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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모순의 교차와 투쟁의 결합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4. 27.

전지윤

 


[이 글에 원래 달려있었던 각주들을 여기서는 모두 생략했다. 필요하면 오프라인 글을 참고하라.]  


우리는 그동안 정치적 혁신을 주요한 과제로 말해 왔다. 변화된 현실을 더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또 변혁할 수 있도록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은 계속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우리가 정치적 혁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억압과 차별문제를 꼽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자본주의는 착취뿐 아니라 끔찍한 억압을 낳는 체제이며 그 양상과 정도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노동자연대 활동 속에서 억압과 차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경직돼 있고 현실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왔다.


무엇보다 노동자연대가 무려 4년 동안이나 관련한 구설수에 올라있는 한 성폭력 사건이야말로 이런 생각을 더욱 더 굳어지게 만들어줬다고 할 수 있다. 그토록 명확하고 헌신적으로 투쟁에 연대하던 동지들이 이런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오류를 인식하거나 교정하지 못할뿐 아니라, 그것을 정치적·이론적으로까지 정당화하려 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이 문제가 정치적·이론적 문제점들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는 고민까지 더 나아가게 됐다.


먼저 내가 주목한 것은 사회변혁조직이 민주집중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오류를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견을 소통하고 토론하기 위해서는, 계급의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의 문제였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레닌이 발전시킨 조직 이론을 어떻게 계승·혁신할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여성억압과 차별에 대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비록 앞으로도 충분히 더 토론하고 검증하며 보완해야할 의견이겠지만 말이다.  



 

경직된 태도와 공감 부족의 정치적 뿌리가 있는가

 

먼저 나는 이번에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거듭 드러냈던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분리주의 페미니즘급진 페미니즘을 주로 겨냥하며 페미니스트의 성폭력 개념과 그 대처 방식을 비판했다. 나아가 페미니스트와 혁명적 사회주의자 정치사이의 근본적 차이도 강조했다.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통한 여성해방이라는 전략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남성 노동계급이 여성 차별로부터 진정한 이득을 얻지도 않으며,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은 함께 단결해야만 서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점도 페미니스트들은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차별이 계급 적대로부터 비롯했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가부장제가 문제라고 본다.

 

이런 페미니즘 정치에 따르면 계급투쟁에서 거리 두는 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될 것이고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결과를 낳을 것이기에 이런 전략으로는 결코 여성 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근본적 여성주의 사상은 그 과도함과 순수주의, 개인주의 때문에 노동자 계급 운동 안에서 끊임없이 분란의 소지를 만들어 내는 트로이의 목마라는 규정까지 한다.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남성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보는가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연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많은 가정에서 남녀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조차 남성 노동자가 얻는 이익은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보다 더 오래 일하고, 또 더 먼 곳으로 직장을 다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의 하루 24시간을 살펴보면, 남성 노동자는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기는 데에 여성 노동자보다 고작 하루에 한 시간 정도만 더 쓴다(통계청). 1시간가량의 추가적 여가 시간은 대단한 이득이라고 할 수 없고, 또 남성 노동자가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데 사활을 걸 만한 물질적 기초도 되지 못한다.

 

노동자연대의 자매조직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지도적 활동가였던 크리스 하먼이 이런 주장의 발원지였던 것 같다.

 

여성 억압에서 노동계급 남성들이 얻는 이익은 정말로 적은 것이다. 노동계급 남성들이 아내의 노동으로부터 직접 얻는 것은 하루에 한 두 시간을 넘지 않을 수 있다. 대단히 큰 이득은 아니다. 그것은 기성체제가 혁명적으로 바뀔 때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단결해 투쟁하는 경험에서 배우고 이런 단결을 실천에서 구현하려고 집단적으로 노력하는 활동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게 거듭 강조된다.


이런 주장은 추상적으로 보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볼 수 있다. 먼저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다양한 이론과 운동으로 볼 수 있는 페미니즘에 공감과 지지보다는 선을 긋는 태도이다. 나는 노동자연대에서 활동할 때, 여성 문제에 대한 토론이 대개 페미니즘의 한계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것을 많이 봐 왔다. “분리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등이 주로 표적이 돼 왔다.


미국의 사회주의자 샤론 스미스는 이처럼 가장 부르주아적인 형태에 기반한 페미니즘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서 이를 무너뜨리고는 지적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억압에 맞서 싸우는 데 도리어 해가 된다고 지적한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여성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 대해 공감하는 데 서투른 태도다. 이것은 여성 억압에서 남성 노동자가 이득을 얻는가라는 잘못 던져진 질문에서 드러난다. 이 질문이 잘못 던져진 이유는, 그것이 차별받는 여성의 처지를 공감하기 보다, 과소평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가사와 육아를 여성에게 떠넘겨서 남성 노동자가 얻는 여가가 고작하루 1시간에 불과하고 대단한게 아니라는 언급을 보라. 이런 주장은 신빙성도 없다. 현실은 훨씬 심각해 보인다. ‘한국 여성(20~49)의 가사노동 시간은 남성(20~49)의 약 8배다. 평일 기준으로 남성은 33.5, 여성은 276.1분을 가사노동에 쓰고 있다. 취업자 기준으로 봐도 남성의 평일 가사노동시간은 29.3, 여성은 178.6분으로 6배 이상이다. 맞벌이 여부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가사노동을 여성이 전담하고 있다.’


