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M. 레이-아라우조PEDRO M. REY-ARAÚJO
번역: 두 견
이 글의 필자인 페드로 M. 레이-아라우조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이다. 그는 현재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신진대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시간성에 대한 가치 형식 읽기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주의 다시 생각하기>, <뉴 레프트 리뷰> 등의 저널에 게재되었다. 저서로는 『자본주의, 제도, 사회 질서』가 있다. 두 번에 나누어서 연재한다. 이 글은 첫 번째이다.
출처: https://spectrejournal.com/reproducing-life-through-capital/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전통은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괴롭혀온 암묵적인 남성 중심주의와 경제학적 편견에 성공적으로 도전해왔다. 이는 시장에 의해 완전히 매개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와 그 구성원을 유지하는 데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도로 젠더화되고 인종화되고 저평가된 광범위한 관행의 존재를 밝혀냄으로써 그렇게 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삶을 만드는' 관행이 보이지 않게 되고 평가절하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전통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종종 '생산적' 자본주의 경제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을 비판 없이 옹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삶의 재생산이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완전히 파괴적인 사회의 재생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에게 절제와 책임의 가치를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는 미래의 직장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녀의 미래 고용 가능성을 신경쓸 수밖에 없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는 동시에 기존 질서의 붕괴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들의 정직한 동기와 선의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된 다양한 폭력의 재생산과 밀접한 공모 관계를 피할 수 없다. 사회적 재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한, 인간 삶의 재생산과 자본의 재생산은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자 꾸러미이다.
따라서 지켜야 할 핵심적인 구분은 생산적 영역과 재생산적 영역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생산적 관행과 비생산적 관행 사이의 구분이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치에 대한 서로 다른 관계는 본질적인 정도가 다르다기보다는 사회적 필요의 세계와는 다른 관계, 더 나아가 뚜렷한 시간적 결정을 나타낸다. 결국 두 가지 관행은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재생산에 똑같이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재생산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 분석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부여되는 지배적인 의미는 일반적으로 노동력 또는 삶 자체의 재생산으로 한정되지만, 사회 전체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넓게 읽는 것이 마르크스의 작업에 더 부합한다. 우선, 사회적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그 자체가 재생산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재생산은 인간 존재의 초역사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다. 다른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비인간적 자연과 에너지와 물질을 지속적이고 역동적으로 교환해야 하며, 마르크스는 이 과정에 대해서 신진대사metabolism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사회적 관계에 의한 사회적 신진대사의 중개는 사회적 존재의 필수 조건이지만,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형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두 가지 핵심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인간 집단의 재생산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첫째, 충족되어야 할 욕구가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만큼, 지속적인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완수해야 하는 다양한 업무에 제한된 시간과 물리적 자원을 배분하는 노동의 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용한 노동 자원을 충족해야 할 사회적 필요에 따라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배분하지 못하면 사회의 재생산이 손상될 수 있다. 둘째,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분업의 결과물은 반드시 개인에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 구성원의 개인적 재생산이 손상될 수 있다. 이러한 배분의 실패는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재생산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노동의 분배와 그 생산물의 분배가 존재한다. 이는 인간과 환경 사이의 신진대사를 매개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반드시 명시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요건이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재생산은 무한히 다양한 형태를 채택할 수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뚜렷한 자본주의적 '형태'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 채택한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 즉 초역사적 인간 본성에 근거하지도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적 출현이 필연적이지도 않은 형태를 나타낸다. 자본주의적 사회의 재생산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만 시장이나 화폐, 임금 노동, 심지어 특정 형태의 자본도 자본주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토지나 노동 수단과 같이 개인과 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사이의 급진적이고 일반화된 분리, 즉 포괄적인 소유권 박탈의 상황이다. 