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에 부쳐
윤미래
17일 새벽1시 강남역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9시간만에 붙잡힌 범인은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했다’고 진술했다. 추가적 조사 결과 그는 실제로 화장실에 숨어 있는 동안 들어왔던 6명의 남자는 그냥 보내고 1시간여만에 처음 여성이 들어오자 그녀를 노려 비로소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조현병으로 4차례 입원한 경력이 있는 환자로,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그만두고 길거리를 떠돌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부지해 왔다.
처음에 언론들은 가해자에 대해서는 ‘목회자를 꿈꾸던 신학생’ 운운하며 온정적으로 보도한 반면 피해자는 ‘화장실녀’로 호칭하는 등 선정적으로 소비하기 바빴다.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벌어지면 유독 가해자에게는 공감과 이해를 해주면서 피해자 여성은 ‘~~녀’로 낙인찍고 소비하는 태도는 한국 사회의 익히 알려진 습성이니까.
그러나 여성시대, 워마드가 주도하여 강남역 10번 출구를 거점 삼아 포스트잇, 국화 등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면서 ‘여성 혐오’를 논조로 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경향, 중앙일보, 한겨레 등이 여성혐오에 대한 사설을 쓰는 등 분위기가 일변하였다.
목요일부터는 저녁마다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으며 추모제를 기획한 ‘강남역10번출구’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들과 집회 참가자들은 여성 혐오의 이슈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논의하고 있다. 금요일에는 여성민우회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필리버스터 행사를, 토요일에는 워마드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현재는 비와 일베의 방해를 걱정하여 포스트잇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상태이다.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은 왜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증오범죄’ 1로 바라보는 것을 반대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벼랑 끝에 내몰린 한 정신이상자의 일탈이지, 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좌파들 중에서도 자본주의와의 전선을 남녀 간의 전선으로 대체한다는 이유로 ‘여성 혐오’라는 문제를 애써 사상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한 시간 이상 매복하고 기다리면서 남자는 그냥 보내고 여자를 노려 살해한, 명백히 여성을 타깃으로 한 범죄에서 여성 혐오를 삭제하는 것은 어떤 억지를 부려도 가능하지 않다. KKK가 지나가던 흑인을 붙잡아 린치하거나, 동성애자 혐오자가 게이바에 들어가 아무나 쏘아죽이는 경우 누구나 이것을 증오범죄라고 부르지 ‘묻지마 범죄’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증오범죄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흑인이나 동성애자의 생명이 백인이나 이성애자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와 폭력이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증오범죄이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역시도 평상시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비하와 폭력이 배경에 있다. 이 사건을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로 보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알파걸, 여풍, 여성상위시대 등 잘나가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천지에 가득한데 무슨 여성 혐오?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나 임금 격차, 성 불평등 지수 등의 통계를 줄줄이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성 혐오라는 말을 온정적 성차별이나 구조적인 불이익보다는 훨씬 적극적이고 적대적인 성차별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근에 유행하는 용법과 달리 여성 혐오라는 말을 좀더 협소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여성은 열등하다는 믿음과 이에 기반한, 남성중심적 사회의 기대를 저버리는 여성에 대한 공격성, 그리고 이것들을 용인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여성 혐오’라는 말을 쓸 것이다.
