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기고] 노동자연대에게 바란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물어 줄 수 없겠는가?
[지난번에 진보정당의 분열과 위기에 대한 성찰적 글을 보내주었고 많은 좋은 글들을 번역해주던 박상우 씨가 이번에는 노동자연대가 연관돼 있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의견을 보내 왔다. 큰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 글이 모쪼록 이 사안에 대한 진전된 논의와 조속한 해결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논쟁에 말려드는 것보다 훨씬 더 보람있고 흥미로운 일들은 많이있다. 따라서 나는 오늘 성폭력 개념 확장에 대한 논쟁이나 여성억압과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급진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언어관으로 살펴본 ‘성폭력 2차 가해’라는 용어의 타당성 등에 대한 논쟁에 건조한 글 한편을 더 첨가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에 이 모든 논쟁의 과정 한가운데 서서 숱한 사건을 자신의 삶으로 경험하고 맨몸으로 비난과 야유를 감당해야 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강간이건, 성추행이건, 성희롱이건, 성적 농담이건간에 어떤 여성이 누군가를 이러한 혐의로 고발하고 사건을 공론화하였을 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일차적인 반응이 해당 여성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2013년 트위터에서 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트렸던 인권운동가 고은태 교수의 성희롱 사건에서도, “저는 당시 상대방도 그런 대화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라는 가해자의 변명이 빠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폭로 여성이 과거에 작성한 성적 묘사가 담긴 트윗글들을 “혐오스러운 트윗들 …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상상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다”라며 퍼나르고는 “피해자가 … 리버럴하며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리트윗했다던 고종석 작가와 같은 행동들이 있었다. 이는 전형적인 피해 여성에게 책임 덧씌우기였다.
고종석 작가의 의도가 통하였던지, 피해 여성에 대한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이 삽시간에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너도 즐기기 않았으냐?’, ‘평소에 섹드립 졸라 치고 웬 순진한 척’, ‘문제 제기는 네가 이러는 거 불쾌하다라고 하는 수준이면 됐다. 왜 폭로했는지 의문’, ‘문자나 카톡 등으로 거절하지 않고 왜 폭로라는 방법을 선택했나’, ‘피해자의 과거 트윗을 보면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이라 꽃뱀일 가능성도 있다’ ….
인권운동판의 일부 인사들 중에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고은태 관련 기사를 작성하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바로 이때부터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전 이사장인 고은태 교수의 성희롱 파문이, 고은태 교수와 피해 여성 사이에서 발생한 성적 가해를 넘어서는 문제로 심화되고, 다른 성격의 폭력으로 질적 변화를 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뻘의 인권위 유명인사로부터 음란한 메세지와 굴욕적인 행위를 요구받으면서도 힘을 내며 자존감을 지켜왔던 여성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던 순간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성희롱은 분명 모욕적인 경험이었으나 그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가해자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가해자로부터 사과와 반성을 얻어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면 그녀가 자신을 회복하는 일은 가능하였었다.
그러나 고종석 작가로부터 시작된 불특정 다수로부터의 비방은 완전히 다른,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바로 피해 여성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그녀의 자아가 폭력적으로 침탈당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당사자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 일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그녀를 알지도 못하였었다. 그런데도 폭로가 발생하자 주저없이 피해 여성을 비난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성희롱 사건이라는 계기를 통해 발현된 각자 본래 가지고 있던 편견과 왜곡된 판단과 모든 인식적 오류를 온전히 피해 여성에게 투사시켰다.
사실 비난이 아니었다. 각자의 비틀린 가치관을 여과없이 스스로 폭로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성희롱 사건이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공격성을 표출할 적당한 빌미만 제공한다면 누구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예의 그 편견과 왜곡된 사고방식이 드러났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로부터의 비난 속에서 이제 성희롱 사건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그녀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가치는 부정되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녀는 파편화되었고 ‘성희록 폭로 여성’이라는 일면으로만 인식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전인격적이고 변화발전하는 존재로부터 소외시켰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사람들이 결정해주었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물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하고 통제할 능력은 빼앗겼다. 그렇게 문제는 질적으로 변하였고, 바로 이것이 그녀가 소리를 지르고 고통을 호소하던 본질적인 이유였다.
