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한
2월 29일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 성인지적 객관성은 가능한가?' 토론회는 주최측의 예상을 훨씬 넘어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토론회장을 가득 메웠다. 여성억압과 성폭력 문제 해결 방향에 대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창기 서울대 소수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의 능숙한 사회 속에 3시간 동안 벌어진 토론은 매우 뜨거웠다.
(이 토론회의 발제문과 토론문 전문은 이 기사에서 볼 수 있다. -> '상처 치유와 신뢰 회복의 길을 함께 찾아가자' http://rreload.tistory.com/257)
사진 제공 - 담쟁이
김민재 발제
먼저 ‘피해자중심주의의 대안을 만드는 모임 담쟁이’에서 이 문제를 고민해온 김민재 회원의 발제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피해자중심주의를 정의하면, 첫째 사실관계 확정의 측면에서 피해호소인의 진술을 우선적으로 신뢰하고, 둘째 사건 성격 규정의 측면에서 피해호소인의 관점과 주관적 감정을 토대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셋째 조치 도출의 측면에서 다른 관계 당사자들의 의사보다는 피해호소인의 의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람들이 ‘피해자제멋대로주의’라고 느낄 가능성이 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긍정적 의의도 있었다. 가해자의 의도로 성폭력을 판단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 성폭력 문제가 공동체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여 여러 절차와 제도를 만든 점,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점 등이 그것이고, 이는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의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중심주의가 실천에서 잘못된 모습을 보여 온 이유는, 객관성 개념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피해호소인/피해자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며 피해자의 관점만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 절차에서 성폭력이 있거나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먼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정하게 진상 조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적 토론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 이 때 토론은 피해자의 감정과 고통에 대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주장하는 특정한 사실관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이런 토론이 가능하려면 간단한 사건의 개요는 공개되어야 한다.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하고 신뢰를 되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긍정적 방향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해결이라는 것은 지금 공동체 다수의 판단이 곧 객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공동체 구성원들을 성 인지적 주체로 교육하기 위한 일상적 운동이 필요하다는 취지이다. 대중의 잠재력을 믿는다면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김보화 토론
이어서 오랫동안 현장에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연구해 온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이 발제자의 문제의식에 많은 부분 공감한다고 밝히며 이견과 고민을 제시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단지 성폭력 사건 처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약자의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철학과 인식론이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 중심적이지 않아도 될 만큼 평등해졌는지 의아하다. 또한 여성주의가 ‘여성’만을 대변하려는 개념이 아니듯 피해자중심주의도 피해자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덜 왜곡’될 수 있다는 지향이다.
“발제자는 ‘진정’, ‘민주적’, ‘객관적’인 원칙이 이미 존재하는 듯이 말하지만, 이는 지나친 이분법이고 구체적 맥락에 따른 접근이 아니라 당위적 선언에 더 가깝다. 반성폭력 운동은 끊임없이 문제제기해 나가는 ‘과정’이다.
“발제자는 피해자중심주의 성폭력 규정의 대안으로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피해자중심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 개념도 ‘동의 여부’ 측면에서 성폭력을 구분하게 된다는 점에서 불완전함이 있고 구체적 상황과 맥락이 더 고려되어야 한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공동체의 토론을 통한 문제 해결에서 공동체가 신뢰할만한 곳이 아닐 경우 피해자나 가해자에게 상처만을 남길 수 있다. 발제 내용 중 ‘최종 목표는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보다는 공동체의 정의와 신뢰 회복’이라는 주장은 과도하고, 왜곡된 공동체주의적․조직주의적 대응을 낳을 위험성도 있다.
“우선 공동체 내 주체적이고 용기 있는 여성주의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응원․지지하고 담론을 만들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피해자중심주의는커녕, 성폭력이 무엇인지조차 전달되지 못하고 피해자가 고통 받는 곳이 많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전지윤 토론
다음 토론자인 변혁재장전 전지윤 준비위원은 ‘이런 문제에 잘못 대처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와 관련자들에게 사과하며, 반성적 평가에 기반해 발표하겠다’며 시작했다.