남성이 더 오래 일하고, 또 더 먼 곳으로 직장을 다니는것 때문이라는 변호도 그렇다.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게 당연한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에게 집 근처의 불안정한 부업 일자리만 주어진다는 문제의식은 찾기 어렵다. 피곤에 쩔은 채 퇴근해서 몇 시간이나 더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과연 그것을 고작이라 생각할까? 샤론 스미스도 1980년대 중반 국제사회주의 경향(IST) 내에서 벌어진 논쟁을 돌아보며 이것을 지적한다.

 

노동계급 여성 억압의 경험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여성 억압에서 남성이 이익을 보는가라는 질문의 잘못된 이론적 리트머스 테스트로 이어졌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하먼이 처음 주장했던 것, 즉 남성이 보는 이익은 미미하다는 것에서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억압에서 아무런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입장이 변했다. 심지어 가족 내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갖는 이점들이 실질적이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이런 식의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여성억압의 심각함을 과소평가하고 노동계급 내에서의 여성억압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단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문제나 노동자 문제에만 관심 있지, 여성 차별 문제를 무시하고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오해가 많다고 말하며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기존에 노동자연대가 고수해 온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배울 것

 

먼저 여성 억압과 차별을 분석하기 위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계승해야할 합리적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먼저 유물론적 접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켜나가는 초기부터 이것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실존 및 모든 역사의 첫 번째 전제, 역사를 만들 수 있기위해서는 인간이 살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확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그래서 이 욕구들의 충족을 위한 수단들의 창출, 물질적 생활 그 자체의 생산이며, 게다가 이는 모든 역사의 근본조건이다.

두 번째 전제는 충족된 최초의 욕구 자체, 즉 충족 행위 및 이미 획득되어 있는 충족의 도구는 새로운 욕구들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욕구의 창출이야말로 최초의 역사적 행위인 것이다.

그 세 번째 계기는 위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역사적 발전에 포함되는 것인데, 자신의 생활을 나날이 새롭게 만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고 번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즉 가족


물질적 생활을 위한 생산 활동과 인류의 번식이야말로 역사의 근본조건이라는 것이다. 말년의 엥겔스는 이것을 다시 강조했고, 생산력의 발전이 낳는 변화도 설명했다.

 

유물론적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생활 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 및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 조직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하나는 노동의 발전 단계에 의해, 다른 하나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의 발전이 미약할수록, 그 생산물의 양이 제한될수록, 따라서 사회의 부가 제한될수록 사회제도는 혈연적 유대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혈연적 유대에 기초한 이 사회구조 속에서도 노동생산성은 계속 증대된다. 이와 함께 사적소유 및 교환, 빈부의 차이,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이용 가능성이 생기며, 따라서 계급적 적대의 기초가 점차 형성된다


엥겔스는 이런 변화가 어떻게 계급 적대만이 아니라 여성 억압으로 이어졌는지 큰 그림을 그려냈다.

 

목축, 농업, 가내수공업 등 모든 부분에서 생산이 늘어나자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재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 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가축을 길들이고 다음에는 그것을 사육 관리했는 데, 이것은 남자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가축은 남자의 것이며, 가축과 교환해 얻은 상품과 노예들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이제 획득한 모든 잉여는 남자의 것이었다. 여자의 가사노동은 이제 남자의 생활필수품 획득에 비해 그 의미를 상실했다. 남자의 노동이 전부였고, 이제 여자의 가사노동은 보잘 것 없는 부차적인 것으로 변했다.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가족 내에서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모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모권 상속은 폐지되고, 부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 상속이 도입되었다.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신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따라서 엥겔스는 여성 억압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을 특히 강조했고, 누구보다 강력하게 비판했다.

 

개별 가족이란 문명기 초기에 계급으로 분열된 이후부터, 사회가 해결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었던 사회적 대립과 모순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또 여성이 가사·육아를 전담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도록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게 여성 해방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노동에만 종사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며, 또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이미 여기서 명백해진다.

 

물론 당시의 인류학적 성과에 바탕한 엥겔스의 주장은 오늘날 새로운 인류학적 발전에 따라서 보완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 주장의 기본적 줄기는 여전히 타당하다.


일부 사람들은 엥겔스가 생활 수단의 생산인간 그 자체의 생산을 구분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원론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계급 착취를 낳는 자본주의와 여성 억압을 낳는 가부장제라는 두 가지 생산양식에 맞선 각각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 나와있듯이 엥겔스는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역사의 근본조건이라고 전제한 뒤에 그것을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더구나 생산력 발전에 따라서 두 가지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결국 계급적 적대의 기초로 나아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생활수단과 인간(노동력)의 생산·재생산은 서로 칼같이 분리될 수 없다. 계급 사회에 대한 투쟁과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의 원인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투쟁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이 여성 차별 문제를 계급 문제로 환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항상 여성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트로츠키는 삶의 조건을 변혁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성의 눈을 통해 그 조건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더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에 맞서 앞장서 싸우는 것이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의 의무라는 것이다. 레닌도 그 점을 분명히 했다.

