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린디스판 (Nancy Lindisfarne), 조너선 닐(Jonathan Neal)
번역: 박상우
낸시 린디스판 (Nancy Lindisfarne)과 조너선 닐(Jonathan Neal)이 사회재생산 이론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콜린 윌슨(Colin Wilson)이 반박했고, 이제 다시 낸시와 닐이 재반박을 하며 논쟁을 이어간다. 이것은 여성 억압의 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이다.
낸시와 조나선의 첫 글: http://rreload.tistory.com/152
콜린 윌슨의 반박: http://rreload.tistory.com/160
콜린에 대한 우리의 답변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선, RS21(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 내에 젠더에 대한 입장에 크게 세 부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유용하다. 우리는 RS21 내에서 이 세가지 접근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하나의 노선으로 합쳐지는 것보다 더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겹치는 부분이 많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통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입장은 ‘상호교차성에 기반한 여성주의’ (intersectional feminism)이다. 이는 1970년대 젠더와 인종, 계급을 연결하던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접근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두 번째는 우리가 취하는 접근 방식이다. 세 번째는 콜린이 지지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재생산 이론’ (social reproduction theory)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맑스주의 내에서 최근에 생긴 입장으로, 이는 무급 가사 노동의 핵심적 중요성에 주목한다. 1970년대 올리비아 해리스(Olivia Harris)와 케이트 영 (Kate Young) 같은 맑스주의적 여성주의자들로부터 시작하여, 1980년 초반에 국제 사회주의 경향 내에서 린지 저먼과 크리스 하먼에 의해 (현실에 맞게 조금) 수정되었다. 이 입장은 그 이전 시기 IS의 맑스주의나 콜론타이, 제트킨, 맑스, 엥겔스 또는 클리프의 젠더에 대한 다양한 맑스주의적 접근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재생산’ 이론의 의미는 이제 변하고 있다. 2014년 10월에 런던에서 열린 역사유물론 학술대회에서 사람들은 수 퍼거슨 (Sue Ferguson)과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의 생각을 따랐다.
그들은 ‘사회재생산’을 여성과 남성에 의한 임금노동과 무급 노동, 그리고 기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어느 사회에서나 다 필요한 노동자와 사회 관계의 재생산에 주목하는 것으로써 사용하고 있다. 이 두번째 의미는 우리가 보기에 별 문제가 없고, 맑스주의자들과 주류 사회학자들에게도 수용될 만 하다.
콜린은 우리의 입장을 맑스주의와 사회재생산 이론에 대립 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하먼과 저먼 버전의 사회재생산 이론에 우리가 반대하는 지점들에 대한 긴 글을 작성하였다. 여기서 그 주장들을 반복하기보다는 콜린이 강조하는 추가적인 차이점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논쟁의 요지를 논하기에 전에 먼저 우리 사이의 네 가지 차이점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계급과 이데올로기
첫 번째 논점은 이데올로기와 계급 불평등에 관한 것이다. 콜린은 계급 차이가 자의적이고 명백하게 기만적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바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공통된 인간성 때문에, 현재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이 거기에 있어야 할 자동적인, 또는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나아가 사실 지배계급 자체가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형식적 절차를 이용하고, 거리두기를 하면서,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먹고, 싸고, 방귀뀌고, 섹스하고, 죽는다는 것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계급 지배의 불평등을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콜린의 주장에 우리도 동의 한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왜 그러한가이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모든 맑스주의적 분석의 핵심 질문이다. 우리가 찾은 답은 젠더 불평등을 수용하는 것이 다른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기 위한 핵심적 단계라는 것이다.
일상적 체화와 물질적 필요
두 번째 의견 차이의 논점은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공적(public)’인 것과 ‘사적(private)’인 것의 개념에 대한 콜린의 비평에서 기인한다. 그는 우리가 분석에서 이 분류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이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대신 우리는 ‘인티머시 (intimacy: 친밀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 구조적인 계급 불평등이 비단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친밀한 사생활의 매 순간에까지, 계급 사회에서의 경험 전체에 침투하고 스며들었는지 긴 글을 통해 설명하였다.