소위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소동과 논쟁들이 3년이 지나도록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이 문제를 성폭력으로 바라보는 것은 피상적 접근에 불과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노동자연대가 이 사건을 ‘비방’이라고 정의하면서 아직도 성폭력 개념 문제에 대한 논쟁이나 극좌파 운동 조직에 대한 정치적 음해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피해 여성이 성폭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성희롱이나 성적 공격, 또는 여성 차별적 언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로 곪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또는 이 사건이 (노동자연대의 분류에 따른) 몇몇 “종파” 조직들이 노동자연대를 정치적으로 음해하기 위해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면 피해 여성이 당한 성적 모멸감은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이 사건의 성격은 피해자가 처음 문제제기를 하였을 때 다수의 사람들(다함께 소속이거나 소속이었던)이 그녀의 사생활, 인격, 과거 행적, 언행, 기존에 작성했던 글의 내용, 연애사, 심리 상태 등을 끄집어내어 언급하고 지적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질적으로 변하였다.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그래서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고, 호소하는 문제에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몰아갔던 과정은, 앞서 언급한 고은태 교수 사건에서 고종석 작가와 다수의 사람들이 보였던 전형적인 대응과 거의 차이가 없다.
노동자연대가 당시 자기 구성원들의 이런 무례하고 부당한 행동에 주의를 주고 막으려고 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노동자연대가 이후 조직 차원의 성명과 대응 기사를 발표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구성원들이 저지르던 ‘피해자에게 책임 덧씌우기’ 오류를 더욱 공개적으로 반복하였다는 점이다.
내가 이 사건을 접하게 된 것도 노동자연대 기사를 통해서였고, 처음엔 관심을 두지 않다가 결국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노동자연대에서 이 사건에 대해 계속 글을 내면서, 문제를 악화시키는 바로 그 요인을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는 회원들의 잘못이 조직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은 비약이고 개인과 단체의 책임은 구분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롯데호텔에서,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그리고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에서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폭로가 피해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로 연결되었을 때, 노동자연대는 누구를 비난하였었는가.
누구를 상대로 싸웠었는가. 노동자연대는 사내하청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현대자동차에게 책임을 물었고, 직원들이 행한 성희롱에 대해 업체 사장 또는 그 조직과 단체를 규탄하면서 고발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조직 구성원들의 잘못된 대응에 대해 노동자연대를 규탄하고 책임을 묻는 것이 비약이라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분명히 견해를 밝히건데 나는 이 사건에서 노동자연대를 ‘성폭력 가해 단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대책위나 지지모임에서 노동자연대를 일컬어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런 종류의 장기간에 걸친 논쟁에서는 누구나 다 다소 무례한 언행을 하게 되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분명 대책위 측의 일부도 항상 이상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을 접한 이후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작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용어를 현재 수시로 사용하고있는 측은 바로 노동자연대 당사자라는 것이다. 대책위 쪽에서 발행한 최근의 어느 글에서도, 또는 그들이 항의의 의미로 방문한 노동자연대 맑시즘 행사에서 사용한 현수막이나 피켓 그 어디에서도 노동자연대를 성폭력 가해 단체라고 규정한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 어느 글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전력이 있었다하더라도, 후에 자신들이 과장과 오류를 자각하여 수정하거나 그런 표현을 자제하고 있다면 논쟁은 그 상태에서 전개되어야 생산적이다.
앞서 언급한 고은태 교수의 성희롱 사건에서, 불특정 다수의 피해 여성을 향한 공격적 비난이 결국은 자신들의 편견어린 사고방식과 왜곡된 판단, 인식적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지적한 바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노동자연대가 이 사건을 대처하는 방식이 조직 내에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건강하지 못한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크게 세 가지 경향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첫째는, 노동자연대가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조직 내에서 이견과 문제제기가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며, 조직이 정한 목표 및 지향에 어긋나는 현상과 활동 결과는 간과되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다만 주요 지도부 몇 사람의 특성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노동자연대가 해석하는 ‘레닌주의 조직의 민주집중제’에서 기인한 좀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여성억압과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생각이다. 노동자연대는 아마 한국사회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엄격하게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조직일텐데, 그런 단체에서 이러한 대처를 보인다는 것은 그 이론과 분석 자체의 결함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결함이 있다는 것은, 분석 자체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 과거의 전통적인 해석에 집착할 가능성,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분석이 타당하지 않을 가능성 모두를 포함한다.