 

노동자들이 모든 종류의 압제·폭력·학대 어떤 계급이 당했건 간에 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더욱이 사회민주주의[혁명적 사회주의] 관점으로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될 수 없다.

 

레닌의 이런 관점은 러시아 혁명 후에도 계속됐고,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의식에서도 철저한 변화를 강조했다.

 

여성이 가사노동처럼 사소하고, 지루하고, 힘과 시간을 뺏기는 일에 진이 빠져 사기가 저하되고 지루해하며, 심장박동이 약해지고, 의지가 느슨해지는 것을 남성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흔한 광경보다 더 [여성억압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가 있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남편들이,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남편들조차도, 그들이 여성의 일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기만 한다면 아내들의 부담과 근심을 얼마나 많이 줄여 줄 수 있는지, 또는 완전히 해방시켜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은 남성의 특권과 위엄을 거스르는 일일 겁니다. 그들은 편안히 쉬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낡은 노예 소유주의 관점을 당과 대중 사이에서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합니다.

 

레닌의 동료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더 나아가 노동계급 내에서 서로의 고통과 상처를 공감하며 함께 해결하려는 자세를 강조했다.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는 동지애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연대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대한 자각뿐만 아니라 집합 구성원들의 지적이고 감성적인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사회체계가 연대와 협동에 의해 건설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랑과 따뜻한 감정을 지니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같은 계급내의 동료들이 가지는 고통과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민감함 그리고 집단에서 개인간의 관계가 가지는 의식을 통찰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독려해야 한다. 이런 모든 따뜻한 감정” - 감성, 연민, 공감 그리고 책임감 - 은 한 가지 원천에서 파생된다; 이것은 사랑의 좁은 의미에서의 성적인 무엇이 아니라 단어의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의 양상이다.

 

더 나아가 콜론타이는 이런 사랑이 결코 부차적이거나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뿌리깊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인류 발전의 각 단계들에서 사랑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화의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사랑을 사적인 문제라고 보는 부르주아들조차도 계급적인 관심사로 사랑을 연결시켜왔다. 노동계급 이데올로기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더욱 큰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데, 사랑은 다른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현상들처럼 집단적인 이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만의 사적인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한 집단에 가치 있는 요소들을 결합하게 해준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채워야 할 것

 

지금까지 봤듯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여성 억압의 물질적 토대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서 투쟁하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롭게 제기되는 물음과 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모든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할 전통이다. 더구나 그 전통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던 사람들과, 심지어 그 전통 자체도 결코 완전무결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들이 있어 왔다.

 

누구나 어떤 남성 맑스주의자가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와 같은 사소한골칫거리는 혁명 이후해결될 것이고, 따라서 그동안 우리 모두는 우리의 계급투쟁에 달라붙어 활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불행히도 남성 맑스주의자가 범한 성희롱 사건들은 과거나 현재의 모두 좌파 조직들에서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성희롱이 실제 범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성은 조직 안에서 기각되고, 침해받고, 제도적으로 제외되는 느낌을 열거해왔다.

 

이에 대해 흔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방어적 태도를 취해 왔다. ‘이것은 중상비방이며, 우리가 여성 억압에 맞서 얼마나 열심히 투쟁해 왔는지 아느냐는 답변이 이어지곤 했다.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좌파의 자랑스러운 역사도 제시된다.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게 나을텐데 말이다. 사실 그런 부족함은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다. 철저하게 여성 억압적인 이 체제와 사회에서 아무리 사회주의자와 혁명적 조직이라고 해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여성 억압의 물질적 토대를 분석하는 최상의 도구이지만, 여기에도 채울 점이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분석하듯이 자본주의에서 가치의 원천은 노동이다. 노동만이 생산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력 착취에 대해 철저한 분석을 제시해 왔다. 그런데,

 

만약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한다면, 노동력 자체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확실히 노동자들은 시장에 가서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준비가 된 건강한 상태로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 노동력(인간)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 대해서는 주목과 분석이 충분치 못해왔다. 크리스 하먼도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신체건강하고 기술이 좋은 노동자를 구할 때 겪는 문제는 사실상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야말로 여성 억압과 차별이 발생하는 핵심적인 근원지다. 자본가들은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 가족에 떠넘기고, 여성은 그 과정에서 가사·육아를 도맡게 되며 이것이 여성 억압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


이처럼 생활수단에서 자유로워진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지배계급이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떠넘기는 과정을 나는 자본주의 초기의 본원적·강탈적 축적의 연장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생산과정에서의 (계급) 착취를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의 (여성) 억압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경제적 토대의 규정성을 먼저 보는 유물론적 접근법과 무관치 않다. 생산 현장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착취가 우선적이고, 여기서 억압과 소외가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 억압의 기반인 자본주의 가족제도는 생산이 이뤄지는 경제적 토대가 아니라 상부구조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크리스 하먼은 가족이 토대가 아니라 상부구조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한다. 린지 저먼 또한 이런 분석에 따라서 억압에 맞선 투쟁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틀렸다고 본다. 경제적 토대에서 착취에 맞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투쟁하는 것에 대해 큰 강조점을 둔다.

