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세계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솔직히 "큰 그림"을 보느라면 불길한 예감 이외에는 드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통 10년마다 한번 닥치는 주기적인 불경기(예전에는 1987년의 세계 증시 폭락, 1997~8년의 아세아 금융위기, 2008년의 세계공황 등이 일어난 바 있습니다....)에다가 장기적인 주기적 위기(1945년에 시작된 70~80년간 콘드라티예브 주기의 최종적 단계)와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생태 위기 등이 중첩되어서 인류는 말그대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겁니다.
미국 이외의 모든 주요 경제들이 거의 다 침체 국면인데, 미국의 호황도 사실 가짜에 가깝습니다. 국채 판매 피라미드와 엄청난 재정적 적자 등에 뒷받침되어지고, 실질 임금과 내수력 인상으로 받쳐지지 않는 “호황”이기에 2008년과 같은 위기가 올 것은 시간 문제죠.
이 상황에서는 국내 경제 위기를 군비 예산 부풀리기로 일시적으로나마 모면하려 하고, 나아가서 세계적 불안 속에서 모종의 득을 취해보려는 주요 국가 지배자들이 거의 다 호전적으로 나갑니다. 물론 호전성이 제일 강한 것은 미국이죠.
대중국 경제전쟁 (“무역전쟁”)으로 미국 경제가 궁극적으로 득보다 실을 더 많이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관세 인상으로 미국 국내에서 중국산 물건 값이 오르면 물가 인플레가 오르고 저소득층이 타격을 받을 뿐입니다....) 트럼프가 대중국 호전성을 이렇게 발휘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세력을 언젠가 동북아에서 내쫓을 첨단 기술 대국이 되는 것을, 인제 막바지에 어떻게든 방해해보려는 겁니다. 물론 1백만 명 가까운 回纥(위구르)민족을 “노동개조”수용소에 가두는 등 “소수자 단속”에 나선 중국이나 군국주의적 문헌인 <교육칙어>(1890)를 인제 되살리려는 일본도 결코 만만한 호전성은 아닙니다. 세계 전체의 군비는 이미 냉전 말기의 수준을 넘어 천정부지로 오르기만 하고....
트럼프는 중국과의 장기 대치와 이란에 대한 공격 등을 준비하는 동시에 세계는 가면 갈수록 치명적인 기온 위기 등에 처해집니다. 여름마다의 살인 폭염은 인제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불란서나 이태리에서도 그저 일상입니다. 살인 폭염으로 죽는 사람들이 나라마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지만, 자본제 국민국가로 찢겨진 인류는 속수무대책입니다.
만약 앞으로 30년간 세계평균기온이 약 3도 오른다면 바다 수면이 올라 1억5천만 명이 사는 방글라데시의 대부분의 국토인 저지 지대를 그냥 삼켜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1억 넘을 그쪽 “기후 피난민”들을 받아들일 나라라도 있을까요? 600명이 될까 말까 한 예멘 피난민으로 인해 금년에 한국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가를 상기해보시고 앞으로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시죠.
대한민국의 이슬람혐오주의와 인종주의도 수준급이지만, 유럽의 “선진국”이나 “복지국가”들은 더하면 더할 겁니다. 제도적으로 난민 수용을 할 수 있게끔 (아직도) 돼 있어도 극우들의 발호는 이 제도들도 위협하죠. 그나마 난민에 가장 너그러웠던 스웨덴에서마저도 극우 유사파쇼 정당이 지난 총선에서 17% 이상 득표했다면, 앞으로 유럽 정치에 닥칠 암운들을 예상하고도 남죠.
지구가 망가져가고 지배자들이 전쟁질 준비로 바쁘고 경제적 위기가 머지않아 닥칠 셈이고... 불행하고 답답한 세상이죠. 이 상서롭지 못한 “큰 그림”에서 그나마 위안으로 보이는 상황 딱 하나는 바로 한/조선반도 평화 프로세스입니다. 미국이 주도해온 제재 등 때문에 각종의 장벽들을 맞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북/북남 사이의 가까워짐은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비무장지대 지뢰들이 제거되고 이산가족 상시 상봉이 현실화된다면 상호/호상 군축과 통신 등의 복원을 곧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동시에 북측은 대미 외교에 힘을 실어 상당한 “평화 의지”를 계속 내비칩니다. 전세계적인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이런 “다행스러운 예외”가 가능한 이유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한 이유는 물론 작년 촛불들의 여열입니다. 촛불의 힘으로 집권한 문 대통령은 일단 “개혁”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하는데, 내치는 만만치 않습니다. 9.13 대책으로 아파트값 상승률 폭이 둔화된다 해도, 아무리 맞벌이를 한다 해도 평균 서울 아파트 (약 5억) 하나 사려면 39년동안 저축해야 한다는 이 미친 땅값의 세상은 당장 바뀌지 않습니다.
문 정권이 임대료가 싼 많은 영구 임대 주택들을 빨리 지을만한 추진력도 있는 것은 아니고... 재벌개혁은 사실상 안 될 것으로 봐야 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민간부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내치 개혁 성과가 이렇게 미미한데, 그나마 촛불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평화 정책”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남북/북남 문제에 문 정권이 좀 열심히 매달리죠. 또 하나의 이유라면, 대중국 장기대치에 들어간 미국의 중국 우방 북조선 “꼬시기” 의지입니다. 미국이 “김심” 잡기에 바쁘기에 중국도 질세라 제재를 무시하면서 국경무역을 사실상 눈감아주고... 그렇게 해서 북조선이 미증유의 제재 속에서도 나름 개발, 성장돼 갑니다.
세계적 불행 속에서는 지금 한/조선반도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예외”입니다. 한데 트럼프의 솔직한(?) 발언대로 한국이 미국의 “승인”(사실,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주권 제한의 상황 속에서는 이 “다행스러운 예외”의 지속성에 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평화 정책이 제대로 지속, 강화되자면 한국의 주권이 어느 정도 확보돼야 합니다.
참, 사회주의자인 저 같은 인간이 “국가 주권 확보”를 외쳐대는 꼴은 좀 이상하죠? 정상적으로 보수가 해야 할 소리를, 한국에서 국제주의적 사회주의나 하는 겁니다. 그만큼 한국 보수들이 할 일을 하지 않는 거죠. 사실 한국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자한당의 극우들도 민주당의 온건우파도 미국의 “승인”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반쪽 식민지적 상황을 이미 기존사실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기사 등록 201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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