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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자본을 통한 삶의 재생산 - 가치의 관련성 2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3. 6.

페드로 M. 레이-아라우조PEDRO M. REY-ARAÚJO

번역: 두 견

이 글의 필자인 페드로 M. 레이-아라우조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이다. 그는 현재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신진대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시간성에 대한 가치 형식 읽기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주의 다시 생각하기>, <뉴 레프트 리뷰> 등의 저널에 게재되었다. 저서로는 『자본주의, 제도, 사회 질서』가 있다. 두 번에 나누어서 연재한다. 이 글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다.

출처: https://spectrejournal.com/reproducing-life-through-capital/

1편에서 이어짐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재생산이 주로 자본주의적 형태를 채택하는 사회이다. 처음에는 이윤 확보를 기대하며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은 사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활동이 결국에는 실제로 사회의 분업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상품이 실제로 시장에서 판매되는 항상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후에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은 그 정의상 다른 사람에게 유용해야 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수요를 찾지 못하면 상품 생산에 투입된 모든 노동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이 포괄하는 활동은 지속적인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과제와 활동의 총체를 소진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무수히 많은 다른 활동들이 시장 메커니즘이 아닌 직접적인 개인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저녁을 직접 요리하거나 이틀에 한번 조카를 학교에 데려다 주거나 부모님의 옷을 세탁하는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활동은 즉시 사회적으로 유용하며, 이를 위해 시장을 통한 우회가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활동은 처음부터 특정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도록 보장되어 있다. 완전히 쓸모없게 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요컨대, 자본에 포섭되는 활동, 즉 처음부터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은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배치되어야 하는 전체 작업의 집합체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더 중요하거나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을까?

가치"는 왜 중요한가?

어떤 노동 행위가 '가치'를 생산하고 어떤 노동 행위가 비생산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필수불가결한 이론적인 여담도 아니고, 정치적 중요성이나 인간 삶에 대한 본질성을 나타내는 지표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형태와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모든 노동 행위의 필수 전제인 사회적 필요의 궁극적 충족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사회적 신진대사에 대한 자본주의적 매개는 내부적으로 균열되어 있다.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모든 노동 관행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한편으로, 처음에 교환을 목적으로 하고 자본에 의해 포섭된 노동은 그것이 구체화된 상품이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판매되는 한 사회 전체 노동의 일부로서만 사회적으로 유효성을 인정받는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측정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생산성에 대한 사회적 기준,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 이것은 전부 아니면 전무 시나리오이다. 포괄된 관행이 생산성 표준을 준수하는 경우에는 판매되어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아 생산자가 전체로서 사회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수요를 찾지 못해 쓸모없게 되고 생산자는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반면에 무수히 많은 다른 노동 활동은 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필요와의 관계는 시장이 아닌 직접적인 개인적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유용성에 대한 시장의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의 기준은 단순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 행위가 가치 생산적인지 비생산적인지는 그것이 사회적 삶의 재생산에 더 필수적인지 덜 필수적인지와 관계가 없고, 가정과 일터를 대립시키는 것과 같은 어떤 선험적인 영역 구분이나 다른 유형의 활동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생산적 활동과 비생산적 활동의 구분은 항상 그것이 어떤 사회적 형태와 관련되어 있는지, 사회적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키는지, 더 나아가 이러한 활동이 거쳐야 하는 시간적 결정의 핵심적인 차이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은 항상 구체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우발적이며, 역동적이며, 항상 변화할 수 있다.

무급 가사노동이나 가족 내 돌봄 제공과 같은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활동은 (몇몇 자율주의적 시각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 영역의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형식을 취하는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후자의 가능성을 위한 단순한 배경 조건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사회적 신진대사의 집단적 매개의 일부이자 꾸러미이다. 이러한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활동은 여전히 상품에 의해 매개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무급 노동의 가능성을 조건으로 한다.

또한,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기, 기간 및 조건은 (적어도 일부) 가족 구성원이 유급 고용에 참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강력하게 제약을 받는다. 이러한 활동의 실제 내용은 현재 또는 미래에 자본주의적 노동 시장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고려하지 않고 결정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거의 틀립없이 가장 소중한 행위인 자녀 양육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다. 물론 자녀 양육에 필요한 많은 물품은 돈을 지불해야만 상품으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 시장 참여는 이러한 삶을 만드는 실천의 필수 조건이 된다.

