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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논쟁] 생태주의, 사회주의, 탈성장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4. 22.

[근래 기후위기에 맞선 국제적인 논의와 운동이 활발하게 번져가는 가운데, 급진좌파와 생태사회주의자들 속에서는 탈성장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왔다. 이 논쟁 속에서 매우 다양한 강조점을 가진 수많은 글들이 제출돼 왔는데 그중에서 전반적인 논점을 보여주면서 고민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는 두 가지 글을 번역 소개한다. (번역: 두견)]

 

 

● 탈성장 관련 주장에 대한 반박

 

루이스 엔 프로엑트(Louis N. Proyect)

 

출처:

http://www.globalecosocialistnetwork.net/2020/12/19/a-reply-to-john-molyneux-and-michael-lowy-on-degrowth/

 

 

일반적으로 말해서, 탈성장에 대한 나의 방어는 ‘자코뱅/촉매’[좌파 잡지의 제목들]의 생태근대주의자(기술을 통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경향)들에 대항하여 이루어졌다. 적어도 그들의 견해로서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에 입각한 리 필립스(Leigh Phillips)와 맷 휴버(Matt Huber)가 있다. 내가 특별히 그에게 대답한 적은 없지만, 네오 케인지안인 로버트 폴린(Robert Pollin)은 ‘뉴레프트리뷰’NLR 2018년 7~8월호에서 탈성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상적으로 나와 훨씬 더 가까운 사람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 멤버인 존 몰리뉴John Molyneux, 그리고 에르네스트 만델의 뒤를 따르는 제4 인터내셔널의 오랜 멤버인 미카엘 뢰비Michael Lowy에게 응답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몰리뉴의 기사 제목은 "성장과 탈성장: 생태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이며, ‘글로벌생태주의네트워크’에서 읽을 수 있다. 뢰비의 기사 제목은 "생태사회주의: 필수적 종합"은 이안 앵거스Ian Angus의 ‘기후와 자본주의’Climate and Capitalism 웹사이트에 나와 있다.

 

먼저 몰리뉴에게 눈을 돌리자. 그의 글의 제목이 그의 이데올로기적 상대방들을 정면으로 대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이유가 없다면 말이다. 불행히도 몰리뉴는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인 지오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에게서 지적 훈련을 선별하고 허수아비를 무너트리기를 수행하고 있다. 칼리스는 "국제주의자The Internationalist"에 실린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좌파는 성장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끊임없는 성장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런 부조리를 고려해보자: 만약 이집트인들이 1 입방미터의 물질로 시작해서 매년 4.5%씩 성장했다면, 3,000년 문명이 끝날 때쯤이면, 그들은 25억 개의 태양계를 차지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자본주의 성장을, 더 멋지고 천사같은 사회주의적 성장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해도, 왜 우리는 25억 태양계를 차지하려고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공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실제 생태학적 한계에 완전히 젖어 있는 탈성장 분석을 대표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칼리스는 직업적인 생태경제학자로 수자원 개발과 도시화 연구에 관여하고 있어 이집트의 대안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울뿐인 이론의 창안자로 그를 변신시킨다면 정의롭지 못하다.

 

몰리뉴의 나머지 글은 지난 53년 동안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에 대해 내가 듣고 했던 주장들을 재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생산력이 사회의 일반적 생산 능력을 구성하는 경우, 그 개발이나 발전은 반드시 더 많은 물건의 생산을 초래할 필요는 없고, 동일한 양을 더 적은 시간에 생산하게 될 수 있다. 마르크스 자신은 이러한 노동 시간의 경제에 많은 중점을 두었다. 그는 노동 시간의 경제가 인간을 필요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노동하는 주일을 단축시키며,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글쎄, 누가 그걸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주의는 좀 더 합리적인 시스템이 될 것이다. 이윤에 기반한 상품 생산은 환경 파괴의 가장 큰 원인이다. 경제가 사용가치의 생산에 기반을 둔다면, 마침내 과학과 휴머니즘을 이용하여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몰리뉴는 우리가 생태사회주의의 세계 아래서 기대할 수 있는 몇 가지 규범을 정의하기 위해 계속 전진한다. 이것이 나에게 눈에 띄었다: "집들의 광범위한 재정비". 나는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3천 제곱 피트가 넘는 어떤 집이나 아파트도 4인 가족에게 금지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분명히 찬성하지만, 그렇게 개조된 새로운 주거 방법 안에서, 사람들이 약간의 안락함을 위해 필요로 하는 가구를 어떻게 만들까? 우리는 의자, 테이블, 침대, 책상, 책꽂이가 꼭 필요하지 않는가?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제공하는 사회주의 이케아Ikea가 있을까?