“여성차별적 사회구조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당연히 운동사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여성억압 쟁점의 부차화, 조직 보존주의, 폐쇄적 내부구조 등이 문제였다. 그래서 끝없는 상처와 불신이 생겨 왔는데, 그럴수록 법적 소송 등이 아닌 공동체적 해결을 바로 세우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발점은 여성주의와 반성폭력 운동의 의의와 성과를 인정하고 배우고 계승하는 것이다. 물론 그 한계와 약점은 극복돼야 하지만, 목욕물은 버리되 아기는 살려야 한다. 어떤 용어를 쓸 것인지 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성폭력 예방교육과 내규 마련이 필요하고, 성폭력 피해호소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지 말아야 하고, 더 심각한 피해와 중요한 쟁점이 많다며 ‘쓰나미 오는데 조개줍냐’는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 악마화와 여론재판, 꼬리 자르기도 틀렸다. 그것은 단호한 것도, 문제의 해결도 아니고 반발 속에 문제의 변질, 악화만 낳는다. 함께 실체적 진상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 게 핵심이다. 피해자의 치유, 가해자의 거듭남 속에 더 건강한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앞선 두 발제자와 토론자에 대한 반론도 제기했다.
“(김민재에 대해) 누구의 편에 서는 것보다 정의의 실현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봐야 하지 않나? 주관성을 매우 경계하는데 성폭력에서 피해자의 수치심, 불쾌감 등 주관적 감정은 중요하고 그것을 객관적 근거와 연결시키는 것이 맞지 않나? 피해자의 치유보다 공동체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는 소제목은 오해의 여지가 있고, 자칫 공동체보존주의로 해석될 수 있지 않나? 두 가지를 대립시키지 말아야 한다.”
“(김보화에 대해) ‘2차 가해’에 있어 전문성 없는 발언이라 해도 상식, 편견에 입각한 그런 발언들이 말해져서 교정될 수 있도록 해야지 않나? 이론과 전문성 갖춘 여성주의자의 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런 전문가가 항상 옳다는 보장은 없다. 열린 토론을 통해 오류 교정 가능성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성폭력이 경계는 애매하고 복잡하며 정답은 없겠지만,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잠정적 답을 찾고, 그것을 계속 보강해 나가야지 않나?”
질의 응답
청중토론 시간에는 많은 참가자들이 질문과 문제제기를 했다. 먼저 성 인지적 객관성에서 말하는 ‘공동체’의 개념과 ‘공동체적 토론을 통한 해결’의 가능성을 둘러싼 질문이 쏟아졌다.
“‘공동체적 토론을 통한 해결’에서 학생․운동사회가 아닌, 일반 사회도 ‘공동체’가 될 수 있나? 이런 곳에서 진지하고 객관적인 논의가 가능할까?
“공동체마다 양상이 다를텐데, 내부에 성인지적 생각을 견지하는 주체가 없을 경우 문제 해결이 가능한가?”
“공동체의 민주적 토론을 통한 해결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이에 대해 김민재 발제자는 “우선 학생․운동사회에 적용하려는 것이지만 일반 사회에도 적용된다.”, “공동체의 민주적 토론과 결론이 반드시 옳다는 것이 아니라, 토론하는 과정에서 성인지적 객관성 원칙으로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 인지적 주체가 없는 ‘극단적 사례’라 할지라도 민주적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성장할 수 있다.”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반성폭력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 “소수 전문가․중재자가 판단하고 공포하는 것은 공동체에 교훈적이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김보화 토론자는 “발제자는 성인지적 지향을 가진 어떤 공동체든 전제하고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지향과 현실은 분명 다르다는 점에서, 발제자의 의견은 현실과 지향 사이의 간극이 있는 것 같다.”, “공동체적 토론을 통한 해결을 말하지만, 한국사회 대부분의 공동체가 그 정도로 신뢰를 형성하고 성숙한 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 사례를 보면 신뢰할 수 있는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동체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누구나 똑같은 관심을 갖고 탐구하기 힘들고, 의지를 가진 주체를 발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전지윤 토론자는 “공동체는 운동사회를 우선으로 두고 토론한 것이다. 우리가 위로부터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서도 내부의 억압에도 잘 맞서야 한다. 그러나 운동사회부터 시작해서 사회 전체로 추구해나갈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이미 그런 노력과 변화의 사례들이 많이 있다.”, “성 인지적 주체가 없는 공동체에도 ‘송곳’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내부적으로 혁신할 수 없을 때는 외부적 접근에 열려있어야 한다.”, “기구나 위원회도 필요하고, 그 기구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보고하고 평가하는 것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 후 당사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생생한 고민과 질문들도 제기되었다.
“사건 후 가해지목인․가해자와 피해호소인․피해자가 진정으로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가해지목을 받고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스스로 사라진 적이 있는데, 다음 학기가 되니 피해호소인도 사라져 있었다. ‘객관적’ 사건 해결과 어느 한쪽 편에 공감하는 방식으로의 사건 해결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가?
