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영
대통령 이명박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대통령 박근혜는 이제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역사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고, 지겨운 암기의 나열에 불과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박근혜는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만이 이 사회에서 인정될 수 있으며 그런 관점으로 씌워진 교과서만 인정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었다.
두 명의 대통령은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 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위안부' 합의는 우리에게 그 일깨움을 거대한 트라우마와 함께 상기시켜주고 있다.
한일외교의 진전?
정부와 여당은 이번 합의가 대단한 진전인 것처럼 선전했다. 일본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지른 잘못과 사과 사이에는 그 격이 맞아야 한다. 길을 가다 실수로 누군가와 부딪혔다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서 몇 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성범죄를 저지른 한 국가가 기자 회견 한 번 한 것으로 그 사과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 총리 아베는 제대로 된 서한 한 장 심지어 공식적인 담화 하나 없이 그저 청와대에 전화 한통으로 사과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진심어린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UN 사무총장 반기문의 메시지는 이 합의의 본질을 한 마디로 요약해주고 있다. 그는 박근혜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
그러니까 국적이 한국이기는 하지만 복잡한 국제적 이해관계의 한 가운데 있는 UN 사무총장은 이번 사태에서 “용단”을 내린 쪽이 아베가 아니라 박근혜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합의의 진실은 가장 잘 보여주는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다. 일본의 언론들은 합의가 끝나자마자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이 옮겨질 것이라고 앞 다투어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즉각 그것이 유언비어라고 항의했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과 위엄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서 (중략) 적절히 해결되도록" 한다는 "노력"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우려를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소녀상을 옮겨달라고 관련 단체들에게 설득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노력이라는 말속에서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 떠오른다.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의 머리에는 털모자가 씌어져 있고, 발에는 핫 팩이 놓여 있다. 털모자가 지저분해지기라도 하면 새로운 모자로 바꿔준다. 소녀상이 다른 기념비와 달리 현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연출되는 풍경이다.
그것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진실을 위한 지난한 투쟁의 길을 상징하는 것이며 가해자들에게 인정과 반성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배우고 반성하게 하는 소중한 교과서이기도 하다.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한 그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다. 소녀상에는 노란색 목도리가 리본 모양으로 매어져 있다. 세월호 리본을 떠올리게 한다. 소녀는 우리와 대화하며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존재로 함께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이것이 피해자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일본 정부와 한일관계 진전을 가로막은 짐으로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소녀상을 옮기려는 이유다. 일본 정부의 사과에 한 치의 진심이라도 있었다면 소녀상을 남겨서 계속 기억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억할 과거가 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화석화된 기억조차도 가루로 부서져 잊히길 원한다. 그들에는 비통하게도 한국정부도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더 큰 비극으로
이 합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명언을 다시금 비극적으로 입증한다. 박근혜는 자신이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정책은 아버지와 소름끼치게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번 합의는 1965년 한국의 박정희 정부와 일본의 사토 내각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맺은 한일 협정의 청구권 협정과 유사하다. 청구권 협정 2조에는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나온다.
두 가지 점에서 이번 합의와 닮았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종적”이라는 말이다. 청구권 협정에도 이번 합의에서도 최종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다.
한국 정부는 12월 31일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에서 이번 협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24년 전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24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도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다.
피해 할머니들께서 왜 당신들과 상의 한 마디 없이 합의를 마무리지었냐고 외교부 차관에게 항의했을 때, 그는 그래서 이렇게 뒤늦게 찾아왔다고 얘기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번 합의는 “최종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역적”이기까지 하다. 이번 합의가 인정되면 모든 것이 끝났을 뿐 아니라 앞으로 더는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가 반복되면 한번은 희극이여야 하는 데, 우리에게 역사는 가혹하게도 더 큰 비극으로 반복되는 듯하다.
이 형용사를 일본은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다. 협정 바로 다음 날 박근혜에게 전화로 사과했던 아베는 공개적으로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제기하면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협박했다. 일본은 한국을 협박하고 한국 정부는 국민을 협박하는 기막힌 상황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반성과 사과의 시점은 가해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반성과 사과가 진심이었다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성이 피해자들이 납득할 만큼의 크기와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법적으로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반성을 이어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강간범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지만, 그날의 사과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한다면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판사는 없을 것이다.
역사라는 법정에서 반성의 끝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반성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반성하는 이유는 미래에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 인간에게 미래가 존재하는 한 반성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책임의 의미는 더 큰 문제다. 두 협정 모두에서 일본정부는 자신의 책임을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자신들의 범죄를 한 치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청구권 협상은 식민지 시대의 징용이나 징병이 절차적으로 정당한 행위였지만, “충분한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이번 합의에서 일본 측 발표를 보면 “일본 정부는 예산에 의해 모든 전 위안부 분들의 마음을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 하며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설립한 재단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10억 엔을(≒ 100억 원) 출연한다고 한다.
