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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코로나 사태, '서열과 격차의 확인'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4. 1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진실의 순간'이라는 표현은 있지 않습니까? 정말 심각한 위기가 닥치게 되면, 평상시에 각종의 정치적 수사나 프로파간다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바로 보게 됩니다. 예컨대 한국으로서는 IMF 사태가 이런 '진실의 순간'이었지요. 김영삼 정권은 '선진국의 문턱'이니 '세계화의 시대'니 온갖 미사려구로 자화자찬을 해댔지만.... 실상은 채무 비율이 과도하게 많은, 오랫동안 차관에 의한 확장을 거듭해왔음에도 이미 그 제조업 부문에 과거와 같은 이윤율을 내지 못하는 재벌들은 외부의 금융자본에 심하게 종속돼 있었습니다.

 

그 때, '진실의 순간'에 망가지게 된 고용구조를, 지금도 아직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뿐만입니까?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는, 1997년에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강요한 국제 금융 자본의 내재적 약점들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진실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2008년의 위기를 훨씬 능가할 금일의 '코로나 위기', 그리고 곧 이어질 공황은 그것보다 더한 '진실의 순간'일 것입니다.

 

'진실의 순간'에는 평상시에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나라 사이의, 아니면 사회적 계층 사이의 '서열'은 재차 재확인됩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이죠. 1914년 이전에는 러시아나 독일은 엄청난 '군사 대국'으로 보였지만, 실상 이 두 대륙계 권위주의 왕정 국가는 장기전을 버텨내지 못해 그 '서열'에 있어서는 해양계 패권 국가 (영국, 미국 등)에 비해 훨씬 '쳐진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제정 러시아의 약함이야 이미 1905, 일본에 참패 당한 일로 확인돼 결국 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아니면 1997년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여러 계층 집단들의 관계도를 생각해보시지요. 대우그룹 등 '망하는 재벌'도 더러 있긴 있었지만, 삼성을 위시한 대다수 재벌들은 그냥 그 문어발식 사업 확장, 계열사 늘리기를 계속 거듭해왔으며, 재벌 직접 피고용자와 중소기업 근로자 사이의 '격차'만이 계속 더 확대돼 왔습니다. 즉 노동시장 안에서의 '서열'이 재확인된 것이죠.

 

이번 '코로나' 사태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여러 지역에서의 국가 행정력과 준비력, 그리고 의료체제의 견고함을 '시험'한 셈입니다. 시험 결과는? 아주 크게 봐서는, 동아시아 대륙과 북유럽은 비교적 무난하게 (?) 통과돼 가고 있지만, 미국과 남유럽, 일본은 사실상 '낙제점'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동아시아부터 봅시다. 대체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다 국가 행정력, 동원력은 매우 좋은 편이지만, 경제-정치 구조상 여러 가지 '차이'들을 나타내죠. 대만이나 한국처럼 정치적 경쟁이 있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일본처럼 사실상의 일당 지배 체제도 있고, 싱가포르나 한국처럼 외부 노출이 강한 경제들이 있는가 하면 일본처럼 내수 본위의, 자기 완결성이 더 강한 경제들이 있습니다.

 

'코로나'라는 시험의 결과, 정치적 경쟁이 존재하고, 외부 노출이 커서 보다 공격적인 대응으로 대외 교역 등을 빨리빨리 정상화시켜야 하는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은 'A'를 받았지만, 정치 경쟁이 없는데다가 내부 소비 경제를 절대 멈추게끔 하려 하지 않았던 일본의 국가적 은폐 작전은 이미 국제적으로 'F'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에서는 이태리나 스페인 등 오랫동안 '긴축 예산' 등으로 정상적인 준비를 하지 못한 의료체제들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들어갔는데,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은 비록 환자들이 많아도 의료체제는 전혀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코로나' 참극의 진앙지로 바로 미국이 부상된 것은, 공공의료 자체가 잘 없는 미국식 시스템의 치명적 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것은, 바로 '코로나'가 드러낸 각국 안에서의 각종 '격차'들의 수준입니다. 공공부문 종사자들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코로나'로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껏해봐야 재택근무로의 전환 정도이지요. 항공업과 숙박업 등 가장 타격을 받은 일부 부문 이외에는 대기업 직접 피고용자들도 그렇게까지 '코로나'로 불이익을 본 게 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중소기업들의 자금 흐름은 많은 문제를 보였고 특히 서비스 부문, 유통 부문에서의 영세 업체들의 경우엔 타격은 엄청 심했습니다. 지금 노르웨이 같으면 전체 근로인구의 15%나 실업자나 휴직자들인데, 가장 실업과 휴직에 많은 노출된 것은 저학력자와 중소기업 종사자, 여성, 20대 노동자, 그리고 이민자들입니다.

 

말하자면 노르웨이 사회의 '약자'일수록 실업이나 휴직을 당할 확률이 훨씬 높아지죠. 미국의 시카고에서 '코로나' 사망자의 70%나 흑인이 되는 등 여태까지의 종족적, 인종적 불평등들은 이번 '코로나' 사태로 재확인되고 더더욱 더 커진 것입니다. 미국에서 '코로나'로 벌이를 잃어 '식량의 위기', 즉 굶을 위험에 빠진 쪽은 무엇보다는 20~30대의 비백인 자영업자나 '긱 경제' (플랫폼 경제) 종사자지요. 평상시에 어려웠던 사람들은, 인제 기아 직전의 상태로 몰린 것입니다.

 

'코로나''진실의 순간'이 보여준 것은 나라 사이의 행정력과 준비력, 질병 대처를 위한 정치적 의지 등의 '차이'와 함께 각 나라 안에서의 그 무서운 '사회적 격차'의 어마어마함입니다. 각 사회 안에서는 그 내부자, 즉 중상층 이상의 구성원이나 공공부문, 대기업 종사자들은 그저 '불편' 정도를 느끼지만, 그 외부자, 즉 중소기업 노동자나 불안 노동자, 자영업자 등은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를 겪는 것입니다.

 

'주류' 국민들도 힘들지만, 미국에서의 아시아계나 한국에서의 국내 거주의 조선족 등은 계속해서 차별적 시선에 노출돼 있습니다 (미국은 '시선'에다가 아예 물리적 폭력의 경우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누가 봐도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본주의가 그다지 효율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앞으로 성장이 아닌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각종의 생태적, 기후 위기, 참극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자본주의를 계속 고집해야 할 이유가 뭘까요? 지금부터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보다 평등, 생태, 지속성 지향적인 협동적 체제의 모색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사 등록 20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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