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
[이 글은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또는 사회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그것이 이주노동을 통한 국제적 과정이라는 점을 구체적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본과 국가가 어떻게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는지 분석하며, 인종과 젠더 문제를 통합하는 계급투쟁의 전략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마르크스주의 혁신 시도를 보여 주는 이 논문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Socialist Register>(2014)에 처음으로 실렸었다.(Precarious Migrants: Gender, Race and the Social Reproduction of a Global Working Class)
이 글의 필자중 하나인 데이비드 맥낼리는 캐나다 극좌파 조직인 ‘뉴 소셜리스트’(New Socialist)의 주요 활동가이면서 세계 경제, 여성 억압, 변혁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많은 책과 글을 썼다. 한국에 출판된 그의 책으로는 ≪글로벌 슬럼프≫(그린비)가 있다. 번역에 수고해 준 남수경 동지에게 매우 감사드린다.
이 논문에 달린 각주들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필요한 사람은 우리 모임이 만든 오프라인 문서를 참고하라. 글이 다소 길어서 1, 2편으로 나누어 싣는다. 이것은 1편이다.]
‘이 게스트워커[이주노동자] 프로그램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노예제에 가깝다’.
‘아무도 이 연쇄 살인 사건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이 세계의 비밀이 숨어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현재 북미 자본주의의 한 특징적인 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번째는 미국의 이주노동 시스템을 언급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멕시코의 마킬라도라[멕시코의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해 가공·재수출 하는 기업에 무관세 혜택을 주는 제도] 산업단지와 거기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말이다.
사실 이 분명히 다른 시스템들은 하나로 통한다. 북미의 ‘게스트워커’ 프로그램과 멕시코의 규제가 느슨한 노동 체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사회적 지형과 정치 경제에서 서로 맞물리고 있는 공간들이다.
이 불안정한 지대가 후기 자본주의의 자본, 작업장, 젠더, 인종 그리고 사회재생산의 재구성된 공간들을 이루고 있다. 자본의 흐름에 따라 명백한 방식으로 연결되면서도 그것은 또한 사람들의 이동,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상적인 불안정 노동을 대표하는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공간적 이동이 이 경제 지형을 규정한다. 바로 국경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임금인데, 이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영역인 노동과 가정내 사회재생산을 연결해 준다. 임금은 단지 임금을 직접 받는 노동자의 생계만을 유지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임금은 또한 그의 가족들을 재생산 한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에 재생산은 종종 국경을 넘는 송금과 다국적 생존 네트워크를 수반한다. 전세계적으로 적어도 5억 명의 사람들이 임금을 송금 받고 있다. 임금 송금은 또한 뚜렷한 젠더 패턴을 보이는데,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 소득의 더 높은 비율을 본국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다.
학계에서 이주노동과 마낄라 공장 시스템에 대해 연구하는 작은 분야가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제학자들이 점점 더 임금 송금에 따른 금융의 흐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계급 관계의 사회재생산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노동 그리고 임금이 어떻게 복잡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는 그것보다 훨씬 덜 발달했다.
이 글은 이 관계들을 이론화하기 위한 일부 개념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이 글의 프레임은 세계적이지만, 초점은 북미에서의 자본, 인력 그리고 임금의 이동, 그리고 (젠더화되고 인종주의에 기반한) 이주 노동, 국경 보안과 금융 송금을 지배하는 정부에 맞춰져 있다.
이런 것들이 세계적인 사회재생산의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현상들 간의 상호 연관성을 이론화하는 경로를 제안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오늘날 자본과 노동의 사회재생산의 중요한 측면들을 묘사하기 위한 노력으로 원시적 축적, 강탈 (dispossession), 자본의 흐름, 이주, 인종간 구분(racialization), 일과 젠더의 관계의 패턴들을 살펴본다.
이 영역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의 접근법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르크주의-페미니스트적 접근법은 사회재생산을 가정, 이웃, 공동체의 활동들과 시장의존적 재생산 (음식, 주택, 교통, 의류 등이 상품으로 구매되는)에 꼭 필요한 화폐로 가치가 매겨지는 사회활동들 (주로 임금노동) 사이의 내적인 연관성의 측면에서 이해한다.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는 활동들(monetized activities)’이라는 용어는 임금노동이 무산자들 생존의 주요 방편이면서도 노점상, 성매매, 독립적인 가내생산 또한 그것의 일부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는 활동들이 자본주의 시장사회에서 결정적인 것 못지않게 식사 준비, 청소부터 양육과 레크리에이션을 망라하는 가사 활동들과도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자본-노동 간의 총체적 사회재생산의 적절한 이론화는 다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즉, 임금노동과 여타의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는 활동들의 결정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노동계급의 생활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결합적 활동 안에 넣고 보는 것이다.
