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진보논객'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문제가 폭로되면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내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했고 오래 시간 비겁하게 회피했던 것이 떠오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반성적으로 나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이 먼저 피해야 할 것은 소위 ‘합리적 의심’이다. ‘왜 이 시점에 저런 방식으로 폭로하고 나선 것이지? 다른 방법은 없었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런 말을 접할 때마다 피해를 호소한 사람은 숨이 막히는 듯할 것이다. 심지어 폭로에 나선 여성의 과거나 언행, SNS기록 등을 들춰내며 그 신뢰를 떨어뜨리려는 행위는 너무 가혹하다.
누군가가 사기나, 교통사고나, 의료사고나, 갑질로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대개 관심을 보내며 위로하기 마련이다. 이런 일도 마찬가지다. 필요하고 합리적인 반응은 조심스레 사실을 확인하며 공감과 위로를 보내는 것이다. 특히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그를 진정으로 아끼고 걱정한다면 더더욱.
진실은 성적 억압과 폭력을 경험한 여성 중에 그것을 폭로하는 여성은 극히 소수이고, 거기에는 매우 큰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상처가 아물지 않고 너무 고통스럽기에, 다른 대안이 없기에 지푸라기라도 잡게 되는 것이다. 즉, 주된 책임은 예기치않은 파장과 역효과를 감수한 벼랑끝 선택으로 몰아간 쪽과 이 사회에 있지 여성에게 있지 않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잘못된 반응은 피해자에게 원래 사건보다도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옳게도 이런 ‘2차 피해’를 경계해 왔다. 페미니즘이 발전시켜 온 ‘피해자 중심주의’도 간단히 기각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압도적으로 여성차별적 사회에서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자는 것이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피해자와 여성의 말이 무조건 진리라는 이상한 논리’가 아니다.
지금 피해를 호소하는 한 분은 여성으로서 매우 밝히기 어려운 강간 피해까지 밝히고 있다. 어떤 ‘의도’와 ‘목적’이 아니라, 그동안 얼마나 상처받았고 고통스럽기에 이렇게 나설까를 보려고 해야 한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를 봐야 한다.
“불의에 저항하고 부당함을 고발하라는” “배웠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가치에 입각해 행동했을 뿐”이라는 말에 기본적 신뢰를 보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더 분명한 진상을 공정하게 밝혀나가야 한다.
이미 진보진영은 기성사회에서 지배층과 고위층이 저지른 성적 억압과 폭력이 불거질 땐 민감하게 반응하고 철저한 잣대를 적용해 왔다. 이중 잣대가 되선 안 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단순히 가해자를 괴물 취급하고 매도하고 낙인찍어서 도려내려는 식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이런 접근은 가해자와 소속 집단이 더 강경하게 반발하면서 조직 보존적 대응을 하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전혀 정당화될 순 없지만.)
이번 사건에서 다시 드러났지만, 극도로 여성 차별적인 이 사회와 구조 속에서 누구도, 진보진영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잘못은 주변 동지들도, 나 자신도 언제든지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단체는, 저 동지는, 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이야말로 위험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닫고 있거나 조용히 운동과 조직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할 것이다. 가해자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글을 쓰고 실천하던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단지 위선이 아니라 이런 위험을 보여주는 것 같다.
따라서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교정과 교육뿐 아니라, 여성 억압과 차별에 덜 예민하고 덜 민감했던 진보진영의 문화를 돌아보고 변화시켜야 한다. 문제는 너무 예민하고 민감한 것이 아니라, 너무 둔감하고 무감각한 것에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예방교육과 규약, 제도적 방지책 마련에 소홀한 핑계가 돼서도 안 된다. 누군가 말했듯 여기에서는 ‘피해자가 되지 않는 교육’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가해자가 되지 않을 교육’이 있을 뿐이다.
제발, 피해자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가해자까지도 끝없이 더 큰 상처를 받으며, 더욱 감정의 골과 불신을 키워가는 과정이 되진 않았으면 한다. 비슷한 피해를 가슴에 묻어 둔 여성들이 지켜보면서 ‘역시나’하면서 절망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잘못을 범한 동지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놓치게 돼서도 안 된다.
부디 이번 사건이 진보진영이 함께 이런 문제를 돌아보고 더 건강하게 거듭나는 과정이 되길 기대한다. 피해자가 상처를 이겨내고 진보운동과 동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해자도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고 진정성있는 실천 속에서 다시 명예와 신뢰를 회복하길 기대한다.
우리 모두가 여성 억압을 더 깊이 이해하고, 비슷한 사건에서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교훈을 배우길 기대한다. 그래서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사회 진보와 변혁을 위한 운동 진영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지지를 갖게 되기를. 그 점에서 노동당 지도부, (http://www.laborparty.kr/bd_member/1592462), 김민하 님(http://weirdhat.net/blog/?p=545) 등의 태도는 고무적이고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그동안 부정적 사례가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의 글에서 이 부분을 참 쓰디쓴 마음으로 읽었다. “운동 사회 내부에서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실명 폭로라는 방식으로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에 따르는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걸려 법적 공방이 이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기본이었습니다. … 말하는 데 3년이 걸린 이유가 이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과 정의가 회복되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들은 여기에 기여한 사람들로 지지받고 기억돼야 한다. 사회의 진보와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부조리에 대해서 더 철저하고 민감해야 한다. 그럴 때 위로부터의 부조리와 억압에 맞서는 우리의 능력, 그것에 대한 지지와 신뢰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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