이렇게 정의할 때 여성 혐오는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는 다른 점이 있다. 흑인이나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달리, 여성에 대한 혐오는 스스로 ‘어디까지나 일부 여성’ - 즉 어떤 식으로든 남성중심적 규준과 기대를 저버리는 여성에게 향한다고 자처한다. 이는 여성으로 하여금 사회적 기준과 압력에 순응하도록 자기검열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물론 ‘돈도 벌면서 아이도 잘 키우는 슈퍼맘이 되어야 한다’ ‘순결하면서 밤에는 요부가 되어야 한다’ ‘잘 꾸미고 예쁘지만 돈을 쓰지 말아야 하고 성형도 하지 말아야 한다’ 등 여성에 대한 사회의 기대는 너무나 모순되고 가혹하기 때문에 여성혐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의 범위를 이렇게 보수적으로 규정해도, 우리는 여전히 여성 혐오는 사회에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다. 당장 인터넷 커뮤니티나 기사 덧글창, 뿐만 아니라 미디어에서까지 못생긴 여성, 성경험이 있는(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비싼 물건을 소비하는 여성, 심지어 남성의 구애를 거절하는(!) 여성을 욕하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김치녀’ ‘된장녀’ ‘삼일한’ ‘보전깨’ 등의 언어들이 거리낌없이 유통되고 있다. 2015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는 60%의 남성들이 이러한 혐오표현에 공감한다고 응답했다. 2
코미디언 장동민은 지난해 ‘우리는 처녀가 아닌 여자를 참을 수 없다’며 자신의 성 경험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하는 여성들을 향해 ‘개보년’이라고 폭언을 퍼부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지만 별다른 재교육, 재사회화 절차도 밟지 않고 멀쩡하게 방송 출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거나 심지어 섹스 요구에 응하지 않는 여성을 ‘김치녀’라고 비하하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속물이라고 욕하며 원망하는 남성들이 넘치고 또 쉽게 동정받는 것이 사회의 분위기이다.(도대체 어쩌라는 것일까?)
못생긴(이 말도 사실은 없어져야 할 말이다. 대체 왜 다양한 신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지 못해 안달인가?) 여성에 대한 혐오는 얼마나 비판 없이 통용되는지 주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약방에 감초처럼 못생긴 여성을 놀리고 희화화하는 코너가 들어갈 정도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남성의 심기를 거스른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볍거나 정당한 것으로 취급되고 가해자는 온정의, 피해자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얼마 전 서울 방배동에서는 동거하던 남성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여성이 세 차례나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경찰이 가해자를 훈방조치하여 풀려난 가해자가 피해자를 살해하고 마는 일이 일어났다. 여성가족부의 전국가정폭력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했을 때 ‘집안일이니 잘 해결하시라’며 돌아가거나 출동조차 하지 않은 비율이 68.2%에 달했다. 3
아내를 너무 잔인하게 구타하여 법정에 서게 된 가해자조차 ‘평범하고 성실한 가장’이며 ‘아내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사회봉사,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기 일쑤다.
이런 환경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빈발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이슈화되면서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간, 성추행, 폭행, 학대, 위협 등에 노출되어야 했던 여성들의 경험담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해시태그를 달아 자신들 또한 언제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강남역 추모제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일상적으로 경험해온 폭력과 위협을 잇따라 증언하고 있다. 이들 역시 하나같이 ‘나도 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뼈아픈 진실이다. 여성 혐오의 온상이 된 사회에서는 여성 살해조차도 그리 드물지 않다. 강간살해나 성판매여성 살해는 물론 친밀한 남성에 의한 살해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빈발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5년 언론에 보도된 살인 및 살인미수 사건을 집계한 결과, 여성들은 이틀에 한 명꼴로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죽거나 죽을 뻔하고 있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하면 얼마나 더 많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4 우리는 정말이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정신분열범죄’라는 명명의 폭력성
이 사건이 ‘여성혐오범죄’로 부각되자, 경찰과 보수 언론은 용의자의 정신병력을 부각하며 이를 ‘정신분열범죄’라고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다.
물론 여성혐오를 하는 남성들이라고 모두 길 가던 여성을 아무나 찔러 죽이지는 않는다. 중증의 정신질환 환자가 제대로 된 치료와 관리를 받지 못하고 노숙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만든 사회 안전망의 처참한 부실 역시 비극을 낳은 원인이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벼랑끝으로 내모는 이 사회의 잔인함에 비판의 날을 늦출 필요는 조금도 없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남성의 사회적 박탈감에 기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도, 범인이 사회의 최하층을 떠돌던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은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여성혐오를 좌시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먹이가 되는 사회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키워 왔고 돌봄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을 도리어 생존경쟁으로 몰아넣어 왔다는 점에서 이중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뜻할 뿐, 사건을 가해자의 심리 문제로 환원할 핑계는 되지 않는다.