일터와 가정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 안에서 발전되어 온 사회재생산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젠더와 계급 간의 연관성을 더 심도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 이런 성과를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전통 안에서의 많은 연구들이 노동자들의 사회재생산에서 민족국가를 기본적 틀로 삼은 것에 불만이 있다.
그 결과 좀 더 세계적인 사회 과정 (분명히 국가 간의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과 초국가적 사회재생산의 패턴이 간과돼 왔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전세계적 정치경제라는 틀 속에서 사회재생산을 개념화하는 일부 중요한 비판적 연구가 나오면서 좀 더 기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재생산 분석의 한 영향력 있는 계통 안에서의 ‘방법론적 민족주의’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을 세계 체제 안에서 놓고 보지 않으면서, 이런 접근법은 민족국가를 세계 경제와 지정학적 체제 안에서 확정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 결과 노동시장, 이민, 교육 등을 규제하는 ‘국가’정책의 추진에서 세계적 동역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과소평가 한다.
두번째로 그것은 강탈 (dispossession)과 원시적 축적의 국제적 과정을 보지 못한다. 강탈과 원시적 축적은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력의 세계적 예비군을 만들어 내는데, 국경을 넘나드는 이들의 이동이 자본과 노동의 전세계적 생산과 재생산에서 핵심에 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생산과 재생산의 국제적 공간에 대한 부적절한 이론화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실제적 구조와 복잡하게 분화된 국제 노동계급의 구조, 그 속에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의 중심적 역할을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위계적으로 구성된 세계 노동시장과의 관계 속에서 노동계급의 사회재생산을 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노동시장 안에서 뚜렷한 국가의 공간은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복잡한 요소들로 결합되어 있다. 이는 인종화된 형태의 시민권과 비시민권, 그리고 ‘안정’과 불안정의 차별화된 영역들로 구성돼 있고, 이 모든 것은 노동 통제와 착취의 지배적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
이런 면에서, 세계 노동계급의 사회재생산은 계급과 젠더의 측면에서 분리할 수 없는 이주와 인종화의 과정을 결정적으로 수반한다. 따라서 (위계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차별화된 세계 노동시장에 중심을 둔 사회재생산 이론의 구체화는 오늘날 노동계급 구성에 대한 탄탄한 분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원시적 축적, 강탈 (dispossession) 그리고 세계 노동 시장
‘자본은 전세계적 생산 수단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
마르크스는 자본이 축적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충분히 확보해 노동력 부족을 막아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자본이 노동력을 직접 생산하지 않고 따라서 그 중요한 상품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는 특별한 사회적 과정이 요구됨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가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라 묘사한 이 과정에 대한 그의 설명은 상당한 결함이 있다.
<자본론> 25장에서 그는 노동계급의 일부분은 계속되는 생산의 기계화 때문에 정기적으로 과잉된다고 주장한다. 기계화가 노동력을 대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체계적으로 노동예비군, 즉 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을 양산할 것인데 그 수적 증가는 극도로 무궁무진하다.
그는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는 축적의 동역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고유한 인구법칙’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과잉 인구는 언제든 착취받을 준비가 돼 있기에 ‘자본의 소모품인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고, 이 산업예비군은 마치 자본이 스스로의 비용을 들여 만든 것처럼 절대적으로 자본에 예속돼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 자본주의 초기에 전형적이었던 생물학적 재생산률이 거의 변하지 않을 거라는 암묵적인 가정을 깔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왜 그러한 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회적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연주의적인 가정을 기본으로 설정한다. ‘노동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에 대해서 그는 자본이 ‘이것을 자기 보존과 번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본능에 안심하고 맡길 것’이라고 쓴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의 세대간 재생산을 생물학적 기반이 있지만 사회적으로 조정되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변화가 가능한 인간의 물질적 삶의 영역으로 보지 못한다. 그저 엄격한 자연-생물학적 과정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처럼 취약한, 그의 자연주의적 전제는 그동안 실증적으로 반박되어 왔다.
