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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여성 억압 - 상호교차성을 넘어 사회재생산으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8. 8.

[강남역 사건부터 메갈리아 마녀사냥까지 여성 억압과 차별을 둘러싼 쟁점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한 더 깊이 있는 고민과 논의를 위해 자본주의와 여성 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적 분석을 소개한다. 이것은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또는 사회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온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를 인터뷰한 것이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캐나다 극좌파 조직인 뉴 소셜리스트’(New Socialist)의 주요 활동가이면서 세계 경제, 여성 억압, 변혁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많은 책과 글을 썼다. 한국에 출판된 그의 책으로는 글로벌 슬럼프(그린비)가 있다. 인종과 젠더 문제를 통합하는 계급투쟁의 전략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이 인터뷰를 번역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매우 감사드린다.]

 

출처:

https://viewpointmag.com/2015/10/31/social-reproduction-beyond-intersectionality-an-interview-with-sue-ferguson-and-david-mcnally/

 



사회재생산 개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리즈 보겔이 1983년에 쓴 고전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재출간에 맞추어 최근에 그 책에 쓰신 서문에서, 두 분은 보겔이 노동력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즉 노동력이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세대적으로 재생산되는 방식을 연구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고유한 기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논점에 근거해서, 임금노동의 존속과 생산 바깥에서의 계급 형성 과정을 위해 필수적인 활동·관계들의 내적 연관성을 규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회재생산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의 범주들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중요성은 무엇인가요?

 

가장 먼저, 범주 변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질문하면서 지적하셨듯이 사회재생산 접근은 우리가 노동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기존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 노동력은 그저 원래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의 주어진 요소로요. 기껏해야 자연적이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재생 과정의 산물로 이해되었습니다.

 

노동력을 사회화하는 것과 역사와 사회 및 문화 속에 노동력이 박혀 있음을 밝히는 데 있어서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먼저 노동력이 그저 원래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노동력은 오직 직접적인 노동/자본 관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특정한 일련의 젠더화되고 성애화된(sexualized) 사회적 관계 즉 이른바 사적 영역에서, 그리고 이 영역을 통한 재생산을 통해 자본의 입장에서 이용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임을 밝힙니다.

 

또한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자본에 대한 노동력의 모순적 지위를 우리가 더욱 예리하게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우리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의 모든 측면들(우리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생존하고자 하는 것)을 축적에 필수적인 것인 동시에 축적의 장애물로(왜냐하면 자본은 임금, 복지수당, 세금을 통해 그 비용을 간접적으로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재생산 페미니즘 초기 세대들의 핵심적 통찰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최근의 학문적 연구가 시사하는 것처럼 이 접근은 또한 노동력 그 자체가 더 복잡하고 차별화되는범주임을 드러냅니다. 사회재생산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자본주의적 가치 추출이 그것을 점점 더 균일화시키려는 추진력으로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노동력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특정한 노동자들은 강화된 억압에 대해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정말로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습니다. 자본축적의 법칙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서가 아니라, 작업장을 넘어선 억압적 관계가 노동력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며, 노동자들을 단지 자본의 문 앞으로 등 떠밀 뿐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모멸과 비인간화를 보여주며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하신 두 번째 질문인 사회재생산 접근의 이론적 중요성으로 이어집니다. 한편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하는 무급노동과 다른 편에서의 임금노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은 사회적 총체에 대해, 복합적으로 분화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핵심적인 이론적 기여입니다. 이중체계 분석으로부터 상호교차성 분석으로 이행할 때, 급진적인 사회이론가들은 복잡하게 얽힌 경험적 세계의 상을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했죠.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가부장적인, 인종화된, 백인 정착민의 식민주의적 관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및 심리적 동학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상호교차성 설명은 그 어떤 특정한 억압적 관계도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제대로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명들은 예컨대, 왜 그리고 어떻게 이성애화된 관계들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 방식으로 가부장적 관계들과 교차하는지에 대해(가족은 왜,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식이, 예를 들어 동성 결혼을 포섭하기 위해 변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규범성과 가부장제가 항상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승인되는 사적 제도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 그 어떤 정합적인 설명도 발전시킨 바가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 사회적 총체, 즉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교차하는 전반적인 과정 혹은 동학을 부적절하게 개념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동학은 아예 이론화되지 않거나, 아니면 그저 중립적이며 그 자체로는 권력관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됩니다. 물론 이는 서로 구별되는 억압들이 함께 구성요소가 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런 억압들을, 공간 속에서 교차하거나 맞물리긴 하지만 존재로서는 구별되는 체계들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사회재생산 접근은 자본주의라는 총체성을 상정합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전체는 우선 첫 번째 단계에서, 노동자(스스로를 그리고 자신들의 세계를 재생산하기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 즉 사회 재생산자를 의미합니다)들을 생활수단(또는 사회재생산 수단)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았을 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의 영역을 어느정도 틀 짓습니다. 당연히 노동/자본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을 틀 짓지만, 작업장 너머의 젠더화된, 인종화된, 이성애화된 관계들 역시 틀 짓습니다.