김민재 발제자는 “성인지적 객관성이 바로 공생을 달성하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공동체의 민주적 토론 과정에서 반성과 성찰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공존이 가능하다.”, “성인지적객관성의 관점이 피해자중심주의와 다른 점은 가해지목인이 억울할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중심주의는 무조건 피해자 진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수많은 사례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왔다”고 밝혔다.
김보화 토론자는 “성폭력 해결과정에서 가해지목인․가해자와 피해호소인․피해자가 공존하는 사례도 많다. 잘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보통 이슈화되어 흔히 알려질 뿐이다. 경험상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성찰을 하고 공동체가 함께 논의․교육하고 반성․성찰하여 해결한 경우에 충분히 공존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지윤 토론자는 “유죄추정도 잘못이고 피해자를 보호하면서도 정확하고 공정한 조사와 그에 따른 판단이 필요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해진 후에는 가해자를 추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는 꼬리자르기일 뿐이다. 가해자를 악마화해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문화를 성찰하고 함께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 여러 질문과 자유로운 제기가 있었다.
“김보화 토론자의 말처럼 ‘명확한 정답’은 없을 수 있어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분명 결정을 내려야 한다. 피해자의 제기를 어떻게 볼 것인지, 무엇이 2차 가해인지 등에서. 그럼 점에서는 성인지적객관성이 효과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김보화 토론자는 “피해자중심주의에서 지금껏 공정한 조사와 판단을 하지 않았고, 판단 기준들에 따라 결정을 내리지 않아왔나? 결정의 결과가 좋았는지에 대한 이견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결정을 내리지 않아왔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민재 발제자는 “지금까지 성폭력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되었다고 하는데,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을 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발제문에 나온 불공정한 사례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전지윤 토론자는 “김보화 토론자도 판단이 필요 없다고 한 것은 아니고, 맥락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일리 있다. 구체적 맥락과 시대적 판단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인지적 객관성과 피해자중심주의가 대립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 여성주의 활동가 역시 “피해자중심주의와 성인지적객관성은 서로 배타적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문제 해결 과정에서 서로 배워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밝혔다.
다음과 같은 질문도 있었다.
“김보화 토론자는 공동체는 책임지는 곳이 아니라 인재를 지원 양성하고 격려하는 곳이라며, 전문성 있는 중재자 역할 강조했다. 그런데 만약 이견이 있는 공동체 구성원 있을 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에 대해 김보화 토론자는 “신뢰 있는 전문가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해결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공동체가 토론을 통해 해결하기는 힘들다. 전문가들이 공동체와 좀 더 눈높이를 맞춰 소통해야 한다는 것은 해결 과제이다.”
김민재 발제자는 “성인지적 객관성은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지지적 도움을 주는 역할을 인정하지만, 결정권자는 공동체 구성원들이어야 한다는 취지이다”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 담쟁이
자유 발언
질의응답 후 청중들의 다양한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성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례에서 2차 가해자로 지목받은 경험이 있고, 사과문을 썼지만 양심을 꺾지 않자 진정성이 없다고 거부당했다. 그 뒤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가해지목인의 모습이 획일화․정형화 되어버렸다. 가해지목인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고려되었으면 좋겠다”
“운동은 아픔에 대한 응답인데, 응답이 일방적인 측면이 있었다. 가해지목인의 아픔은 외면하며 운동의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해온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 한다. 공동체를 대체하는 신뢰받는 전문가라는 관점은 위험할 수 있다.”(볼셰비키 그룹 회원)
“기울어진 운동장 비유가 많이 나왔다. 그 운동장에서 어떻게 정의롭게 게임을 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많았는데 문제는 경기장 자체를 어떻게 공평하게 만들 것인가이다.”(볼셰비키 그룹 회원)
“김보화 토론자가 근대적 객관성의 개념을 비판했지만, 사건이라는 개념이 이분법적인 이상 객관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담쟁이 구성원)
노동자연대 회원이라고 밝힌 분들의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도 있었고 논쟁이 이어졌다.
“피해자중심주의의 취지에 공감하지만, 애초 피해자 감정과 인식 중심으로 본다는 점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객관성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중심주의와 객관성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식으로 절충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다.”