정신질환은 그 자체로 범죄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정신질환자들의 범죄율은 오히려 일반인보다 낮다. 정신질환자가 살인을 하려면 환자가 아닌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동기와 원인이 작용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사건을 이해하는 데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조현병에 걸리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식의 설명이야말로 현실을 완전히 오도하는 편견이며, 이렇게 사건을 설명하려 하는 것은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국가가 나서서 강화해주는 꼴이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은 “망상이란 자기의 사고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고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병의 증상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에 비해서 특별히 남자들에게 더 기분나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조현병 때문에 증폭되고 극단화되었을 수는 있지만 조현병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폭넓게 조장하고 있는 사회적 맥락을 사상하는 것이다. 그는 왜 하필 여성들을 지목하고 여성들을 적대했을까? 중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사회의 최하층으로 떠밀린 그를 무시한 것이 과연 여성들뿐이었을까?
오히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인데 그런 여자들이 나를 감히 무시하다니’라는 사고가 작동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실제로 그러한 사고는 사회적으로 아주 흔하게 퍼져 있고, 또 용인되고 정당화되고 있지 않은가. 재차 묻는데, 우리는 남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여성들에게 어떤 짓들을 저질러왔는가?
이렇게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여성이 신체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약자라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사회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병증이 전혀 다르게 발현되었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지적할 수 있겠다.
사건이 이슈화된 후 일부 ‘정상적인’ 남성들이 보이는 반응 또한 역설적으로 이 사건이 사회의 폭넓은 여성혐오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하얀 리본을 찬 여성들을 화장실로 끌고 가 칼로 찔러버린다느니, 추모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을 밤길에 습격한다느니 하는 글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녀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를 방문하는 것 자체에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추모제를 진행한 주최측에서는 마스크를 준비해 나누어주었다. 추모제가 연속되면서 일베에서 수십 명이 ‘남성을 가해자로 몰지 말라’ 등의 피켓을 들고 난입하고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고, ‘메퇘지’ ‘메갈년들’ 등 추모객을 모욕하는 포스트잇을 쓰거나 붙어 있는 추모 포스트잇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한 일베 회원은 핑크색 코끼리 옷을 입고 추모를 조롱하러 왔다가 추모객들에게 혼쭐이 나고 돌아갔다. 대구에서는 칼을 든 남성이 추모현장 주위를 맴돌고 있다가 경찰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이 사람들도 다 정신병에 걸려서 이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무엇이 두려워 추모를 훼방놓고 사건을 축소하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성 혐오’ 개념을 꺼내는 데 질색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 개념이 남녀 대립 구도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호모포비아를 없애자는 운동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분열시키거나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가 백인과 유색인을 갈라놓지 않듯이, 여성 혐오를 인지하고 이것을 중단시키기 위한 싸움이 남성 전체를 가해자화하고 여성 전체를 피해자화한다는 비난을 들을 이유는 없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싸움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합법적인 혐오와 폭력이 앞으로도 계속 승인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그것을 멈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싸움이며, 만약 이것이 남녀 대립 구도로 흘러간다면 그 책임은 ‘살려달라’고 외치는 여성들이 아니라, 자기방어와 기득권을 너무나 우선한 나머지 이 당연한 요구에조차 동참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있을 것이다.
사건이 범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변화를 위해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조장하고 묵인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없애야 한다.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과 멸시를 더 이상 방관하고 묵인해서는 안된다. 일상 속에서부터 이러한 언사들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것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제재하면서 사회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미디어 컨텐츠에 문제를 제기하고, 성평등하고 대안적인 시각을 계발하고 확장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혐오와 폭력을 지양하고 편견을 없애는 교육도 필요하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에게 ‘얘가 너를 좋아해서 괴롭히는 거야’ ‘애들이 그럴 수 있지’ 같은 말들 대신 괴롭히는 아이에게 ‘네가 괴롭힘을 당하면 어떻겠니? 그러지 마.’ ‘남을 해치지 않는 어린이가 되어야지?’ 같은 말들을 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 학교, 직장 등 교육이 이루어지는 모든 공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어떤 피해를 낳을 수 있는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고, 차별과 혐오를 곁에서 방임하지 않는 인식과 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경시되거나 정당화되는 관행 역시 바뀌어야 한다.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등을 엄격 엄중하게 처벌하고, 이 책무를 태만히 하는 경찰 관계자는 불이익을 주거나 징계해야 한다. ‘남자의 성충동은 참을 수 없다’ ‘욱해서 손이 올라갈 수 있다’ 등 남성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언설들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더 이상 그것들이 사회통념이 아니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더 많이 고발하고 불의한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그것을 낳은 현실을 더 깊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결국 현재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까지 나아가야 한다.