전자에 대한 접근성이 결여된 개인은 자신의 처분할 수 있는 재산, 즉 노동력이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만 남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는 대가로 자신의 시간을 팔아야 하며, 이를 통해 개인의 재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고자 한다. 자본가의 명령에 따라 노동자가 직접 생산한 것을 상품으로 포장하여 획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생산을 계속 담당하지만, 우회로를 통해서만 자신의 노동의 산물에 접근할 수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특정한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할 때 미리 정해진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생산된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판매하여 교환 속에서 그 대가로 이윤을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노동자와 재생산 수단 간의 분리가 포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사용가치 중 상당수가 미리 정해진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용가치가 아니라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생산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즉, 그것들은 점점 더 상품의 성격을 띠게 된다. 더 나아가 전체 사회적 노동에서 임금 노동, 즉 타인에게 판매되는 노동 시간으로 실행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이렇게 썼다: “생산에 자본주의적 형태가 있다면 재생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은 무엇으로 구성될까? 사회적 재생산을 확보하는 자본주의적 형태는 특정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무수한 개별 행위로 구성된다. 이러한 행위는 서로 독립적으로, 그리고 조정 없이 수행된다. 이들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동기는, 그것이 항상 필요 조건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그들의 제품을 판매하여 금전적 이윤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하는 수익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즉 타인을 위한 생산은 항상 도박이다. 상품이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판매될 때만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행위가 실제로 누군가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분업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 대가로 기업주는 화폐를 통해 사회적 총생산물의 분배에 참여하게 되고, 따라서 사회적 총생산의 일부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에서 구체적인 노동 행위는 앞서 언급한 노동 행위가 객관화된 상품이, 시장에서 화폐(일반적 등가물)와 교환하여 성공적으로 판매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경우에만 추상적 노동으로서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무정부적이고 조정되지 않은 생산 방식은 어떻게 사회적 재생산의 두 가지 핵심 요건, 즉 노동 분업과 그에 따른 결과물의 분배를 제공할 수 있을까? 명시적인 조정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재생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사회적 재생산의 초역사적 내용이 이처럼 명백히 비합리적인 형태를 채택할 수 있을까?
분명히 말하자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고, 누가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권한과 책임은 어떻게 인구 전체에 분배되는가? 사회적 신진대사의 매개가 점점 더 자본주의적 형태를 띠게 되면서, 즉 어떤 특정한 사전에 결정된 필요를 직접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그 대가로 이윤을 창출하는 사용가치가 점점 더 많이 생산되면서,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에 대한 규칙성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생산자는 시장에서 비록 소외되고 상품화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각자의 노동 행위의 결과물을 상품으로서 나타내면서, 간접적으로 관계 맺게 된다. 마르크스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생산자들은 서로 다른 상품을 동등한 가치로 교환함으로써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을 인간의 노동으로 동일시한다.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업은 가격의 변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규제되며, 이는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노동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시장에서 사물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노동 행위의 산물 간의 관계에 의해 매개되는 직접 생산자 간의 관계일 뿐이다. 따라서 가치 법칙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형태를 채택할 때 사회적 분업의 규제력이며, 아이작 루빈(Isaak I. Rubin)의 말을 빌리면 “사회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노동 과정의 이동을 전달하여 사회를 전체적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전달 벨트”이다.
그러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물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미리 알 수 없다. 시장에서 상품이 판매되어야만 노동 행위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검증되고, 따라서 사회 전체적 노동의 일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생산자는 일정 금액을 대가로 받음으로써 사회 전체 생산량의 일정 비율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 실제 범위는 나중에 주머니에 들어오는 일반 등가물(돈)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두 가지 핵심적인 초역사적 요건이 충족되는 것은 가치 법칙의 작동을 통해서이다. 사회적 신진대사를 매개하는 분업을 통한 사용 가치의 집단적 생산과 이러한 유용한 대상의 분배는 다양한 형태의 끊임없는 가치 이동과 이러한 이동이 가져오는 가격 변동에 의해 동시에 즉석화된다.
가치의 순환은 사회적 삶의 재생산을 매개한다. 따라서 사회적 삶의 재생산은 가치 순환의 재생산에 의해 조건화되고 종속된다. 후자의 지속적인 재생산은 전자의 필수적인 결과이자 전자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요컨대, 사회적 삶은 자본에도 불구하고나, 아니면 자본의 뒤에서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자본을 통해 재생산된다.
(기사 등록 202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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