19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유럽과 북미의 노동계급 여성들은 생물학적 재생산에 대해 점차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고 이것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가족 규모의 급격하고 지속적인 축소를 가져왔다. 유럽에서 기혼 여성이 출산하는 아이들의 평균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기도 했다.(세콤비는 이것을 ‘프롤레타리아 생식력의 대폭락’이라고 불렀다.)
이 극적인 발전은 노동계급의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것이 여성들의 선택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사회-역사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자본은 이러한 과정을 마르크스가 제시하듯이 ‘노동자들의 자기 보존과 번식의 본능’에 맡기지 않았다. 대신에 자본은 국가에 의지해서 피임과 낙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들을 추진했고, 상당한 노동예비군이 필요한 자신들의 필요를 반영하는 이민정책들을 추진해 왔다.
분명히 마르크스의 ‘법칙’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더 유효해 보였는데, 당시 유럽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이주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서 증가하는 잉여 노동을 경험했다. 예를 들면 세계1차대전 이전 한 세기 동안 5천만 명이 유럽을 떠났다.
이탈리아나 아일랜드 같은 특정 국가들이 특히 높은 이주율을 보였지만 그런 경향은 산업화된 영국이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의 많은 부분은 토지를 잃은 농촌 인구가 시장의 임금노동으로 옮겨가는 내부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관계가 있었다. 이는 마르크스의 ‘법칙’에 대한 연구에서 공식적으로 수치가 확인되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나중에 이 점에 대해 다시 논할 것이다.
국내의 노동예비군이 많이 있을 때도 타국으로의 이주와 외국인의 유입은 공존했는데, 특히 임시직, 계절직, 저임금직 같은 경우가 그랬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유럽의 노동시장은 저임금, 임시직과 계절 육체노동직에는 보통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또는 러시아 같은 유럽의 가난한 지역 출신 이민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몰려 들면서 인종적, 민족적으로 구별이 생기는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패턴은 20세기에 들어서 점점 더 중요해 졌는데, 특히 주요 산업 경제들이 노동력의 체계적 수입자가 된 세계2차대전 후 지속적인 경제 성장기 동안에 그랬다. 초창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동력을 동원하는 양식들과 함께, 이것은 종종 이전의 식민지화의 길을 역으로 밟으면서 완전히 인종이 구별되어가는 패턴을 보였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일하는 알제리아인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인들, 영국의 인도인들, 미국의 멕시코인들처럼 말이다.
이주노동을 포함하는 정책들의 인구학적 이유들은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기대와는 반대로 국내 출산률의 저하로 북반구에서의 국내 노동력 재생산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엔 인구기금 (UN Population Fund)은 이민이 없다면 유럽의 인구는 2050년까지 거의 1억 2500 만 명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일본도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미국은 1970년에 이민자들이 전체 노동력의 5 퍼센트를 차지했다. 40년 후에는 16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이민자들은 1995년과 2010년 사이 미국 노동력 성장의 대략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했다. 즉 해외에서 태어난 노동력의 광범위한 수입이 없었다면 미국 자본주의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인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많은 이주노동력은, 특히 ‘임시 노예상태’를 규정한 프로그램이나 또는 시민권이나 노동허가 없이 미등록 노동자로 오는 경우, 노동계급의 취약하고 극심하게 불안정한 부문을 이룬다.
그들의 불안정함이 실제 임금과 직업과 사회적 보호의 수준을 사회 전체적으로 낮추는 역할을 한다. 오로지 반인종주의적 형태의 노동조직만이 그런 경향에 대응하는 진정한 역량을 보여 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이주노동자들의 극심한 불안정성이 사회 정책의 의도적 결과라는 것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먼저 미국의 경우를 보자. 멕시코, 캐나다 그리고 미국 간의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이 조인된 후 자본이 이 지역 내에서 더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이에 노동력은, 특히 인종이 구분되는 멕시코 노동력의 이동은 덜 자유로워졌다.
‘H-2 프로그램’(미국의 게스트워커 비자 프로그램 - 역자 주)은 매 해 10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미국 산업에게 제공하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농업 분야이고, 노동자들은 엄청난 공민권적, 사회적 제약이 있는 조건에서 거의 강제 노동에 가까운 일을 한다.