 

비교적 강력한 노동자 집단이 투쟁에 성공하면, 그것은 다른 모든 노동자 집단의 투쟁에 자극이 된다. 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강한 집단이 주로 남성이고 약한 집단이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먼은 계급투쟁의 침체기였던 80년대의 시점에서 투쟁의 부활은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동계급의 핵심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봤다. 억압에 맞서는 투쟁의 운명 또한 이 투쟁의 성패에 달려있으므로, 사회주의자들은 그 운동을 향해 노동자 대중과 연대해 투쟁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요구를 쟁취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이런 주장은 분석의 우선성만이 아니라, 투쟁의 출발점, 투쟁의 중심성을 여성 억압보다 계급 착취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 접근법을 성맹’(sex-blind)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런 접근법과 상관있다.


그래서 일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측면을 보완하며 혁신하기 위한 시도들을 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이것을 우리는 여성주의적 질문들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답변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여성 억압을 규명하고 여성 해방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결함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을 계승하면서도 이런 약점을 보완하며 혁신을 이루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상품, 노동력, 사회적 관계의 생산과 재생산

 

사회재생산 이론이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 매우 유용해 보인다. 사회재생산 이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방법을 통해 재화, 서비스, 노동력, 사회적 관계 및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재생산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주장, 생산력 발전 속에 생겨난 잉여를 소수가 통제하고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서 배제돼 가사·육아를 주로 맡으면서 계급 적대와 여성 억압이 비롯됐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주로 여성이 가정에서 가사·육아를 통해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분석하려 한다.


이처럼 사회재생산 이론은 그동안 많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상품 생산과정보다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분석을 확장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통찰과 방법론을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조나선 닐은 사회재생산 이론을 단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발전시킨 이론이라고 보지 않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일부라고 규정한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린지 저먼 (Lindsay German), 크리스 하먼 (Chris Harman), 샤론 스미스 (Sharon Smith)등 여러 사람들이 국제사회주의자 (International Socialist - IS) 전통 내에서 발전시켜온 분석법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재생산 이론은 계급적 착취를 낳는 자본주의여성 억압을 낳는 가부장제라는 이원론적 접근과도 다르다. 노동력 재생산 과정을 상품 생산과정에 대한 분석과 통합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생산·재생산 과정을 모두 연결시켜서 종합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자본주의가 비록 불균등할지라도 재생산 영역과 생산 영역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단일(unitary) 체제라고 하는 점이다.

 

사실 이원론은 이론적으로도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의 단결보다 분리를 낳을 여지를 허용한다. 그 점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은 이원론보다 우월하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상품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계급 착취와 여성 억압, 착취에 맞선 투쟁과 억압에 맞선 투쟁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원론이라며 사회재생산 이론을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서 그런 구분들은 불가피하며, 문제는 그런 구분이 현실에 대한 파편화된 인식과 분리된 실천을 정당화하는 경우이다. 반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상품 생산과정 밖으로까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확장해서 현실에 대한 통합적 인식과 단결된 실천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다. 작업장 바깥과 노동력 재생산 과정 또한 분석이 필요하며 가능하다.

 

노동자 계급은 일터에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 노동자는 또한 자기 집에서 잠을 자고, 그녀의 아이들은 공원에서 놀고 지역의 학교에 간다. 그리고 때때로 그녀는 그녀의 은퇴한 어머니에게 요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을 재생산하는 주요 기능들은 일터 외부의 장소에서 일어난다.

 

이 과정은 좀 더 세분화된 접근과 분석이 가능하다.

 

노동력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상호 연관된 과정들에 의해 재생산된다.

1. 생산과정 외부에서 노동자들을 재생하고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 되돌아오게 하는 활동들에 의하여. 이것은 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도, 식량, 잠잘 침대를 포함하지만, 육체적으로 한 인간 전체를 유지시키는 돌봄도 포함한다.

2. 생산과정 외부에서 비노동자 즉 아이, 그리고 노령, 장애, 실업 등 여러 이유로 노동인구에서 빠진 성인들처럼 과거나 미래의 노동자인 사람들 를 유지, 재생하는 활동을 통하여.

3. 신규 노동자의 재생산을 통하여. 이것은 출산을 의미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노동자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토대 자체를 형성하지만, 체제에는 전혀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으며 가구와 공동체 내부의 여성과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사(육아) 노동은 이처럼 체제에는 전혀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으며 가구와 공동체 내부의 여성과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이 노동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그동안 가사노동을 별로 주목하지 않거나 부차적으로 보는 인식이 우세했다. ‘가사노동은 임노동이 아니라 무급 노동이자 비생산적 노동이며, 자본축적에 필수적이기 보다는 보조적이라는 주장들이 대표적이었다. 가사노동이 이뤄지는 가족은 자본주의에서 생산단위가 아니라 소비단위라는 전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왔다.