“성폭력 개념을 느슨하게 쓰는 경향이 많고, 주관적 개념에 따라 접근하면 실체적 진실에서 멀어지게 된다. 성폭력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도 2차 가해 개념을 쓰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은 많은 문제점을 낳아왔다. 극소수는 허위사실을 말하거나 성폭력이 아닌 것을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성민우회 보고서에서 연애에서 헤어진 후 배신감 때문에 성폭력 당했다고 폭로하는 경우를 봤는데, 이럴 경우 가해지목인이 연애사실을 언급하며 항변한다면, 그것은 억압이나 공격이 아닐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담쟁이 구성원은 “2차 가해 개념을 구체화할 여지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례로 든 예는 부적절하다. 본인의 추측대로 ‘이런 동기에서 그랬나보다, 저런 동기에서 그랬다보다’ 이것을 다 말할 수 있게 허용한다면 상대방을 공격하는 온갖 정보들을 다 공론장에 쏟아낼 수 있게 된다. 상대의 동기를 추측성으로 까발리는 것이 온당한 방어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변혁재장전 회원도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는 태도는 피해호소인의 동기를 의심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최대한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려 노력하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사실관계가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지, 피해 호소 시점에 추측성으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은 가해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앞선 노동자연대 발언자는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우선이고, 진실이 무엇이냐에 따라 억압이나 가해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참가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박수를 받았다.
“한국사회에 여성은 성폭력의 직간접 피해자로 살아간다. 나 역시 그랬는데, 뒤늦게 운동에 뛰어 들면서 이런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스스로 경험하며,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운동 신입인 나와 달리 상대는 조직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동지였고, 이 속에서 조직에 해가 된다는 생각에 결국 입을 닫고 내 탓이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공동체가 불신을 해소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되레 사생활이 폭로되었고 의도를 의심 당했고, 정신상태까지 거론되었다. 나는 내가 입을 닫은 게 옳았다는 슬픈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 이 토론회에 참가해보니 그 피해자들의 용기가 헛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마무리 발언
마지막으로 간단한 마무리 발언이 있었다.
먼저 전지윤 토론자가 발언했다.
“청중 토론에서 성폭력 문제를 거짓 신고하는 경우가 제기됐는 데 그동안 성폭력 규정을 너무 느슨하게 한 것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피해호소에 너무 둔감했던 것이 문제였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피해호소를 곧바로 진실로 받아들여선 안 되지만, 무조건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도 잘못이다. 2차 가해 문제는 좀 더 토론은 필요하지만, 피해 호소인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이전 연애관계나 정신상태, 피해자답지 않은 태도 등을 거론하거나, 우파에게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어서 김보화 토론자가 말했다.
“기존의 피해자중심주의의 의의를 계승하고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피해자중심주의와 성인지적 객관성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폭력의 규정이 ‘성적자기결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고, 공동체적 토론의 위험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런 점들을 서로 잘 이야기해 나가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 사건처리 기술의 문제와 성폭력을 어떤 인식론과 철학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한 논의가 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김민재 발제자는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김보화 토론자가 '무엇이든지 답을 내리려고 하고, 옳은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 남성중심적이고 근대적'이라고 하지만, 그런 자세는 사실 어느 정도 필요하고 이는 성차별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한 전지윤 토론자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에 둔감한 점이 더 문제라고 하는데, 둔감함에 더 잘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 객관성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중심주의가 반대를 위한 대항담론이라면, 성인지적객관성은 대안적 질서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미리 보여주며 대중을 설득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무리 발언은 발제자, 토론자 뿐 아니라 청중들로부터도 들었다.
“성인지적 주체가 없는 공동체는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공동체인 것 같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객관성’ 강조가 필요한지, 피해자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한지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담쟁이 분들의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점에 공감하면서, 피해자중심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보완하는 것이 균형잡힌 태도라고 생각한다.”(변혁재장전 회원)
“담쟁이가 고민하는 지점 때문에 가해지목인 보호 측면이 다소 강조된 것 같은데, 피해자 입만 바라보는 상황이 피해자 치유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해주었으면 좋겠다. 해결 과정에서 여러 주체들이 나서야 하고, 심지어 피해자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비판받고 교정되어야 한다. 기본적 피해자 보호조차 되지 않는 시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올바름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담쟁이 구성원)
성폭력 문제의 올바른 공동체적 해결이 중요하고 더 많은 고민과 생각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토론회였다. 예정된 시간을 훨씬 뛰어넘는 열띤 토론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뒤풀이에서 늦게까지 서로의 고민을 더 공감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 ‘변혁재장전’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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