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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트럼프주의란 무엇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3. 22.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넷플릭스에서 <그리고 베를린에서> (Unorthodox, 2020)라는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초근본주의적인 유대인 종파를 떠나 베를린에서 새 삶을 모색하는 여주인공의 "자유 갈망", 보는 사람마다 쉽게 동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근본주의적 종파란 일단 가부장제의 "최악"을 보통 보여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더더욱더 여주인공의 심정을 잘 이해하죠. 한데 이 드라마가 그리는 "종파로부터의 탈출"은 문제의 종파에서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극도로 예외적인 만큼 종파가 아예 사람들을 베를린으로 파견하여 탈출한 이를 다시 돌려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단순한 신조를 강력하게 믿게 돼 있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고 바깥 세계를 타자시하는 폐쇄적인 종파들은 그 흡수력이 대단합니다. 일본의 창가학회, 아니면 세계적인 신흥종교가 된 통일교도 이탈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니면 북한 이탈 주민들의 숫자를 생각해보죠.

북한이 아직 먹고 살만하고, 미래가 보였던 시절, 1989년까지는 탈북자(그 당시 말로는 "귀순자")의 누적 숫자는 607명이었습니다. 그게 꼭 공포나 가족 관계, 아니면 어떤 물질적인 이유만이 있는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실 북한의 생활 수준은 1990년대 초반 이전에도 동구권 등 일부 북한 사람들이 그나마 가볼 수 있는 지역에 비해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천지 교회나 이슬람 근본주의 종파, 아니면 북한과 같이 높은 충성도를 전제로 하고 강력한 집단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그룹들의 경우에는, 일단 믿는 이로 하여금 그 삶을 아주 간편하게 만듭니다.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싶은, 만능의 설명틀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깥세계가 타자시되고 이질시되는 만큼, "우리끼리"는 더 강력하게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죠. 내부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정 말입니다.

물론 트럼프의 부동 지지층은 일견 "작고 폐쇄적인 종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트럼프에 이번에 투표한 유권자만 해도 77백만 명 이상 되는 것이죠. 대한민국 전체 총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핵심 지지층을 보면 정말이지 극도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모종의 섹트를 꼭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일단 하드코어 트럼프주의자들은 타자들을 무조건 불신합니다. 상당수가 면대면 공동체 같은 작은 동네 출신들이라 같은 면대면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라면 불신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죠? 한데 그들이 "모르는 사람"을 불신한다기보다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절대 믿지 못합니다. "빨갱이"는 물론이고 "자유주의자"도 그들에게 일단 소통이 불가능한 ""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북한의 국경 안에 대개 있게 돼 있고, 근본주의적 종파들의 신도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같이 꼭 출석하여 예배를 보듯, 트럼프주의자들의 정보 공간 역시 아주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브라이트바트뉴스, 팍스뉴스 등 극우 매체 아니면 보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 극우 정보 버블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팍스뉴스 같은 대표적인 극우 방송을 시청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거의 "종교 의례" 같은 것입니다.

주체사상이 바라직한 정치를 "자주, 자립, 자위, 강성대국 건설" 등과 같은, 매우 단순하고도 명쾌한 방식으로,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듯이, 극우 방송들은 "미국의 황금기"를 위한 "보호 관세 장벽", "이민 최소화", "종교와 가족 가치 회복" 등의 복음을 쉽게 쉽게,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주체사상이 "미제"를 만악의 근원으로 설정했듯이, 브라이트바트와 팍스는 "자유주의 엘리트", "마르크스주의자", "테러리스트 지지자"들만을 탄압하고 내쫓으면 모든 문제들이 스스로 풀릴 것처럼 그 서사를 펼칩니다.

근본주의 종파들의 인간상은 단순하고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맡은 바 일을 잘 하고, 신심이 강하고 교주에게 바쳐야 할 것을 바치고 교주가 정한 규율을 잘 지키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인생 고민 "", 늘 신심을 갖고 미소를 짓고 편하게 살아나갈 수 있죠. 사실 트럼프주의자들의 인간상 역시 이와 같습니다.

남성은 "남성답게" (강하고 씩씩하게), 여성은 "여성답게" (가족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문제들을 "개인적 문제"라고 생각하여 성실한 노동으로 풀고, "미국적 가치" (철저한 개인주의, 성실한 노동을 통한 신분 상승, 가족 관계 등)만 믿고 "비미국적인 행동" (노조 가입부터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까지)을 하지 않으면 별 고민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민이 생길 경우 극우 방송을 듣고 모든 문제들이 결국 "자유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사실을 익히면 됩니다. 그리고 세금을 깎아주고 "이상하게 생긴" 타자들이 "우리 미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줄 교주, 즉 트럼프만 무조건 믿으면 됩니다. , 고민도 적고 아주 편리한 인생인 셈이죠. 복잡할 것 정말 없습니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피해자가 되고 세계화의 그 복잡다단한, 생소한 개념과 여태까지 많이 보지 못한 변화 (젠더 아이덴티티의 변화 등)들에 대해 공포와 피로를 느끼는 수많은 소공동체 구성원들에게는 트럼프주의는 심리적으로 대단히 편리한 안식처가 됐습니다.

트럼프주의의 성실한 신도가 되면 그야말로 "고민 끝", 심적으로 매우 편리한 삶의 지평이 열릴 수 있죠. 한데 트럼프주의라는 정치적 섹트의 이상은 미래에 있지 않고, 과거, "좋았던 옛날의 미국", 백인 농민, 수공업자, 상인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트럼프주의의 유토피아는 과거회귀적입니다.

이 섹트의 종사자들이 지금 권력을 잡아 미국의 연구, 교육, 공공 부문 예산을 무자비하게 깎는 만큼 선진국이 돼 가는 중국과 후진화돼 가는 미국 사이의 격차만 벌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중국과의 "경쟁"을 외치지만, 그들의 정책은 이 경쟁에서의 필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곧 이 사실이 여실히 확인될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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