 

지난 40년 동안, 중국은 자국민이 편안한 중산층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목재 수입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2위이다.) 또한 수입하는 목재의 대부분을 전 세계의 홈 디포스Home Depots와 이케아로 향하는 제품으로 바꾸는 등 최대 수출국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케아가 자신의 환경주의적 가치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웹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또한 100%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 우리의 업체에서 소비하는 만큼만 생산하는 - 2020년까지 우리의 모든 목재를 보다 지속 가능한 자원에서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든 것이 괜찮고 좋지만 값싼 가구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는 다른 기업들이 중국 공급업체에 의존하도록 이끌 것이다. 그것이 결국 공급과 수요라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숲을 이쑤시개로 만드는 데 매우 효율적이다.

 

이제 생태사회주의 세상 아래서 어떻게 숲을 침범하지 않고 새로운 전염병의 위험을 피하면서 일반 가정에 필요한 목재를 계속 공급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기 중에서 나무를 만들 수는 없다. 그건 ‘마법사의 견습생’의 시각인데 우리는 그 만화 작품에서 미키마우스가 얼마나 말썽을 부렸는지 보았다.

 

탈성장은 인류가 22세기까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 뿐만 아니라 천체물리학적 현실로 인해 지구가 죽을 때까지 문명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지의 문제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SUV와 다른 모든 쓰레기들은 포기하면서, 일주일에 10시간만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 동안 풍경화를 그리거나 난초를 기르는 겸손한 생활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몰리뉴 같은 사람들이 뒷걸음치는 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글에서는 그 점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이는 전형적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또한 모든 인간 활동, 실제로 모든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자연에 해를 끼친다는 많은 '탈성장론자'의 주장, 특히 인구 통제를 선호하는 주장들에 내포된 생각에 도전해야 한다.”

 

나는 "많은" 탈성장론자들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몰리뉴가 칼리스와 제이슨 힉켈Jason Hickel 모두가 도출한 숫자들을 가지고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지는 알고 싶다. 시작하기 위해 힉켈이 쓴 어떤 글로 그를 안내하겠다. 이것은 이집트에 대한 칼리스의 지적 훈련이 아니라 탈성장 학문의 핵심이고 영혼이다.

 

더 높은 빈곤선을 채택하는 것은 지구의 경계에 머무르는 동안 빈곤을 끝내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미화 7.40달러 선인 벨라루스는 질적인 지표를 제외한 최저의 사회적 미달(점수 0.98)로 가장 유망하지만 그것의 평균 생물물리학 점수는 1.64점이다. 모든 질적이지 못한 사회적 문턱에 도달한 국가 중에 생물물리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국가는 평균 생물물리학 점수가 2.66점인 오만Oman이다. 즉, 자원 사용과 소득 사이의 기존 최대치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하루 소득 한계 7.40달러로 모두에게 좋은 삶을 달성하려면 가난한 나라들이 최소한 64%에서 166%까지 행성의 경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물론, 힉켈은 생태사회주의가 물, 토양, 기후가 쇠퇴하는 조건에서 필사적으로 인류와 자연 사이의 중요한 균형을 찾아낼 필요가 하나도 없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현재의 궤적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 지금 뢰비의 기사로 돌아가보면, 몰리뉴의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세계적 규모로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 대체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경제 성장 문제는 사회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을 분열시켰다. 그러나 두 가지 입장 모두가 생산력에 대한 순수한 양적 개념을 공유하기 때문에 생태사회주의는 성장 대 탈성장, 개발 대 반개발이라는 이원론적 틀을 거부한다. 세 번째 위치는 발전의 질적 변화라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에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
새로운 개발 패러다임은 쓸모없고 유해한 제품의 대규모 생산에 의해 주도되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자원 낭비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무기 산업은 극적인 사례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도 생산되는 많은 ‘재화’의 주된 목적은 - 그들의 계획된 노후화와 함께 - 대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쟁점은 추상적인 소비 과잉이 아니라, 대량 낭비와 '패션'이 촉진하는 눈에 띄고 강박적인 새로움의 추구에 바탕을 둔, 널리 퍼진 소비 유형이다. 새로운 사회는 물, 음식, 의류, 주택, 그리고 건강, 교육, 교통, 문화와 같은 기본적 서비스를 포함한 진정한 욕구의 충족을 생산의 방향으로 정할 것이다.“

 

그래서 물부터 시작해 보자. 자, 생태사회주의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 농업의 핵심인 지하수를 만들어 낼 것인가? 오갈랄라[미국의 지하수 지역] 대수층 사람들의 재산을 만드는데 수천 년이 걸린 자원의 생태학적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까? 자연력이 그것을 생산했고 그것은 도시 생활의 필수품인 밀을 재배하는데 사용되었다.