 

자본주의의 결정력을 말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결정 개념에 기계적 인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가부장제와 인종주의는 직접적으로 자본의 필요에 기능한다고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자본이 생겨나라고 해서 생겨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축적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명령이 가능한 것의 범위를 한정 짓는다는 점에서 결정력이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 가능성들(예컨대 작업장에서의 여성 참여의 수준이나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은 투쟁을 통해 바뀌겠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바로 그 관계들 자체는 상당히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 관계들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며, 이는 사실 노동력에 대한 자본주의의 필요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선택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는 등 을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남성, 여성,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은 집안일과 육아를 동등하게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팔리지 않을 그림을 그리거나, 허공을 바라보거나, 거리에서 인종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 중 자본주의에 기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두 자본을 위한 노동력 재생산보다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특정한 형태의 억압 관계들이 노동력을 자본의 문으로 떠미는 일을 (저해하기보다) 용이하게 하는 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및 다른 억압을 지탱하고 인간들 사이에 대안적 형태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강력한 힘(그것이 제도이든 국가, 시민사회, 자본의 실천이든)이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작업장 너머에서 자신들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예컨대 여성이 자신의 임금노동과 재생산노동, 몸의 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 또는 인종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주거, 육아, 식료품 분배를 통제할 수 있는 정도)는 자본주의 내에서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억압적인 실천과 제도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고, 자본주의가 살아남는 한 그것들이 계속 투쟁의 쟁점이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회재생산 이론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직접적 노동/자본 관계, “경제적교환과 운동 법칙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는 서로 다르게 젠더화되고, 성애화되고, 인종화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일련의 살아있는 관계에 핵심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인종화되고, 성애화되고, 젠더화된 몸, 실천, 그리고 제도들이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자본주의의 진짜혹은 이상적인기능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분리될 수 있는 역사적 일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자본의 강탈과 축적의 실제 과정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며, 그 과정을 정말로 활동적으로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같은 논리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인종주의, 성차별 혹은 그 어떤 억압에 대한 도전이든 자본의 재생산을 방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비()작업장 투쟁이 계급투쟁인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 그런 투쟁들은 그 자체로 본질상 잠재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작업장 투쟁이 언제나 맹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작업도구를 내려놓는 일이 자본가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듯이 인간의 삶에 대한 차등적인 멸시를 끝장낼 것을, 생계수단에 대한 온전한 공동의 접근권을, 우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는 운동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어떤 하나의 운동도, 하나의 작업장 투쟁도 그것만으로는 자본가들의 심장을 완전히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매번의 파열음은 자본주의의 몸통 전체에 울려 퍼지고, 그럼으로써 그 심장박동을 잠재적으로 약화시킵니다. 그렇기에 사회재생산 접근의 정치적 중요성은 오로지, 명확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전선들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중요성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Socialist Register>의 최근호에 실린 글에서 두 분은 특히 북미의 맥락에서 사회재생산과 이주노동 사이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이민이나 이주의 문제는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 의해서는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지만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서는 포괄적 현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이것을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한 작업이 비교적 거의 없는 편입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만(Rosemary Hennessy의 최근 책이 떠오르네요) 대체로 이민자 권리 조직들의 정치가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의 언어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분의 글이 이주와 인종화(racialization)를 계급과 젠더 분석에서 불가분한 것으로 조망하는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한다고 보시나요?

 

, 그렇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력 형성의 심장부에 있는 모순을 이끌어내고 분석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노동을 동질적이고 서로 교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시장에서 그저 자본이 사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분리된 상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마르크스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력의 담지자인 구체적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추상노동을 할 능력은 구체적인 사람들에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실제의, 차별화된 장소와 공간에 존재합니다. 노동력이 실제 사회관계 속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하듯이, 이런 관계들 역시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존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체제의 또 하나의 경향이기도 한데, 자본의 공간은 인종과 제국의 지배 체제에 따라 분화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노동력의 살아 있는 담지자들에 대한 실제 태도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그 사람들이 인종적으로 멸시되고 있거나, 자본주의적 축적의 중심 구역에서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있다면 말입니다.