근본적으로, 여성이 약자인 것은 단순히 근육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남성은 공격적·경쟁적·능동적으로 사회화하고 우월한 지위와 대우를 할당하는 한편 여성에게는 복종적이고 수동적일 것을 강요하며 열등하고 주변적인 위치를 강요하는 성역할 구분이 여성을 사회적으로 취약하고 멸시받는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성별 분업을, 여성들로 하여금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가사·육아·돌봄노동의 사사화와 불균등 분담을 철폐해야 한다. 지금 여성에게만 얹혀 있는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사회와 남성이 분담하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자원을 획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평등한 인간으로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 때에만이 이 불균등한 성별권력관계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청년좌파 등의 운동 단체나 심지어 여성민우회 같은 조직된 여성운동단체와의 연대를 히스테릭하게 거부하고 ‘불법 집회’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는 추모객들 일부의 반응은 우려스러운 데가 있다. 국가와 체제는 계급 앞에서 중립이 아니고, 그러므로 당연히 성별 앞에서도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여성을 주변화하고 차별을 재생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혐오하고 조직된 운동을 두려워하는, 국가와 체제의 질서에 대항하지 않으려는 저항은 조만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기성의 질서가 그어놓은 테두리를 넘어서면서 전진해왔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꺼이 정치적이고, 대담하게 급진적이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이 싸움은 여성들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남성들의 역할은 그 곁에서 참회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수혜를 누려왔던 남성들이 이 체제를 바꾸는 데 도의적으로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 남성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구조를 묵인하거나 공모해오지 않았는지를 성실하게 성찰하고, 자신의 일상 속에서부터 차별적 사고와 태도가 재생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안전과 존엄에 대한 여성들의 요구를 자기 것처럼 받아안고 함께 행동해야 한다.
현재 많은 남성들이 보이고 있는 ‘남자라서 죄송하다, 부끄럽다’는 반응은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자신이 가해자라는 인식과 죄책감은 자칫 자신을 가해자의 자리에 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함께 투쟁하는 주체로 나아가려는 노력, 공분과 참여와 능동적인 행동에 대한 결의이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주변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거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를 때 말려달라,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외치고 있다. 이러한 외침에 응답하여 SNS에서는 ‘#응답하라시스남’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이번 운동을 지지하는 인증샷을 찍는 남성들도 나타나고 있다. 성평등을 위한 투쟁에서는 남성들 또한 단순한 방관자일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위치에서만 할 수 있는 실천으로서 이 싸움에 연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이 이 사안이 성별대립구도로 나아가는 것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기도 하다.
이번 살인사건은 너무나 일상화되어서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에 대한 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밀어올렸다. 강남역을 거점으로 한 포스트잇 붙이기는 일단락되었지만 일단 형성된 주체들은 흩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여성들의 증언을 모으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목소리가 퍼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여성들을 침묵시키려는 폭력과 위협에 함께 맞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여자라서 모욕당하고, 맞고, 죽어가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 남성들이 겪는 사회적 소외감과 박탈감이 더 약한 여성들에게 향하는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 더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자조할 필요가 없는 세상, 모든 성이 평등하고 모든 생명이 안전한 세상을 향한 여성과 남성의 연대 투쟁을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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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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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세상을향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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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이 사건에 대해서는 ‘혐오범죄’라는 명칭이 더 많이 쓰이고 있으나,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범죄를 이르는 명칭으로 ‘증오범죄’라는 말이 더 오래 전부터 쓰여왔고 용어가 중간에 바뀔 경우 ‘증오범죄’라는 말을 쓰는 기존의 문헌들이 사장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글에서는 ‘증오범죄’로 용어를 통일하였다. [본문으로]
- 양지원, <내가 강남역 촛불 문화제를 제안한 이유>, 오마이뉴스, 2016. 05. 2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1211, 2016. 05. 22 최종 열람 [본문으로]</내가>
- 위의 글. [본문으로]
- 정선영, <여성폭력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경기신문, 2016. 5. 5,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7946, 2016. 5. 22 열람. [본문으로]</여성폭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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