이 문구 어디에도 일본의 법적 책임은커녕 도덕적 책임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이 없다. 그저 상처 입은 사람이 있으니 일본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내용이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배상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인도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협상이 발표된 다음 날 일본의 언론들은 소녀상을 옮기지 않으면 약속한 돈을 지원하지 않겠다며 우리를 모욕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과에 대한 대가로 10억 엔을 받은 셈이고, 일본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불쌍한 할머니들에게 시혜를 베푼 셈이다.
한국 정부가 할머니들을 팔아 넘겼다는 얘기가 유언비어가 아닌 진실로 보일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합의도 이런데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까?
합의의 진정한 가격
아무리 박근혜 정부라고 해도 전 국민이 200원씩만 모으면 되는 돈 때문에 이번 협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일협정을 맺은 박정희 정부에게는 6억 달러가 절실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부에게는 어떻게든 경제를 일으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게 6억 달러는 큰돈이었다. 반면 2016년 한국 정부에게 100억 원이 그렇게까지 절실한 돈은 아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이번 협상에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외정책의 중심을 동아시아로 옮기고 있다. 중국은 빠른 속도로 미국과 GDP 격차를 좁혀가고 있으며, 구매력(PPP)기준으로 보면 이미 추월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을 자기편에 묶어두는 것은 사활적이다.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자 세계 5위권인 군사대국인 일본이 중국과 가까워진다면 미국에게는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미국에게 일본만큼 사활적이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온순한 동맹국 한국을 묶어두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다.
그런 미국에게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불안요소다. 미국은 위안부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은 적당한 가격을 매겨 일본에게는 사과하는 척을 한국은 허울뿐인 사과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마무리하게 만들었다.
총기 사고로 죽은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오바마 행정부의 가면이라면, 국가 범죄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의 눈물을 두고 거래하는 모습은 오바마 행정부의 민낯인 듯하다.
박근혜 정부에게도 이번 협상은 충분히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박근혜는 이 문제를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용했다. 박근혜에게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박정희라는 이름은 드높여야 하지만, 다까끼 마사오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친일을 지우고, 자신이 친일파의 딸이라는 것을 지우기 위해서 처음부터 이 문제에 진지하게 노력하는 척 했다.
이 문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일본과의 충돌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박근혜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그러한 충돌도 불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박근혜 정부에게 이 문제는 짐이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입장에서는 “좋은 가격”에 팔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듯하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이번 협상은 한국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중국은 이제 한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이다. 하지만 굳건한 한미일 동맹 속에서 한국은 미국의 용인 없이 중국과 함부로 가까워질 수 없다.
한국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한국에게 이번 협상은 미국에게 잘 보임으로써 중국과의 협력 강화를 용인 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고 며칠 후 한국은 중국과 국방부 장관 핫라인을 개설했다. 핫라인 개설은 11월에 이미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번 협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않겠지만, 이런 조치들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는 전시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용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 12월 31일 한국 정부가 발표한 담화문에서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은 외교 현자에서 우리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벼랑 끝에 선 심정”이라는 결연한 말에는 한국 정부의 그런 복잡한 이해관계를 함축한 듯하다. 이번 협상의 가격은 100억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국익”과 연관이 있다.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아픔
그렇다면 국익을 위해서 이런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국익을 위해서 합의를 인정해야 할까? 두 가지 이유로 그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이 맞다고 생각한다.
첫째, 지금까지 역사에서 국가의 이익은 권력자들의 이익이었다. 물론 국익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미미하긴 하지만 이익인 경우도 많다. 이번 합의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치러야 할 대가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평화가 위협받을 수 있다. 한미일 동맹의 목적은 중국에 대한 압박과 견제를 강화하려는 것이고, 중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둘 사이의 긴장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둘째, 이 이유가 더 중요한데 인간에게는 이익이라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진심어린 사과가 일본의 국익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일본인이라면 한국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자행한 학살과 잔혹행위에 대해서 사과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것이 당장의 국익에 반하는 일일지라도 인간에게 정의와 존엄을 초원할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합의가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심지어 이 합의를 하지 않아 우리에게 아픔이나 손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는 기꺼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복잡한 외교 현실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나라가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정의, 인간 존엄 등의 가치를 져버리는 나라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할머니들의 아픔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사서는 안 되는 아픔이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 ‘변혁재장전’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억압과 차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장 취재 -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 토론회 (0) | 2016.03.10 |
---|---|
성폭력 사건과 공동체적 해결 (0) | 2016.03.02 |
한미일 지배자들에게 두 번 죽임을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 (0) | 2015.12.31 |
마르크스주의 젠더 이론을 향하여? (0) | 2015.11.26 |
“LGBT 정치는 세상을 넓게 보고 더 급진적이 돼야 합니다” (0) | 2015.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