물론 순전히 수적인 면에서 이 ‘공식적’인 이동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시작된 이후 4백만에서 1천2백만 명으로 세 배가 늘어난 미국의 미등록(‘불법’) 노동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절대 다수는 남미로부터 유입되었다. 그리고 허가없이 미국에 들어오는 멕시코 노동자들의 비율은 1980년대의 4분의 1에서 2000년대에 84퍼센트로 늘었다.
엄청난 수가 나프타로 인해 가속화된 토지에서의 추방, 그리고 국유 산업과 공공서비스 파괴의 결과로 이주를 하고 있다. 토지에서 쫒겨난 일부는 미국과 다른 외국 자본들이 멕시코 내에 설립한 산업단지, 주로 미국과 접경 지역에 있는 마낄라도라 산업단지로 이동하며, 또다른 일부는 노동허가가 있던 없던 간에 미국 시장에서의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는다.
1980년에 미국에 살고 있는 멕시코 출생 인구는 220만 명이었는데 2006년에는 1200만 명이 됐고 그 중 절반 이상이 미등록이다. 세명 중 한 명의 멕시코인은 미국에서 임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멕시코 전체 산업 노동자들의 4분의 1이 마낄라도라 산업지구나 다른 대륙적으로 통합된 산업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 중요한 변화이다. 즉 나프타 하에서 가속화된 원시적 축적과 진정한 대륙 노동시장의 건설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따라서 자본과 노동 모두의 대륙간 이동을 촉진해 왔는데, 자본의 이동은 자유로워 졌고 노동의 이동은 가혹하게 감시를 받게 됐다. 실제로 나프타 시대의 미국 이민정책이 의도하는 바는 미등록 멕시코 노동자들의 취업을 체계적으로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그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범죄화하는 ‘이민의 범죄화’(‘crimigration’: 범죄를 뜻하는 crime과 이민을 뜻하는 immigration의 합성어 – 역자 주)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2012년 한 해 동안에만 오바마 정부는 세관국경보호국(Customs and Border Protection)에 거의 120억 달러를 쏟아 부으면서 감시 시스템을 늘리고 국경 경비대원들의 수를 두 배로 늘였다. 그래서 추방 건수가 늘어나 왔지만, 이 비인간적이고 형벌적인 국경 정책의 목적은 주로 미등록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추방할 수 있는 조건을 강화하는데 있다.
추방은 (불법이민의) 저지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다는 걸 의식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극심한 취약성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수단이다.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주 노동자들이 ‘영구적인 임시 고용 노동력’을 형성하고 있는 인종적으로 편재된 지극히 불안정성 노동 체계를 강화한다.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안정 이주 노동을 촉진하는 캐나다의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형성돼 있다. 하지만, 영구적인 체류를 강조하는 것에서 ‘단기체류 계약노예’ 형태로의 전환이라는 똑같은 신자유주의 모델을 따른다.
후자는 임시 외국노동자 프로그램 (Temporary Foreign Worker Program - 이하 TFWP)을 통해 규제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허가를 직접적으로 취업 자격과 연결하고, 직장 이동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의 임시 노동자들에게 캐나다 국내에 있는 동안 노동허가를 신청한다든가 체류 자격을 변경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최대 체류기간을 4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TFWP 하의 극도의 불안정 이주노동은 2000년 이후 급증하고 있다. 1980년대 초에는 TFWP 전신 프로그램 하에서 4만 명 미만의 노동자들이 캐나다에 있었다. 2000년대 초 첫 10년 동안 매해 임시 이주 노동자로 들어오는 수가 세 배로 늘면서 30만 명이 되었고, 2012년에 이르러서는 이주노동자들이 거의 50만 명이 된다.