좀 더 깊은 노동가치이론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점들이 제기돼 왔다. 가사노동은 사용가치는 생산하지만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인 교환가치를 생산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구체적 유용 노동들을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측정해서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가사노동은 시장교환을 통해서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운동 진영 내에서 진행된 가사노동 논쟁과 근래 사회재생산 이론의 발전 속에 이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제기돼 왔다. 이에 힘입어 우리는 가사노동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혁신할 필요가 있다.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유로운 노동자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 노동자는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생산수단뿐 아니라 생활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수단들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력 상품을 팔려면 그것을 생산·재생산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명의 유지라고 지적했다. 노동력 상품의 가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에, 따라서 또 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하여 규정된다.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결국 이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 소유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노동자의 자녀들의 생활수단들일정한 훈련 또는 교육에 필요한 비용까지 포함시킨다. 특히 노동력의 가치 규정에는 역사적 및 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고 지적한다. 결국 노동력 상품은 노동력 소유자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훈련시켜야지만 재생산될 수 있고, 단지 물질적 요소들뿐 아니라 정신적 요소들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족에서 주로 여성이 가사(육아) 노동을 통해 제공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한 상품”, 즉 노동력 상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 점에서 가족이 소비단위일뿐 이라는 지적은 일면적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따라서 가족은 단지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아니라 경제적 토대이기도 하다.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들을 포함하는 것인데, 가족은 생산력의 핵심인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필수적 일부라는 점에서도 단순히 상부구조라고 보기 어렵다. 나아가 가사노동은 단지 자본 축적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자본 축적에 필수적인 노동이다


가사노동의 가치는 노동력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소요된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으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노동력 상품에 반영돼 있는 가사노동의 더 많은 가치는 결국 생산과정에서 그 노동력이 더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린지 저먼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하며,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를 낮춤으로써 자본계급에게 돌아가는 잉여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이고, “가사노동은 노동력을 직접 생산하는 것을 통해 잉여가치를 간접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일면적이다. 먼저 생산적 노동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통일돼 있지 않다. 마르크스 자신부터 이에 대해 모순된 진술을 했다. 마르크스는 한편으로 아담 스미스의 구별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무엇이 생산적인 가를 보려 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적 노동은 자본의 가변 부분과 교환되어, 자본의 이 가변 부분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까지 생산하는 임금노동을 의미한다.

 

반면, 가변자본이 아니라 임금이나 이윤과 직접 교환되는 하인과 국가 공무원 등의 노동은 비생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부적절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무기를 제조하는 사기업 노동자는 생산적 노동자로 구분되는 반면, 국가 공교육을 위해 일하는 교사는 비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개별 자본가의 이윤 획득에 기여한다는 점만 보면,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를 이전시킬뿐인 유통비용도 상인자본에게는 생산적이다.

 

상인에게 유통비용은 이윤의 원천으로 나타나며 그러므로 상인자본에게 유통비용 지출은 생산적 투자다.

 

반면 마르크스에게서 좀 더 다른 구분도 볼 수 있다고 크리스 하먼은 지적한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을 다른 맥락, 즉 자본주의 생산 전체에 우연적인가 필수적인가하는 맥락에서 다시 논의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생산과정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을 보려고 했다.

 

날이 갈수록 전반적 생산과정이 진정한 지렛대는 개별 노동자가 아니게 된다. 그 대신,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력과 전체 생산기구를 함께 구성하는 여러 경쟁하는 노동력들이 상품을 만드는 직접적 생산과정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다. 꾸준히 늘어나는 노동유형들의 수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직접적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결국, 자본주의 생산에 필수적이며 생산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일부라면 생산적 노동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즉 개별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느냐가 아니라 체제 전체에 이윤을 창출하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 적어도 간접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으로 구분하는 게 적절하다.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하는 가사노동은 자본축적에 필수적이며, 생산과정에 기여하는 사회적 노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고 확대될수록 보육, 교육, 복지, 의료 서비스를 단지 개별 가족에 맡기지 않고 자본가 단체와 국가가 직접 지원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왔다. 노동력을 공급·관리하는 문제가 자본 축적에 갈수록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에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다양한 임시방편들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임시방편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사적 자본가와 자선단체가 하던 임무를 국가가 떠맡아야 했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국가는 지난 70년간의 다양한 임시방편들을 연결해 실업자, 노인, 병자에게 최소한의 사회보장 혜택을 제공하는 전국적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노동력을 공급하고 훈련하고 재생산하는 국가의 구실은 20세기 내내 강화돼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장기호황 때 정점에 달했다가 그 후의 새로운 경제 위기 시대에도 유지됐다.

 

이런 사회복지에 드는 비용은 노동력 재생산에 지불되는 사회적 임금이라고 보는 게 옳다. 물론 이 사회적 임금은 임금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격렬한 계급투쟁의 성과로 얻어졌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위기에 직면하고 이윤이 쪼그라들면 임금을 삭감하듯이, ‘사회적 임금도 공격해 왔다.

 

국가는 한편으로는 가장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자기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국가의 복지 부문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임금을 공격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축적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이 원활해지도록 복지를 최대한 억제하고 삭감한다. 그래서 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자본가가 주는 임금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자본 축적에 필수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드는 수고와 비용을 노동계급 가족에게 떠넘기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이윤을 높이려는 시도는 일종의 강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제 노동계급 가족은 스스로 이런 서비스(보육, 돌봄, 간병 등)를 해결하거나, 이것을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게 됐다. 자본가들은 이에 필요한 비용을 절감하게 될 뿐 아니라 새로운 돈벌이 기회로도 삼을 수 있게 된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렇게 주장한다.