 

노동(labor)”이라는 개념을 부동산이나 투자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시장을 가진 상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급진 정치경제학의 상당 부분에는 경제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력의 담지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계속 밀고 감으로써, 그리고 그들의 생산과 재생산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그런 요소들 모두를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재생산의 구체적 장소들을 이론화하는 것은 가정과 지역사회 차원의 실천들(초기 사회재생산 이론의 핵심적인 통찰력입니다)뿐만 아니라, 국민국가들 내부 및 국민국가들 사이의 인종화된 사회적 위계질서 속에서 그런 가정들과 지역사회들의 사회지리적 위치를 주의 깊게 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주 문제가 전면으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오늘날의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중심 구역 바깥의 저임금 현장에서 대량으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본이 생산, 분배와 정보 네트워크를 세우기 위해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으로 이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농, 북구 부유층 가정에서의 육아, 또는 그곳의 건설, 식당 및 호텔 서비스 등 공간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작업의 경우에는 저렴한 노동력(과 그 인간 담지자들)이 그 작업이 직접 요구되는 장소로 이동되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인간 담지자들이 일반적으로 절박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전한 법적, 정치적 권리 및 시민권의 제안 없이도 가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갖는 차별적인 지위를 초래하고 강화된 불안정성, 멸시 및 억압이 거기 수반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많은 논평가들이 임시직 노동자 체제와 그것이 수반하는 예속의 형태에 대해 풍부하게 기술한 바 있습니다. 이 작업의 상당 부분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재생산 접근은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이주노동의 역할과 여기에 관련된 계급 형성의 다차원성, 특히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차원을 더 완전하게 파악하는 방식으로 이주노동을 이론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딱 하나만 사례를 들자면, 유급 고용의 장소로부터 가정 재생산의 장소가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를 적절하게 이론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경을 넘어가는 이주노동자들의 물리적 이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임금의 상당한 액수가 (송금이라는 형태로) 역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송금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 핵심으로 이주 가능한 세계 산업예비군을 구성하게 될 아이들의 양육 및 교육 작업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재생산 분석은 그러한 사람들의 흐름과 임금의 흐름을, 그리고 공간적으로 국가적으로 분리된 임금노동의 실천과 사회재생산을 복합적이면서도 단일한 사회적 과정으로 연결할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이주는 그래서 흥미로운 부산물 정도가 아니라, 자본과 세계 노동계급의 재생산에 중심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방법은 인종화와 차별적인 지위를, 어떤 의미 있는 젠더 및 계급 분석과도 내적으로 연결합니다.

 

수 퍼거슨 선생께서는 보다 광범위한 맥락,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 권력관계 내에서 계급, 젠더, 인종의 관계적 성격을 개념적으로 통합하는 접근으로서의 캐나다 사회재생산 페미니즘의 출현과 중요성에 대한 글을 쓰셨습니다. 특히 <정치경제학 연구(Studies in Political Economy)> 같은 저널이나 <집 안에 숨겨진(Hidden in the Household)> 같은 영향력 있는 간행물 모음집에 실린 초기 이론가들의 작업부터 Stephen Gill, Isabella Bakker, David Camfield, Alan Sears 같은 보다 최근 이론가들과 Himani Bannerji 같은 비평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캐나다 사상계에서 사회재생산 분석이 계속 이렇게 두드러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호주의 Kate Davison이 작년 런던 역사유물론 컨퍼런스에서 말했듯이, 1970년대와 1980년대 캐나다에서 사회재생산 그룹(party)”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였는지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우선 1970년대 초기에 영어권 캐나다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주류적 페미니즘이 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중요한 것입니다(퀘벡에서는 노동조합과 좌파 민족주의 사회운동에 주요하게 뿌리를 둔 좌파적 페미니즘이 자리 잡았습니다).

 

Meg LuxtonHeather Jon Maroney는 그렇게 된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합니다. (1)사회민주주의의 강세(미국과 달리 캐나다에서는 1930년대부터 사회민주당이 정치적으로도, 선거에서도 의미 있는 존재감을 가져 왔습니다). (2) 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제도나 실천의 상대적 부족(공산당이 더 큰 존재감을 가졌던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이런 근원적 조건들이 사회주의적 사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지적, 정치적 문화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공산당(CP)의 영향을 받는 마르크스주의와 스스로를 차별화한 단체의 회원으로서(데이비드는 1970년대 중반에, 수는 1980년대 초반에 국제사회주의 조직(International Socialists)에 가입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둘러싼 많은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리즈 보겔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우리 단체 회원들 사이에서 보겔의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널리 공유되지 못했고 노골적으로 적대적 반응을 접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통합적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적 접근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옳은 것들로서 보겔의 지향을 계속 숙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영어권 캐나다와 퀘벡 모두에서 노조 내부에 대해 진짜 어느 정도의 견인력을 발전시킨 방식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걸친 간호사와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이 그랬듯이, 소매업 및 은행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조합 운동이 이 점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온타리오에서는 1978년에 여성 비율이 현저히 높은 자동차 부품 노동자 파업이 좌파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니켈 광업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분출했는데, 여기서 파업을 지지하는 아내들(Wives Supporting the Strike)”이라는 슬로건 하에 조직된 여성들이 핵심적인,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노조 조직률이 매우 높은 철강 산업에 여성이 고용되도록 하려는 캠페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페미니즘 쟁점이 노동조합과 공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고 이는 젠더 억압과 계급 착취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진짜 신뢰를 받도록 했습니다. 복합적인 다양성 속에 노동이나 계급 경험과 관련이 있는 페미니즘이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제공된 것입니다.