 

여러분은 소와 밀을 가지고 가야 하는 위치에 설 수 있지만, 어떤 식량도 물에 의존해야 한다. 최상의 조건하에서도 물은 3만년 전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개체수를 훨씬 웃도는 인구에게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해질 수 있다. 1950년 이후로 농업 관개 사업은 대수층의 포화량을 9%까지 감소시켰다. 일단 고갈되면, 대수층은 강우량을 통해 자연적으로 보충되는 데 6,000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위키피디아). 이집트에 대한 지오르고스 칼리스의 추측을 비난하는 대신, Molyneux와 Lowy는 물 보존에 관한 그의 연구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몰리뉴와 뢰비의 탈성장의 한계를 폭로하려는 시도가 기껏해야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생태학에 대한 좌파의 논쟁을 따라왔고 오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탈성장 학문의 표면 위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태도에 놀랐다. 그들과 다른 이들에 대한 나의 조언은 마르크스주의적 진리를 뒤로 미루고, 그들의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인류가 현재의 방식으로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을 탐구하기 시작하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공기로 나무와 물을 만들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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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성장: 성장없는 사회주의

 

티모테 페리케Timothée Parrique, 지오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

 

출처:

https://londongreenleft.blogspot.com/2021/02/degrowth-socialism-without-growth.html

 

 

[티모테 파리케는 프랑스 클레르몽 아우베르그네(Clermont Auvergne) 대학교와 스톡홀름 복원 센터(스웨덴 스톡홀름Stockholm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Giorgos Kallis는 생태학, 정치 생태학, 그리고 물 정책을 연구하는 환경 과학자이다. 그는 바르셀로나 자치대학에서 정치 생태학과 생태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최근 저서 '탈성장에 관하여'를 공동 편집했다.]

 

최근 저명한 생태사회주의자들이 탈성장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비판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성장은 자본주의 그 이상의 문제이다. 지속 가능한 생태사회주의는 성장의 이데올로기와 용어에 관련된 어떤 연관성도 거부해야 한다.

 

21세기 사회주의자들은 성장 없이 번영하는 사회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계획을 세울 수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좋든 싫든, 성장은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고, 문제는 어떻게이다. 이것이 곧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행성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충분히 늦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끝없는 성장도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탈성장에 대한 전형적인 사회주의적 대응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본주의 성장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경제 성장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물질적 생활수준의 증가는 더 많은 물질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은 경제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원시사회 중 어느 쪽에 걸려있든 관련이 없다.

 

물질적인 생활 수준의 성장은 물질의 추출과 오염의 배출의 성장을 필요로 한다.(일반적 생활수준의 성장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에서 논의한다.) 그 결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바로 내일의, 경제 성장은 세계화된 경제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국제적 수준의 에너지 및 물질 사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데이비드 하비는 복합적인 성장의 사상을 ‘경제적 이성의 광기’이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이것은 왜 사회주의자들이 이 광기를 구조하려고 그들의 시간을 쓰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얼마나 광기어린 것인지 보려면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매년 3%씩 순수하게 성장한다는 것은 24년마다 경제가 두 배씩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기말에는 10배 정도 더 커지고, 무한대로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를 여러분이 좋아하는 무엇으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에너지, 물, 자전거, 마사지).

 

무한하다는 생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순전한 광기다. 비가 오든 날이 개든 매년 3~5%의 수익을 챙길 것으로 기대하는 개인 자본가들의 논리가 일반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완전히 자동화된 럭셔리 공산주의’를 꿈꾼다. 거기서는 신기술이 경제적 생산량을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가깝지도 않았으며, 미래에 더 좋은 전망을 갖게 될지도 의구심이 있다. 좋든 싫든, 경제 또한 물리 법칙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열역학은 우리에게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단지 변형될 뿐이며, 그것의 질은 가차없이 덜 사용가능하거나 유용한 상태로 옮겨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적인 생활의 물질적 기준을 높일 수 있는 특효약 기술이 없다는 뜻이다. 경제는 근본적으로 생태계에 포박돼 있다.