 

수년간의 어려운 계급투쟁을 통해서 획득된 공유재산적 권리들(국가연금, 복지, 그리고 국가의 의료보건에 대한 권리)의 사적 영역으로의 반전은 신자유주의적 정설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된 모든 강탈 정책에서 가장 괘씸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상황에서 노동력 재생산을 수행하는 노동계급 가족과 여성에게 체제가 가하는 압력들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가족, 노동력 재생산, 여성 억압과 차별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갈수록 격화되는 모순과 적대가 첨예하게 표출되는 공간이며 쟁점인 것이다.

 


억압과 차별에 대한 철저하고 일관된 반대

 

마르크스주의는 이처럼 변화해 온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혁신을 수행하고 투쟁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출발점은 먼저 여성 억압 등 모든 억압에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어느 계급이 영향을 받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압제, 억압, 폭력과 학대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레닌은 특히 억압에 대해서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대응하도록 개입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실에서 노동계급의 다수가 그런 관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중요하다.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억압과 차별에 무관심하거나 여성 차별적 편견을 받아들이고 남성 우월주의에 휘둘린다.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에 이것은 놀라울 게 없는 일이다. 반면 많은 여성들은 노동계급 남성들도 여성차별적 구조를 유지하는 것에 동조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W E B 뒤부아는 미국의 흑인 차별을 통해서, 이처럼 노동계급이 더 억압받는 집단과 덜 억압받는 집단으로 분열된 것의 효과를 분석했다.

 

백인 노동자 집단은 비록 낮은 임금을 받을지라도 일종의 공적이며 심리학적인 임금으로 보상받는다는 점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들은 백인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존중되고 경칭이 붙여진다. 그 결과는 흑인노동에 의한 직업 상실을 두려워하는 백인과 항상 백인노동으로 대체될 위협을 받고 있는 흑인, 양쪽 모두의 임금이 낮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서로의 이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는 두 개의 집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분열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대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 가지 방안은 노동자연대의 태도에서 봤듯이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동일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적은 남성이 아니라 지배계급이라고 설명하는 일도 반복된다. ‘페미니즘과 가부장제 이론 등 남성과 여성을 분리시키는 사상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항상 뒤따르곤 한다. 샤론 스미스는 이런 대응이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대응은] 노동계급 내에서의 성차별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라는 어려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여성 억압을 없애는 데 있어서의 남성의 객관적인 계급이해를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사실 동일한 이해관계문제는 단순치가 않다. 분명 우리는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이 이해관계가 달라서 단결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계급의 이해개인의 이해를 구분해야 하며, 덜 억압받는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갖는 상대적 이점도 봐야 한다.


예컨대 맞벌이 노동자 부부중에 남편은 퇴근후 집에서 TV를 보고 있고, 부인은 온갖 집안일을 하는 상황은 흔하다. 이 상황에서 전체로서 노동계급의 이해는 동일하고, 저 남성의 개인적 이득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변해야할까? ‘장차 혁명을 통해 함께 얻을 이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란 주장도, 이런 일을 겪는 여성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편의상 근본적 장기적 이해부차적 단기적 이해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은 지배계급에 맞서 단결할 근본적 이해를 공유한다. 하지만, 여성이 더 억압받는 현실에 타협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단기적 이해 대립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남성이 가족에서 가사·육아를 분담해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구체적 인식과 분석이 여성 억압과 그것에서 여성 노동자가 느끼는 정서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남성, 여성 노동자의 단결을 위한 더 효과적인 전술로 이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차별적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남녀 분리적 생각을 바꾸라고 강변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여성차별적 현실과 그것에 고통받는 여성에 대한 공감과 이해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 노동자들이 그런 여성차별적 현실에 앞장서 맞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 노동자들이 개인적·단기적·부차적이해가 아니라 계급적·장기적·근본적이해를 추구한다는 것을 현실의 실천에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럴 때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이 남성 지배의 공모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는 정치 투쟁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억압은 노동 계급을 분열시키고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전환자이든 아니든,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양성애자이든 모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싸움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억압에 대항하는 최고의 투사들로 보여져야 한다.

 

이 점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일치적으로 선긋기와 그 한계에 대한 비판보다는 공감과 방어가 돼야 한다.

 

지난 40 여 년간 페미니즘이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페미니즘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고 여성해방에 대한 방어로서 페미니즘을 원칙상 방어해야 한다.

