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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돈, 학문을 잡아먹는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9. 9.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한국 대학에 가면 확고한 서열 "문화" 이외에는 늘 당황하는 것은 "돈"을 둘러싼 거기에서의 풍경입니다. 노르웨이 대학 구성원은 공무원인 이상 "돈"을 쉽게 내지 많이 쓰지 못합니다. "돈"에의 접근이 전혀 쉽지 않다는 거죠. 동시에, 굳이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도 굉장히 허다한 편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학은... "돈"의 회전은 그 흐름이 굵고 물량이 많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돈"을 중심으로 해서 돌고 돕니다.

 

일단 "돈"에의 접근부터 한 번 놓고 봅시다. 노르웨이 교원의 거의 유일한 소득원은 "월급"입니다. 연구비도 당연 있지만, 그 사용은 매우 엄밀히 통제됩니다. 예컨대 연구비로 책을 구매할 경우에는 먼저 자비로 산 뒤에 차후 그 영수증을 학교에 제출하여 행정관의 간이 심사를 받아 그 다음에 구매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비싼 맛집에 가서 "법카"를 긁는 것을,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 학교가 기업이 아니고 구성원들에게 "법카"를 줄 수 없으니까요. 프로젝트 연구비로 비싼 술을 사 마시는, 한국 대학과 같은 광경 역시 상상밖입니다. 관비로 술을 절대 살 수 없다는 게 국가 재정 운영의 철칙이니까요. 한국 대학에서 외국의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사람들에게 천만원이나 그 이상의 상금을 준다는 이야기를 하면, 제 동료들이 하나같이 안 믿으려 합니다.

 

여기에서 논문 집필은 교원의 당연한 업무고, 집필했다고 해서 돈을 더 준다는 것을... 역시 상상밖의 일이죠. 논문 게재에 따른 상금은커녕 많은 유럽 대학들은 아예 외국 분을 모셔서 특강을 들어도, 여비를 주어도 강의료를 주지 못합니다. 국립인 대학의 재정이 박한데다 서로 지식을 공유하는 게 굳이 돈 줄 일이 아니라는 것도 상식으로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무원" 신분의 노르웨이 교원이 돈을 덜 받지만, 동시에 돈을 내는 일도 한국에 비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국의 많은 학술지들이 저자들로부터 게재료를 챙겨 받지만, 유럽에서 그렇게 하면 "약탈적 출판" (predatory publishing)이라고 낙인 찍혀 "학술지 대접" 자체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게재료 같은 개념 자체가 없는 거죠. 한데 동시에 심사료도 없습니다.

 

심사하고 게재하는 등등의 학술지 운영을 "학자 커뮤니티"의 공사, 즉 공동의 일로 치부됩니다. 한국의, 철저하게 기업화된 대학에 "커뮤니티" 따위의 개념 자체가 이질적일 것입니다. 이외에는, 한국 동료들이 각종 "프로젝트", 그리고 그 프로젝트로부터 발생되는 소득에 목 매는 현실적인 이유는 대개 "자녀 교육"입니다. "명문대"에 가서 잘되면 역시 교수될 자녀들의 각종 사교육비, 미국 연수비, 유학비 등등을, 교수들이 대개 "프로젝트"를 해서 마련합니다.

 

아무리 명문 사립대의 교수 연봉이 "억대"라 해도 특히 자녀 유학 비용은 그것만으로는 안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노르웨이는 "명문대" 개념도 없고 입시 제도 자체도 없고 사교육의 규모가 미미하기에 교수들은 "계급 소속 대물림" 비용을 굳이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프로젝트"로 시민들의 혈세를 가져가서 쓰지 않아도 됩니다.

 

세계 각국, 각처의 대학은 다 기업화 추세가 있지만, 한국만큼 그 추세가 뚜렷한 나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돈"이 대학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는 이 상황, 즉 대학이 일종의 "지식 생산 기업"이 된 상황에서는 과연 지식 생산이라도 제대로 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과도한 일반화를 하려 하지 않지만, "프로젝트" 일환으로 쓰이게 되는 수많은 논문들 중에서는 과연 독창성이 높은, 새롭고 선구적인 연구 성과는 얼마나 많은가요?

 

"돈"의 노예가 된 "지식"은 위축되고 왜곡되게 돼 있습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프로젝트 팀"에다가 "1년 SSCI급 논문 몇 편을 내라"고 해 그 몇 억원을 준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 팀"은 막스 베버의 가산국가론이나 울리리히 베크의 위험사회론과 같은 획기적인 성과를 정말 낼 것 같습니까?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성과는, 연구자의 장기적인 관심과 노력, 그리고 그 연구에 대한 개인적 애착, 그 연구에 관심이 높은 학자 커뮤니티와의 소통 등에서 발생됩니다.

 

이 "관심", "노력", "애착", "커뮤니티와의 소통" 등등은 기업화된 대학에서는 아예 성립이 불가능한 이야기죠. 저는 그래서 대학의 기업화는 바로 대학의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학생들의 등록금을 뜯어내고 세금돈을 청소기처러 빨아들이는 기관이 된 대학을, 사회가 일종의 "환부", 도움은 별로 안되고 문제들이 너무나 많은 곳으로 인식하게 돼 있습니다.

 

(기사 등록 20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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