또한 자녀 양육은 자녀 또는 부모가 선택한 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근무 시간으로 인해 남은 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자녀의 미래 고용 가능성이 자녀가 받을 양육에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녀 또는 부모가 스스로 선택한 내용으로 자녀 양육이 이루어질 수도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사회적 신진대사의 집단적 중개에 참여하는 나머지 활동 사이에 엄격한 차이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그 발생 조건이 자본에 의해 지배되기에 그 모든 활동이 자본에 의해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자본의 지배를 받는 것과 실제로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요리 활동을 생각해 보자. 내가 식당을 열면 내 요리는 자본주의적 형태를 취하게 되고, 따라서 내가 생산한 음식의 판매를 통해 그 대가를 검증받아야 한다. 내 제품이 판매되기 위해서는 생산성 측면에서 시장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고, 그것에 따라서 내 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경쟁자를 이겨서 돈으로 보상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쏟은 모든 노동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더 많거나 적은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고, 더 많거나 적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고, 더 능숙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요리의 질은 그에 따라서 분명히 달라질 것이고, 가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정도도 그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에는 경쟁자를 이기고 그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거나 내가 쏟은 노력을 모두 잃는 '전부 아니면 전무' 시나리오에 직면한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내 활동이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정도가 문제이다. 내 가족은 맛이 있던 없던 간에 음식을 먹을 수 있겠지만 내 요리 행위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위협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이 자본에 포섭되면서 그들의 사회적 형태는 예측할 수도 지배할 수도 없는 사회적 힘에 반응하도록 강요받고, 따라서 사회적 욕구의 직접적인 충족이 아니라 가치의 무한한 축적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추상화 체계로 스스로 따라가게 된다. 자본의 자기 참조적 활동은 자신의 회계 체계에 통합되지 않는 모든 것을 무시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은 상관하지 않는다.

자본의 폐지를 향해

요약하자면, 인간 존재의 초역사적 조건은 인간과 환경 사이의 신진대사적 관계를 집단적으로 매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집단적 매개가 내부적으로 균열되어 있다. 이 집단적 매개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필수적 전제조건이지만, 사회적 욕구의 세계와의 관계는 서로 다르다.

일부 활동은 사전에 결정된 직접적인 개인적 관계에 의해 특정한 사회적 필요와 연관되어 있다: 가족이 배고파서 식사를 준비하고, 옷이 찢어져서 수선하고, 파트너가 아파서 돌보는 등의 활동이다. 그 발생 조건은 다른 영향에 의해 과도하게 결정될 수 있다:

그들의 시간은 방해받거나 왜곡되거나 제약을 받거나 압박을 받을 수 있다; 품질이 더 좋거나 나쁠 수 있으며, 욕구의 만족도가 어느 정도 더 많거나 적게 충족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유용성은 정도의 문제일 것이다.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거의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다른 활동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본에 종속된 이들에게 사회적 필요를 충족한다는 것은 단지 전제 조건일 뿐이다. 그 대가로 이익을 얻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진정한 동기이다. 특정한 사회적 필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러한 노동 행위는 상품이라는 외피를 쓰고 소외되고 대상화된 형태로 서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판매되고 사회적으로 보상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시장 생산성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상품은 쓰레기가 될 것이다. 시장에서 경쟁 결과의 끊임없는 불확실성과 다른 생산자들과의 쉴새없는 경쟁은 노동을 더 오래, 더 강하게 하고 더 빠르고 더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가차없이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욕구가 아닌 자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자본에 포섭된 활동의 특수성은 그것이 더 본질적이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자기 참조적 추상 시스템으로 자율화돼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시장을 통해 최종적으로 유용성이 검증될지 여부에 대해 항상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형태에서 배타적으로 비롯한 생산 기술을 더욱 확장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강박은 다른 모든 비포섭적 활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활동이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재생산과 그에 수반되는 폭력, 불평등, 생태 파괴적 영향에 덜 연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본의 '타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내부에 있다. 삶을 만들어내는 활동으로 무비판적으로 '가치화'하기보다는 착취적이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총체의 일부이자 꾸러미로 비판해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재생산되는 것은 추상적인 인간의 삶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밀착된 삶이다. 우리 자신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연루될 수밖에 없다. 상품화되지 않은 노동을 가치 있게 여기거나 보호하거나 존엄하게 여길 수는 없다. 오직 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을 폐지하고 이를 집단적이고 포괄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적 재생산 통제로 대체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폐지는 분명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멸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기사 등록 20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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