 

대개 페미니즘은 계급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억압받는 집단의 처지와 목소리를 반영하는 사상과 운동이다. 신자유주의적 공격과 우파 집권이 계속돼 온 한국 사회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은 가속화돼 왔다. “개똥녀”, “된장녀”, “김치년으로 이어져 온 여성 비하는 근래 일베가 여성 혐오를 주된 쟁점으로 삼으면서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성차별적 사회와 우파에 맞서서 우선적으로 페미니즘을 방어하고, 억압에 맞서 그들이 발전시켜 온 구체적 분석에서 배우려고 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닫힌 체계가 아니며 어떤 사상과 이론에서도 합리적 핵심을 흡수해 그 자신을 더욱 풍부하게 강화시킬 수 있는 열린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상호교차성 이론에 주목한다. 이 이론은 노동계급 성원들이 직면하고 있는 억압의 [구체적] 특수성에 대해주목한다. 물론 상호교차성은 왜 억압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계급 착취가 어떻게 억압과 소외를 낳게 되는 지 분석해 왔다.


그런데 더 나아가 착취·억압·소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결합되는지, 착취·억압·소외의 구체적 양상들이 어떤 상이한 효과를 낳는지, 이런 구체적 양상들에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상호교차성 이론이 유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 형태의 억압이 다른 형태의 억압에 의해 규정되거나 또는 다른 형태의 억압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성차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또는 여성억압이 인종차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에서는 서로 다른 억압들을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상호교차성은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흑인 여성이 한 편으로는 성차별주의를 경험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성차별주의와는 별개인 인종차별주의를 경험한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흑인 여성이 겪는 성차별주의는 종종 그들의 피부색에 의해 규정되고, 그들이 겪는 인종주의는 그들의 성에 의해 규정된다.

 

이처럼 착취·억압·소외가 상호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구체성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계급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혼 이주여성이 겪는 억압과 소외, 조선족 가사도우미가 겪는 차별과 착취, 트랜스젠더 여성이 겪는 소외와 불평등 등은 각각 다르고 매우 구체적일 것이다. 레닌이 말했듯이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다.


이런 구체적 분석과 이해는 우리가 구체적 억압과 착취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고통·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과 접촉하며 더 효과적인 저항과 연대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될 것이다.


투쟁의 과제와 전술은 어떤 도식에 따라 자동 도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쟁의 과제와 전술은 무엇보다 대중의 정서와 감정에 들어맞아야 한다. 트로츠키도 혁명 지도부의 기예 가운데 10분의 9는 대중의 감정(mood)을 포착하는 법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불의와 부조리에 분노하며 그것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누구보다 잘 듣고 함께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피억압 민중 속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며, 강력한 단결과 저항을 건설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들이 처한 억압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관련지으려고 하는 건 좋은 시도이다. 상호교차성은 연대에 대한 호소이다. 억압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억압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편화가 아니다. 연대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연속되고 교차되는 사회변혁을 향하여

 

이를 위해서 또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과 좌파 진영 내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차별에 대해 민감하고 철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그것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자본주의가 가하고 만들어내는 온갖 압력과 편견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잘못을 범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노동운동과 좌파 진영 내에서도 성차별적 언행이 나타나고 성폭력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현실이다.


문제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체제의 억압·불의에 맞서 그토록 강력하고 헌신적으로 투쟁하던 사람들이, 막상 이런 일 에 민감하지 못하거나 문제 해결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일을 겪은 개인이 받은 고통과 상처보다 조직이 받을 타격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런 경우에 체제의 모순과 불의에 맞선 운동과 조직 속에서 희망을 찾던 사람들이 실망하고 냉소에 빠지게 된다. 노동운동과 좌파 진영에 신뢰를 잃고 멀어지게 된다. 불신과 분열 속에 운동과 조직이 약화되고 만다.


따라서 노동운동과 좌파 진영은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차별적 언행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철저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처를 어루만져 줘야 한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의 상처나 재발 가능성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대비와 조처를 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책임지고 함께 토론·평가하며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운동과 조직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샤론 스미스도 이 같은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볼셰비키적 전통에서 그것은, 모든 면에서의 혁명적 과정을 통해 혁명가들이 위로부터의 억압뿐 아니라 노동계급 내에서의 억압에도 맞서 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 있다. 만약 혁명가의 구실이 필수불가결하다면 우리는 노동계급 내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 있어 부딪히는 도전들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 기반해 여성해방을 위해 노동계급 전체의 힘을 모으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급 착취와 그것에 맞선 투쟁, 조직된 노동계급과 작업장에서의 투쟁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일면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물론 인간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도 우선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따라서 경제적 토대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 토대인 생산관계에서 어떻게 착취가 벌어지고, 계급 적대가 생겨나는지를 분석하는 것도 말이다. 이런 계급 적대와 생산에 대한 소수의 통제, 이윤을 위한 경쟁과 축적은 온갖 모순과 부조리, 억압과 소외를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계급 착취는 이 세계에 대한 분석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이런 분석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이 나아가야 할 대안과도 연결된다. 사회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직접 생산자들이 민주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계급과 착취가 사라지고 평범한 노동대중이 생산과 사회를 운영하게 될 것이다. 억압과 소외, 온갖 모순과 부조리들이 해결될 실마리도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계급 착취는 분석의 출발점이면서, 변혁의 대안을 모색할 때도 중요하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자본주의의 사슬이 벼려진 곳에서 반드시 이 사슬이 끊어져야 한다며 이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쟁점에서도, 투쟁의 고리로서도, 투쟁의 방식과 과제에서도 착취와 착취에 맞선 투쟁, 조직된 노동계급과 작업장에서의 투쟁이 좀 더 중요하거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할까? 억압에 맞선 투쟁과 미조직된 노동계급·피억압 민중의 투쟁, 작업장 밖에서의 투쟁은 어느정도 부차적이라는 것을 뜻할까?


