

장기적 전략과 관련하여 레닌주의자들은 왜 사회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의회 조직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고 권한을 행사해서 자본가와 선출되지 않은 경찰, 군대, 관료적 국가기구들 모두에 맞서며 혁명적 변화를 촉진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일관된 주장을 하지 못했다. 그러한 프로젝트가 직면한 실제적인 장애물과 집권한 좌파의 수많은 굴복을 지적하는 것이 그것에 대한 실행 가능한 전략적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국가와 혁명의 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의 전략적 혁신은 1918~21년 혁명의 물결 동안 급진파를 고립시켰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의회를 이용하여 사회주의적 변혁을 추진하려고 하는 순간,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시도에 대해 논쟁하고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했다. 이런 접근법의 아이러니는 의회적 통치를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및 그 너머에서 자본주의의 버팀목이 된 온건한 사민당의 헤게모니에만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성공적인 봉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학자 카르멘 시리안니Carmen Sirianni가 설명하듯이, 그러한 국가에서는 혁명의 강도가 최고조에 달할 때조차 소수의 노동자들이 명목상 이중권력 전략을 지지하는 것 이상을 한 적이 없다. 이러한 냉엄한 패배가 일깨운 결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1922년 제4차 대회는 기존 국가에서 "노동자 정부"를 선출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소 모호하게 예측했다. 레닌주의자들에 의한 그러한 정부의 옹호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의 중대한 후퇴를 의미하며, 이는 많은 레닌주의 경향이 이 접근법의 문자와 정신 모두를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의회적 맥락에 대한 실용적 적응을 더 발달시켰다. 예를 들어, 카우츠키의 전망과 미국 트로츠키주의 지도자인 제임스 캐넌의 보통 투표권에 의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방어하는 표현들 사이에는 거의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캐넌은 이런 투표에 의한 이행의 경우에] 자본가들이 예상된 바대로 인민 총의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에만 무력에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대의 "좌파 유로코뮤니스트"에서 오늘날 스페인의 반자본주의자들과 같은 경향에 이르기까지 레닌주의 전통에서 나온 가장 열린 사고를 가진 사상가와 조직들이 이러한 "노동자 정부"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에서 멀어져 왔기에, 무엇이 그들을 레닌주의자로 만드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코민테른의 1922년 방향 변경 자체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부분적인 전환일 뿐이었다. 비록 지금은 의회에 사회주의자 다수를 선출하는 것이 잠재적으로 혁명을 향한 한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평의회만이 노동자 통치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언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세력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상실한 “자유주의적 의회 제도를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1917년 이후의 경험에 따르면 평의회, 파업 위원회, 주민회의와 같은 "상향식" 참여 민주주의 제도가 좌파 주도 의회의 필수 보완물이 될 수 있지만 대체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레닌주의자들은 - 선출되지 않은 정부 기관을 의회에 종속시키고, 미국 대법원과 같은 반민주적 구조를 제거하고, 공무원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방향 주도를 통해 - 기존 국가를 변형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폭로하는 데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가 민주화 프로젝트는 초기 사회주의 전략에서 가졌던 중심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세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중 단연코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미국에서 특히 중요한 한계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선출된 행정부, 실질적 권한을 가진 의회, 진정한 시민적 자유, 그리고 노동계급이 정치에 편입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정치학자 콘스탄틴 뵈싱Konstantin Vössing이 미국을 “최고로 포용적”인 국가로 분류하는 이유이다.

 

반면에 반민주적 제도와 법은 1930년대 뉴딜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불가피하며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결 통치와 친노동 개혁의 승리에 주요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이중권력 전략과 관련이 없다. 노동자들은 국가 전체를 전복할 만큼 충분히 강해지기 훨씬 전에 미국 정치체제를 민주화할 만큼 충분히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이 자본주의를 위한 "최고의 껍데기"라는 레닌의 주장은 의회 민주주의가 대부분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를 위해 획득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트럼프주의와 2021년 1월 6일의 사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기존의 다수결 기반 민주주의 제도를 (확장보다는) 제거하려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익 프로젝트이다.

 

타당한 도박을 만들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제안된 모든 사회주의 전략이 동등하게 만들어졌다거나 오늘날 그것들의 상대적 장점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변혁을 위한 명확한 로드맵을 제공할 수 있는 성공적 사회주의적 전환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모든 좌파 전략은 주로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조직을 효과적으로 확장하는 정도에 따라 판단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자본주의적 지배가 없는 사회주의 세계의 목표를 주시하면서 효과가 있는 것을 찾아 최대한 멀리 나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볼셰비키에 영감을 받은 융통성 없는 전략이 미래의 혁명적 봉기에 대한 특정한 비전이라는 명목으로 오늘날 명백하게 성공적인 권력 구축 노력 - 그것이 활동이든, 선거 운동이건 간에 - 을 차단하고 최소화하는 한, 사회주의를 향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전진도 약화시킨다. 오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미래의 위기의 여건이 반란의 기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잘 조직돼 있고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만이 실제로는 그러한 기회를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할 것이다.

 

더욱이, 향후 10년 정도 이내에 녹색 사회민주주의 개혁에서 승리하여 기후 재앙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기회를 결코 얻지 못할 수도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원자화, 노동조합의 쇠퇴, 사민당 해체는 노동대중의 조직된 힘의 엄청난 증가를 무엇보다도 먼저 과제로서 필요로 한다.

 

오늘날 계급투쟁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을 구별짓는 한 가지는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한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규범적인 전략에 대한 부담을 벗어나, 노동대중을 위한 실질적 승리를 이룩하는 동시에 노동자와 사회주의적 힘을 건설하기 위해 명백하게 작동하는 실천들, 캠페인들 및 조직 형태를 식별하고 확대하는 데 일관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핵심적 과제이자 중요한 정치적 딜레마는 어떻게 국가의 안팎에서 노동계급을 강화하고 통합시키는 변혁적 개혁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하는 것인데, 특히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더 효과적으로 조직화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게 아니라 열어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1917년의 올바른 교훈을 배운다고 사회주의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교훈에 집착하는 것은 계속되는 실패를 보장할 것이다. 1850년대의 칼 마르크스의 전략적 조언은 오늘날과의 관련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다. “19세기의 사회혁명은 그 시를 과거에서 가져올 수 없고 미래에서 가져올 뿐이다.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을 없애기 전에는 스스로 시작할 수 없다.”

 

(기사 등록 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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