따라서, 계급 불평등은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고, 먹을 것과 쉴 곳을 나눌 때, 아이와 포옹하거나 연인과 사랑을 나눌 때에도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계급을 체화하며, 우리 집의 온기와 우리가 입는 옷에서도 계급을 체화한다. 우리의 치수, 건강, 수명이 모두 계급 불평등으로 특징 지어진다.
지배 계급의 젠더 관계 재구성
세 번째로, 콜린은 우리들 간의 중요한 또 하나의 차이에 주목한다. 우리는 지배 계급이 그들의 이해를 위해 젠더를 통제하고 관리한다고 생각하고, 이는 그들의 변화하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대응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콜린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배계급이 다만 성차별주의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배 계급이 다양한 대중을 대상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통시키고 젠더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틀에 맞추고 변화시키려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콜린이 비평하는 우리의 논문 <젠더의 역할>은 ISJ 139호에 실렸다. 그 논문의 두번째 부분은 ISJ 웹사이트에서만 볼 수 있다. 전체 논문의 수정 버전은 나중에 rs21 웹사이트에 공개되었다. 두 논문 모두, 미국의 지배 계급이 젠더에 대한 대중적 관념을 그들이 좋아하는 신자유주의 형식에 맞게 변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들을 하였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성을 임금 노동으로 내모는 압력과 낙태권을 둘러 싼 투쟁,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의학적 접근과 치료, HIV/에이즈에 대한 투쟁 등이 이러한 사회적 변화 너머의 계급 투쟁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논의한 영역들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의 내용들이 변화하는 정치 경제와의 관련 속에서 어떻게 젠더 관계를 재구성하는가이다.
우리가 더 최근에 작성한 <성폭력과 계급 불평등> (Sexual Violence and Class Inequality)에서는 지난 삼십 년 간 아동 학대를 두고 벌어진 이념 투쟁을 추적하였다. 이것이 복잡한 문제이고 지배 계급이 절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문제라는 콜린의 생각에는 우리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야 밝혀지고 있는 성적 학대에 대한 은폐 공작들은 지배 계급이 최선을 다해서 (이 싸움에서) 이기려고 한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그들이 모든 패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군림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역사
콜린은 또 다른 의견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가족 안에서의 무급 가사 노동과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가들 사이의 연관을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 억압의 핵심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왜 젠더 불평등은 모든 계급 사회에 존재하는가?
결국에 자본주의는 수십, 수백 개의 계급 사회의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계급 사회는 약 8,000년간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는 그 중 고작 250년에서 400년간 존재해 왔다. 가족 내 무급 가사 노동이 모든 계급 사회에서의 젠더 불평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콜린과 우리의 생각이 같다.
그러나 그는 중점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더 큰 역사적 질문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젠더 불평등에 대해 한 가지 원인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다른 모든 계급 사회에는 다른 원인이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들을 검토할 때는, 콜린의 관심은 가사 노동으로부터 사유재산의 핵심적 중요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계급 사회에서의 젠더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너무 멀리 간 나머지 노동자들은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는 가족이 사라지고 있다고까지 하였다.
콜린은 이 접근을 봉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재산 상속에서의 성적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문제는 그가 역사를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묘사한 중세 농노는 허구이다. 그의 봉건주의는 단일한 영국식 버전이다. 게다가, 봉건주의는 어떻게 이해되든 간에 계급 사회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콜린은 순결에 대한 미사여구와 지배적인 계급 이데올로기에서의 순결의 위치에 대해 액면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세계의 문학과 계급 사회의 역사를 보면 공인된 성관계와 그렇지 않은 성관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복잡한 작용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계급 사회에서 많은 피지배 계층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이 여전히 그러는 것처럼 혼전 성관계와 혼외 성관계를 가져왔다.
맺음말
우리의 접근은 전적으로 유물론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이고 그래서 아마 놀라울 것이다. 콜린의 답변을 읽으면서, 우리들 사이에 근본적인 감성적 차이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노동에 대한 계급 관계가 우리 논쟁의 핵심이지만, 우리는 또한 성과 사랑의 물질적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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