게다가 임시 이주노동자들은 소매업이나 숙박업, 요식업 같이 악명 높은 노동 집약적, 저임금, 비노조 부문에 점점 더 많이 고용되었다. 추방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더 현저한 위험이기도 하지만, 합법적으로 시행되는 단기 이주는 캐나다 프로그램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4년의 체류 제한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TFWP가 점점 더 영구적으로 지속화되는 가운데 그 프로그램 하의 임시 외국인 노동자들은 변함없이 임시로 남아 있다. 매해 수 만명의 임시 외국인 노동자들이 노동허가기간이 끝나 캐나다를 떠나고 이들은 수만 명의 새로운 임시 외국인 노동자들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캐나다의 임시체류 이주노동자들은 따라서 완전히 일회용으로 여겨진다. 직장에서 쫒겨날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한 국가에서 쫒겨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결과 그들은 불안정성 등급에서 맨 밑바닥을 차지한다. 많은 이들이 법정 최저임금보다 덜 받고, 종종 초과근무 수당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고용주가 제공하는 숙소에 대한 비용이 월급에서 바로 공제되기도 한다. 모든 의미에서 캐나다의 이주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매여서 기본적인 공민권도 없이 체계적인 경제적, 사회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강제노역자들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같은 ‘자유무역’ 협정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문구는 따라서 세계 노동 이주의 중요한 방향 전환과 관련있다.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곳에서 생산되는 (특히 남반구에서) 잉여 노동의 체계적인 수입자일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제한해서 이주 노동력을 값싸게 만들기 위한 일련의 강압적인 이민 제도를 만들어 냈다.
이주 노동자들은 항상 다양한 (흔히 제한된) 법적 지위를 가지고 도착한다. 비교적 쉽게 (종종 인종-민족적인 이유들로) 영주권과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부터, 임시 외국노동자로 와서 ‘초대’한 나라에서 법적인 제약을 경험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런 서류 없이 들어와서 가장 불안정한 신분인 사람들까지. 미국과 캐나다의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임시 체류나 미등록 이민의 형태는 결정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최근의 ‘긴축 시기’ 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세계적인 강탈(dispossession)의 과정과 이주는 자본주의 인구법칙에서 중심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사실 마르크스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이주노동자들이 겉으로 보여 준 ‘법칙’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이것을 감지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그는 식민주의, 아일랜드에서의 토지 소유의 집중화, 대규모 이주와 아이리쉬계 미국인들의 송금의 중요 역할에 대해 언급했다.
식민주의, 강탈, 토지로부터의 추방과 이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마르크스는 더 생산적인 이론적 조사, 즉 전세계적 규모의 원시적 축적과 그것이 초래하는 노동력을 지닌 사람들의 이동과의 관계 속에서 노동력의 사회재생산을 분석하고 접근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영감이 느껴지지만 이론적으로는 덜 발달된 코멘트들은 인구의 강요된 대규모 이동이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사실 많은 비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그 사회의 외부에서 형성된 노동력을 충당하는 데는 노예제가 핵심적인 사회 메카니즘이었다.
이런 면에서, 특히 여성들의 직접 노동뿐 아니라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기 위한 여성의 노예화는 역사적으로 어렴풋하지만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시대를 관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주변에서 노동자들이 쫒겨나는 것은 여분의 (그리고 대규모의) 잉여 노동력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해왔다. 특히 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확장을 위해서 말이다.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과정에 대해 한 역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광산, 농업, 유통 무역과 서비스에서의 제국의 국경을 넘는 경제적 기업의 창출과 생존은 강요된 비자유 노동력의 존재 여부에 달렸었다.’ 오늘날 이것은 주로 임시 (그리고 복잡하게 예속된) 이주 노동력의 형태를 취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체제의 주변부로부터 쫒겨난 사람들을 대규모 노동력 공급으로 돌리는 방식에서 다음의 세가지 주요한 형태를 볼 수 있다: (1) 17세기와 18세기의 노예제와 계약노예제인데, 이 시기에 수 십만의 아일랜드 아동들과 여성들, 남성들이 노예로 팔렸고, 이보다 더 많이 이루어진 매매는 약 1천2백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다.
(2) 소위 ‘쿨리 노동’ 제도인데, 이 제도 아래에서 적어도 1천2백만 명의 인도 노동자들과 5~6백만 명의 아시아 다른 지역 출신 노동자들이 계약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3) 현대의 초임시 이주노동 체제이다. 노동력을 공급하는 이 각각의 양식들이 인종 구분화와 식민지적, 탈식민지적 종속의 전세계적 체제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고유한 것은 세계 체제의 주변부로부터 인종이 다른 노동력이 충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 계속 존재해 왔다. 대신에 핵심적인 발전은 세계 역사 상 가장 가속화되고 광범위한 원시적 자본 축적의 결과로 세계 노동예비군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데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형태의 불안정 이주를 촉진해 왔는데 이는 노동계급 가족의 재생산을 희생하면서 자본의 재생산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세계 노동시장의 재조직에 중심적으로 기여했다.
[2편으로 이어짐]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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