 

물론, 어떤 활동들은 다른 활동들보다 더 자연 집약적이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이것들은 생물권을 방해하지 않고 더 오랫동안 성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석연료는 태양에너지보다 더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태양에너지가 무한한 성장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니다. 생산 및 신기술의 조직이 개선되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제품당 사용되는 자원(예: 보다 효율적인 태양 전지판)이 줄어들어 분리될 수 있다.

 

하지만 태양 전지판의 양이 제한 없이 복합적 비율로 증가한다면, 언젠가는 자원 가용성에 압력을 가하거나 생태학적 피해를 입히기 시작할 것이다. 즉, 경제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사이에 있는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그 어떤 물질도 무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생 에너지를 이용해 그것의 현재 크기 또는 그것의 5분의 1의 에너지 시스템(기존의 충분성과 효율성 측정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조사된 에너지 사용에서의 감소)을 탈탄소화하는 것과, 세기말까지 10배 더 커진 시스템(매년 3%의 성장을 기억하라)을 탈탄소화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우리의 제안: 민주적 사회주의의 계획은 에너지와 자원의 탈성장적인 사용에 대한 제한적 요구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곧 주장하겠지만 오늘날 에너지와 물질적으로 힘겨운 많은 활동들이 사회주의 아래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필요 이상의 활동들이 너무 많아서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이윤을 남기기 위한 자본가의 필요 외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대신 목표는 성장 없는 사회주의, 지속 가능한 사회주의, 즉 지속적인 팽창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매달리지 않고, 당연히 지구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경제 체제여야 한다.

 

성장하려면 축적해야 하고 축적에는 착취가 뒤따른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경제 성장은 생태학적 한계에 직면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한계에도 직면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임금 소득자에게서 이윤(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잉여가치)을 착취하고, 한무리의 사람들, 특히 무급으로 돌봄과 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의 부불 노동을 착취하여 노동력의 사회-자연적인 재생산을 무료로 보장받는다.

 

자본은 또한 '자연의 공짜 선물'(그들의 관점에서만 무료)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급의 돌봄과 가사노동과 함께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격을 싸게 유지시켜 자본이 잉여가치를 짜낼 수 있게 한다. 사실상 자본주의 하의 경제 성장은 흔히 그것이 체계적인 착취와 비용 이전에 의존하기 때문에, 종종 사회적 뼈대를 희생시키면서 나타난다.

 

휴식, 돌봄, 보살핌, 안전, 생계 제공과 같은 재생산 요소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생산은 너무 쉽게 그들의 고갈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은 사회적 재생산의 핵심인 활동들과 같은 무급 활동에 거의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그것은 한 사회가 그 생계를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확장할 것이다.

 

지속적으로 줄어들지 않고, 사회적 퇴화를 통한 이러한 축적은 모든 형태의 생산에 필수적인 재생산의 요소들을 침식시킨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무는 것처럼, 재생산 노동과 생태계 제공의 지속 불가능한 착취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은 필연적으로 제한적이다.

 

만약 사회주의가 착취의 종말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또한 끝없는 축적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성장이 없는 사회주의이다. 진정한 사회주의 경제는 다른 경제들의 노동이나 자원들을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돌봄업무를 균등하게 분담하고, 불쾌한 업무를 전환하며, 돌봄 종사자들의 재생산 작업에 대한 비용을 보상한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그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는다면, 경제는 단순히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생산성 향상을 더 많은 자유 시간으로 바꿀 것이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수탈을 종식시킬 수 있고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여기서 원을 사각으로 만들려고 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환상이다.

 

만약 사회주의적 생산이 생산자들에게 진정한 노동 시간을 보장해야 하고, 생태계가 회복되고 되살아나는데 필요한 진정한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면, 또는 '자연의 공짜 선물'을 개발하지 않은 채 남겨놓고 인간의 노동 시간을 대신 확대해야 한다면, 잉여가 더 적어질 것이고, 잉여가 적다는 것은 더 적은 생산량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또한 민주적일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고 싶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상황을 천천히 움직인다(지역 협동조합의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감속은 가속으로 이어질 것이고 생산의 감속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희망적 생각일 뿐이다.