심각한 문제는 첫 번째 요인과 두 번째 요인이 상호작용하면서 상황의 개선과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완전할 수 없고 당연히 어느 조직이건 시행착오와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는데, 이를 자유롭게 비판하고 개방적으로 토론할 구조와 분위기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변화와 발전은 가능할 수 없다.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부르는 조직이니 레닌이 (1917년 9월에) 했다는 말을 인용하겠다. “어제의 오류들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오늘과 내일의 오류를 피하는 방법을 배운다.” 토론이 어려운 경직된 조직에서 어떻게 어제의 오류들을 인식하고 극복할 시도를 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연대가 이 사건에서 보여준 소통의 부재와 오류의 반복은 레닌주의적이지도 않다.
조직에 대한 충성이 결코 의식적 각성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노동운동 조직의 보위가 노동운동의 강화를 담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조직을 대상으로 호소된 피해 사례가 토론되지 못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노동자연대의 강경한 입장을 일방적으로 교육받기만해야한다는 것은 너무도 씁쓸한 일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여성주의를 공부한다고 해도 소통되지 못한다면, 그 이론이 현실을 반영하고 실천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는, 노동자연대라는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훌륭한) 극좌파 조직이 안타깝게도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의심이다. 계급 문제와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은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폭로하는 데서 시작한다.
따라서 좌파 운동조직이 가져야 할 가장 핵심적인 자질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호소에 우선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이러저러한 일을 당해서 괴롭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원래 이상한 사람이니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피해 여성도 과거 노동자연대 소속이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을 동지라고 부르며 격려하고 다정하게 대하던 사람들이 이제 조직을 나왔다고, 그 조직에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하루아침에 성이 난 목소리와 사나운 손가락질을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조직의 구성원이었을 때만 존중받고, 이제는 아니라고 신뢰와 사랑을 단절 당하는 심정이 얼마나 자신을 초라하게 할까. 어느 조직이건 헌신적인 구성원이었다가 탈퇴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결국 자신이 조직을 위해 이용됐었다는 배신감, 전인격으로서가 아닌 일부 기능으로서만 자신이 의미있었다는 소외감은 곧 자아를 부정당했다는 상처로 남는다.
비록 과거 회원이라고 해도, 자기 구성원에게 모욕을 주는 조직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해 여성이 공개적으로 문제를 호소하였을 때 만일 노동자연대가 상황을 재평가하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이고 고통에 공감하면서 화해와 타협을 모색하려 했다면, 분명히 그녀 역시 긍정적으로 반응했을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노동자연대는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정치조직이고 자신들의 분석과 입장은 틀림없이 옳으며, 조직에 대한 비방은 곧 단결된 노동 운동에 대한 방해이니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입증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노동자연대 홈페이지에 자리한 "노동자연대 비방 사건" 카테고리에 모여있는 글들을 읽다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자연대는 결코 자신들의 실수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티끌만큼도 아무런 잘못이나 오류를 범한 적이 없고 억울하기만 하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그 글들에서 거짓말쟁이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 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당신들이 옳다고 하자. 이 사건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폭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성희롱이나 성적 공격으로 불러야한다고 하자. 이제 성적 공격으로 부르자. 그리고 당신들은 성폭력 가해 단체가 아니다. 또 노동자연대는 여성 억압과 차별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투쟁한다.
노동자연대에는 '여자가 숙박시설에 같이 가는 것은 관계에 동의한다는 뜻이므로 숙박시설에 따라갔다가 성폭력을 당한다면 거기엔 피해자의 책임도 있다'는 식의 인식을 가진 사람이 없다. 노동자연대는 “데이트 강간, 가정 폭력, 여성에게 뒷바라지 시키기”가 용인되는 마초조직이 아니며, '여자가 사회를 봐야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사회를 시키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이다. 어느 운동조직보다 여성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고, 남성과 여성이 연대하여 여성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럼 묻고싶다. 이제 피해 여성에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느냐고 위로 한 마디 전해주겠는가? 그녀는 성적 공격이라는 경험 이외에도 수많은 가치들로 이루어져 있는 전인격적 존재라고 따뜻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부당함을 폭로한 용기를 격려하고 이제껏 버텨온 끈기를 알아주고, 연대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녀도 당신들과 같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존재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알 수 있겠는가?
상처를 치유하고 소외를 해소하며 버림받고 경멸당한 존재가 다시 힘을 내는 것은 가장 엄격하고 무자비한 훈련보다도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 ‘변혁 재장전’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돌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을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을까 (2) | 2015.06.18 |
---|---|
고통을 공감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0) | 2015.05.03 |
운영위원회 동지들에게 드리는 고언 (0) | 2014.12.06 |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진지한 돌아보기를 위해 (0) | 2014.12.02 |
더 늦기 전에 함께 반성하며 이 고통을 끝냅시다 (19) | 2014.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