많은 좌파들이 이렇게 주장해 왔다. 이윤이 만들어지는 곳은 작업장이고, 노동자들은 그것을 멈출 힘을 가지고 있고, 작업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으며, 그렇게 조직된 노동자들이 고유의 의제와 방식(파업 등)으로 행동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논리들이 이것을 뒷받침해 왔다. 물론 작업장 밖에서의 투쟁에 연대하고 정치적 요구들을 결합시킬 필요도 제기돼 왔지만 중심과 강조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경제적 토대에 대한 분석에서 거의 곧바로 정치적 과제와 전술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기계적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적 경제결정론의 대표적 사례는 제2인터내셔널의 특징이었다. 2인터내셔널의 카우츠키나 플레하노프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독일 등 선진국 노동자들이 가장 규모도 크고 잘 조직돼 있고, 주요 산업과 국가의 생산을 타격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영국과 다른 선진국들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러시아는 그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트로츠키는 훨씬 대담하게 사고하며 창조적 방향을 제시했다.

 

권력이 노동계급의 손으로 넘어가는 정확한 시간은 직접적으로는 생산력의 수준이 아니라 계급 투쟁에서 여러 관계들, 국제적 상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전통과 선제 주도력(이니셔티브)과 투쟁 각오 등의 수많은 주관적인 요인들에 달려 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생산의 후진성과 취약한 상부구조들을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로 봤고, 노동자가 인구의 소수이고 노동조합조차 충분히 등장하지 못한 러시아가 국제적 변혁의 출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나는 이런 연속혁명의 문제의식이 창조적으로 계승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치가 어디서 생산되고 있는가, 어느 부문의 노동자들이 가장 잘 조직돼 있거나 생산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가 등이 반드시 우선 고려사항이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쟁점에서도, 투쟁의 출발점과 고리로서도, 투쟁의 방식과 과제에서도 착취와 착취에 맞선 투쟁, 조직된 노동계급과 작업장에서의 투쟁이 반드시 가장 중요하거나 중심이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억압에 맞선 투쟁과 미조직된 노동계급·피억압 민중의 투쟁, 작업장 밖에서의 투쟁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며, 심지어 더 중요하고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안토니오 그람시의 주장에서 이미 비슷한 통찰을 볼 수 있다.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인다...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투쟁만을 과학적으로예측할 수 있을 뿐이지 지속적인 운동 속에서 대립되는 세력들의 결과일 수밖에 없는 투쟁의 구체적 계기들을 예측할 수는 없다.

 

오늘날 조나선 닐과 티티 바타차리아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어디서 투쟁이 시작될지, 무엇이 계급 투쟁의 중심 고리가 될 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생산 영역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중요하다는 점도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디서 투쟁이 시작될까? 누구도 모른다. 어쩌면 공무원 노동자, 어쩌면 패스트푸드 노동자, 쇼핑몰 노동자, 콜센터. 어쩌면 대학 강사들이 될 수도 있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결정적 전투가 시작되면, 역사가들은 왜 바로 거기서 시작됐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노동자계급 역사의 주요 투쟁들 중 일부는 생산 영역 외부에서 시작하였다. 근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두 혁명인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여성이 이끄는 식량 소요로 시작하였다. 자본주의를 사회적 재생산이 생산에 비계를 놓는 통합적 체제로서 이해하는 것은 투사들이 각 영역에서의 정치 투쟁의 의의와 이를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미리 정해진 중요하고 중심적인 부문과 투쟁이라는 도식을 움켜쥐고 있지 말아야 한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수행하면서 투쟁 속에서 대화하고 배우려고 해야 한다. 억압과 모순이 중첩된 부문에서 투쟁이 먼저 시작되고 그것이 이 체제의 약한 고리가 될 가능성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며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적대와 모순이 상호교차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에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투쟁과 쟁점들을 결합시키고 연결시켜야 한다.

 

맑스주의 혁명가들인 우리의 해결책은 단지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경제의 투쟁과 그것 외부의 투쟁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임금을 위해 싸우는 조직들(예를 들어 우리의 노동조합들) 속에서 재생산 정의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성차별주의,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조직들 속에서, 우리가 임금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캠퍼스와 거리에서 이 연결을 만드는 감당할 수 없는 여성과 남성의 한 세대를 필요로 한다.

 

투쟁과 쟁점을 연결시킨다는 것은 투쟁과 쟁점의 분리, 단절이 아니라 그것의 연속과 교차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결국, 체제의 모순이 낳은 작은 전투들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더 커다란 전쟁으로 이어가고 확대시킨다는 뜻이다.


그러한 사회변혁은 레닌이 말했듯이 무엇보다 피억압자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착취, 억압, 소외에 상처받고 고통받아 온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들은 그 투쟁 속에서 오랜 동안 억눌려온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킬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를 연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일뿐 아니라, 착취와 억압과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교차시키며 해결해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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