 

증가하지 않는 사용가치

 

좋은 소식은 우리가 성장 없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행복, 건강, 교육을 포함한 생활수준의 주요 지표들이 생산의 일정한 한계점에 도달한 후에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경험적으로 보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웰빙 전환점’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5% 더 적지만 미국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적 결과를 가지고 있다. 복지는 실제 사용가치의 만족도와 인간적 요구 표현에 달려 있고, 끝없는 돈의 축적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GDP는 사용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교환가치의 척도이다. 이 지표는 바람직한 활동과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화폐로 나타나지 않는 것(자연과 무급노동 포함)을 모두 무시하고 무형의 부의 가치를 무시하며 불평등을 설명하지 않는다. GDP가 측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복지이다.

 

물론, 어떤 유용한 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은 증가해야 하고 사회주의 하에서 증가해야 한다. 하지만, 건강, 이동성 또는 교육과 같은 것들을 개선하기 위한 "성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 이것들은 양적인 목표가 아니라 질적인 목표이다.

 

아이들은 좀 더 자유롭고 총체적인 과학기술적 교육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일정한 수의 학교 건물, 교사, 그리고 펜을 필요로 한다. 환자는 의사의 더 많은 인간적 접촉과 보살핌이 필요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히 증가하는 복합적인 보살핌이 아니라 단지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것이다. 자전거가 없는 사람들은 자전거 한 대를 필요로 한다 – 자전거 생산량이 매년 3%씩 영원히 증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사용가치가 복합적 비율로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계, 안전, 자유 또는 정체성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 욕구는 모두 충분성의 한계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건강할 수 있는 충분한 음식, 행복할 수 있는 충분한 생활 공간,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이동 수단 등. 끝없는 욕구에 걸맞은 끝없는 소비의 이야기는 엘리트들을 위한 정당한 축적에 정확히 맞춰 만들어진 자본주의적 담론이다.

 

이것이 바로 탈성장의 핵심 논거이다. 부의 재분배와 공유, 인위적인 욕망과 필요 이상의 재화에서 벗어나고 이윤 창출의 운명에서 우리 시대의 탈피, 그리고 가치있는 물질적 재화에서 가치있는 관계들로 전환을 통해서 삶의 수준은 성장 없이 향상될 수 있다. 이미 모든 사람이 제대로 된 몫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양이 있다. 파이가 커질 수 없다면, 파이를 좀 더 고르게 나눠야 할 때이다.

 

결론: 탈성장은 그 자체로 반자본주의이다

 

성장의 이데올로기는 현대 자본주의의 엔진이 되었고 우리는 왜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 분열적이고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현상과의 싸움에 동참하기를 꺼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회주의에는 성장이 없지만 복지가 있다. 사회주의와 탈성장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다른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두 개념이다.

 

지금으로서는 두드러지게, 우리는 C로 시작하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일부 마르크스주의 논자들은 자본주의를 결코 명시적으로 문제삼지 않는다고 탈성장을 비난했다. 필립스Phillips(2015년)는 탈성장을 "소규모의 안정 상태의 자본주의"로 묘사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탈성장 프로젝트가 영화 ‘다운사이징’(Downsizing, 2017)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을 몇 센티미터로 줄임으로써 활기가 넘치는 소비지상주의가 환경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확실히 하자면, 탈성장은 작은 기업들, 작은 투기성 금융 기구들, 그리고 작은 자유무역 협정을 가진 축소된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내부의 긴축이 아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더 작고 더 느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는 대안 시스템이다.

 

당신은 왜 자본주의가 아닌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지 물을지도 모른다. 자, 뉴스에서 "경제 성장"과 "자본 축적"의 발생 빈도를 비교해보도록 하자. 가레스 데일Gareth Dale이 강력하게 주장했듯이, 경제 성장은 자본의 성장에 대한 특정한 관심을 일반화된 사회적 목표로 만들어 대중에게 주입한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은 그것에 맞서기를 회피하거나 멋진 형용사로 그것을 미화함으로써 사라질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이전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또는 적어도 특정 유형의 자본주의)의 종료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고찰해 봐야 한다. 성장을 옹호하는 사회주의자들 역시 자본에 빨간칠해주는 게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적 꿈으로 파는 꿈을 바로잡아야 한다.

 

성장은 자본주의가 낳은 아이지만, 아이는 자라서 가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축적에 대한 자본주의의 관심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촉진되고 정당화된다. 성장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이다. 자본주의가 사용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파는 바로 그 목적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탈성장과 (생태)사회주의를 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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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 20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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