 

물론 일부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이 부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형태나 사회재생산 형태를 포함한 페미니즘적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대학 내에서,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이론적 작업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 말에 처음 발간된 저널 <정치경제학 연구(Studies in Political Economy)>에 수록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특히 Meg Luxton, Bonnie Fox, Wally Seccombe, 그리고 Pat and Hugh Armstrong)은 대부분의 정치경제학 프레임 속에 있는 남성적 편견을 들춰내기 시작했습니다. Margaret Benston의 선구적 작업에 의지하여, 이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가사노동 논쟁의 결점을 둘러싸고 길을 탐색했습니다.

 

비록 Himani Bannerji가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너무 자주 구조주의적 접근에 얽매였고 인종화된 여성의 경험을 이론화하는 것을 부차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이고 단일한 언어로 젠더와 계급을 이론화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사회재생산에 대한 지적인 관심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캐나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집단에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영향은 어떤 것이었나요? 특히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론적 프레임으로서의 사회재생산의 발전에 고유한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작업은 미국에서는 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 전통과의 직접적인 연결이 조금이라도 있었나요?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는 우리가 알기로 영향력이 있어 왔던 유일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녀의 작업에 의해 영감을 받아서 특히 토론토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을 위한 소규모 공동체들이 몇 군데 형성되었지만, 비교적 주변적이었고 결코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접근에 대한 진지한 대안을 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성을 노동조합에 가입된 임금노동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을 조직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우세했습니다.

 

달라 코스타의 작업은 가사노동 논쟁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래서 건설적인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실비아 페데리치의 저술이 매우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서는 가사노동에 임금을흐름과 관련해서보다는 인클로저, 시초축적, 그리고 여성의 몸이라는 쟁점들에 대한 통찰력과 재고찰과 관련해서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는 이론적 분석이 항상 현장에서의 사회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리고 오늘날에 두 분들로 하여금 사회재상산과 계급 형성을 연구하도록 자극한 투쟁의 현장은 어디였나요? 여기서 이야기해 주실 특정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우리의 경험 중 일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좌파들이 계급과 젠더를 통합하려고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분투했던 복합적인 방식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둘 다에게 특히 중요했던 것은 1980년대 중-후반 온타리오에서 있었던 임신 중지권 투쟁에 개입했던 것이었고요. 이 운동에 참여하면 자본주의 사회가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자유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인지 확연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둘 다 관심을 갖게 되었던, 온갖 종류의 흥미로운 이론적이고 전략적인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특히 1990년대 중반 이래로 우리가 조금 덜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환경에서 정치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을 때(특히 ‘New Socialist 네트워크에서요), 우리는 계급과 젠더를 구성하는 차원으로서 인종과 인종화에 대해(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섹슈얼리티와 신체적 능력에 따른 차별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성을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반인종주의 및 이주 정의(migrant justice) 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지는 확실히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개의 억압의 축들이 상호교차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상호교차성 이론이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했고 중요한 통찰들을 해냈기는 하지만, 이 이론은 왜 이러한 여러 가지 억압들이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에 걸쳐 존재하고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리고 그들의 상호작용 방식을 설명하는 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총체적이면서도 통합된 접근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영역에서 잠재적으로 더 잘 갖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사회재생산 이론의 몇몇 중요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종주의 그리고 식민주의 이론 및 실천의 가장 훌륭한 부분에서 배우려는 많은 노력과 진정성 있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자본주의와 노동계급 형성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조직되는지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수잔은 몇몇 글에서 자본주의의 공간들이 어떻게 해서 항상 인종화되고 식민주의적인 지를 보여주며 이 과제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Socialist Register> 최신호에 우리가 합동으로 기고한 글은 국민국가의 지평을 철저히 넘어섬으로써, 노동계급의 재생산을 이주가 중심적인 특징인 전지구적 현상으로 간주하며 분석을 더 심화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금이 이 분야에서 특히 더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역사유물론적 작업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짜 사회적 투쟁의 살아 있는 맥박은 앞으로 수년 간 이 분야에서의 작업을 계속 추동할 것입니다


<관련기사> 

젠더, 계급, 인종 - 사회재생산과 상호교차성 http://anotherworld.kr/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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