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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1917년의 기원: 카우츠키, 국가, 러시아 혁명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7. 25.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미래

 


이 기사는 초기 칼 카우츠키와 제정 러시아 전역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국가와 혁명에 대한 전망을 재검토한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위해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의 "정설"은 볼셰비키가 반자본주의적 권력 장악을 이끄는 데에 충분한 정치적 근거가 됐고,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카우츠키를 뛰어넘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는 통설은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이자 역사학자이며 볼셰비키와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이처럼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출처:

https://johnriddell.wordpress.com/2016/10/13/the-roots-of-1917-kautsky-the-state-and-revolution-in-imperial-russia/

 

100주년 기념 토론)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 재평가 - 관심과 참가 부탁드립니다  



폴란드어로 번역된 카우츠키의 <에어푸르트 강령>  



1918 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발표 된 이래 이 주제에 대한 사회주의 이론가 칼 카우츠키의 견해는 자주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변혁을 점진주의적으로 활용하자는 주장과 등치되어 왔다. 레닌의 영향력있는 팜플렛은 이후로 많은 영향을 남겨, 많은 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근본적으로 비맑스주의적인 접근이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의 치명적 결함이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 볼셰비키 지도자가 1917년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자고 선동한 것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정통" 사회민주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의 입장과 선구적으로 단절하는 일이었다. 최근의 한 발언을 인용하자면, “[비볼셰비키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정당들의 실천은 마르크스의 국가론과 중대한 차이가 있는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비판받는데, 이는 그가 고타강령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에르푸르트 강령에 대한 엥겔스의 그와 유사한 비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낡은 국가를 혁명으로 분쇄하지 않고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독일 [사민]당의 주장은 심각한 오류라고 주장했다.”

 

카우츠키에 대한 벤 루이스의 중요한 선구자적 저작이 분명히 보여주었듯, 그러한 비판은 사실과 다르고 독일과 제정 러시아 등지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실제로 어떤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은폐한다. 루이스의 연구성과에 기반하여 그것을 보다 발전시키면서, 나는 초기 사회민주주의 "정설"1914년 이후의 계급협조주의적 개혁주의보다는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방향과 더 공통점이 많은 혁명적[ruptural] 반자본주의 전략을 표방하였음을 보여줄 것이다.

 

카우츠키가 1910년 이후 국가 권력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의 초기 지향 - 즉 레닌을 비롯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한 세대를 훈련시켰던 전략 - 은 자본주의 국가의 평화적 이용 가능성을 부정하고 지속적으로 상비군의 해체를 촉구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모델과 맥을 같이하면서, 민주 공화국을 옹호하는 "정통적" 입장은 군주제를 전복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지배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 자신과 달리, 제정 러시아의 가장 일관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17년 혁명 당시 이 급진적 입장을 지지했다.

 

또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렌즈를 통해 1918년 이전의 역사를 읽는 것은 러시아 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1917년 말까지 이루어진 주요한 전략적 논쟁들을 검토하는 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차르 전제정 하에서는 사실상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제주의적 차르 정권을 폭력적으로 타도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국가의 점진적 변화에 대해서는 큰 갈등이 없었다.

 

19172월 제정이 전복된 이후에는 자본가 계급과 연합 정부를 건설할 것인지 아닌지, 혹은 모종의 독립적인 노동자 농민 정부를 세울 것인지 아닌지가 정치권력의 핵심적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1917년 혁명 동안 주된 정치적 쟁점이었던 이 문제에 대해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는 분명히 선명한 계급적 노선에 충실했다.

 

1917년과 23년 사이에 이론적실천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노동자 혁명에 대한 오랜 정통적입장에서 벗어난 것은 - 1909 년 이후의 카우츠키 (Kautsky)를 비롯한 - 개혁주의자들이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 권력에 대한 지배적 접근은 10월 혁명 이후에 발전했지만, 국가와 혁명에 대한 카우츠키의 초기 입장과 차이보다는 연속성이 크다. 초기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비판을 하든 간에, 그것은 볼셰비키와 핀란드 사회 주의자들이 20세기 최초의 반자본주의적 권력 장악을 이끄는 데 충분한 반체제 정치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제정 러시아와 독일에서 카우츠키의 영향

 

정치적 실천이 혁명적 이론의 궁극적인 기준이라면, 카우츠키의 전략은 그 전망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정당들의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끌었던 당이 실천에서 어떠했는지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독일이 아니라 제정 러시아를 검토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제정 러시아보다 카우츠키의 저작들이 인기와 영향력을 가진 곳은 없었다. 러시아에서 그의 저작들은 사실상 민족을 막론하고 제국의 가장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의 주된 기반으로 기능했다. 카우츠키가 제정 러시아에서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혁명적인 정치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 높았기 때문이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이 현상을 언급했다.

 

몇몇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이 카우츠키가 독일보다 러시아에서 더 많이 읽혀지고 있다고 농담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농담은 처음 그것을 의심하게 만든 사람들보다 훨씬 심오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도록 하자. 러시아 노동자들은 1905 년에 가장 빼어난 사회민주주의 저작 및 이러한 저작들의 판본들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보다 발전한 이웃 나라의 방대한 경험들을 우리 노동운동의 젊은 토지에, 말하자면 급속하게 이식했다.”

 

레닌이 암시했듯, 카우츠키의 저술은 심지어 독일 사회민주당(SPD)보다 제정 러시아에서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우츠키의 이론이 독일 사회민주당이 혁명 정치를 폐기하고 그 결과 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고 1918~23년의 독일 혁명을 질식시키는 데 이른 원인 혹은 그 반영으로 자주 오도되어왔기 때문에 이 점은 시작부터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폴 블랙리지(Paul Blackledge)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1914년까지 수십 년 동안 독일의 사회민주주의가 독일 자본주의 국가에 종속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변명하는 의회주의에 모든 정치를 종속시켰다." 이러한 해석은 카우츠키의 초기 정치 내용과 SPD 퇴행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잘못 진단한다. 사실 적어도 1906부터 SPD 지도부는 "정통파"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론 일반과 특히 카우츠키의 저작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당, 노동조합, 의회의 전임 상근자들로 구성되었다

 

길버트 바디아(Gilbert Badia)가 설명했듯이, "(노동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의 새로운 지도부는 정치 이론과 그것들을 전면으로 가져온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혹은 숫제 불신을 보여주었다." SPD의 역사적 투항보다 훨씬 전인 1909년에 이르면 당 내에서 카우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역사 학자 한스-요셉 스타인버그(Hans-Josef Steinberg)의 말을 빌리자면, 1890년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서사는 "이론 일반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였다.

 

SPD 관료들의 "비이론적" 실용주의는 상근자 계층으로서 그들의 고유한 물질적 이해와 결합하여 이들이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무의식적으로 흡수하고 자본주의 체제로 실질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촉진했다. 독일 사민당을 많은 서유럽 국가들의 당들처럼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지지자로 바꿔놓은 것은 무엇보다 이 보수적인 (그리고 비이론적인) 상근자 집단의 출현이었다.

 

이 원칙 없는 SPD 지도부에게는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을 지지하고 1918년 이후 부르주아지와 동맹하여 자본주의 공화국을 이끌기로 한 결정이 카우츠키와 SPD 전체가 주장했던 전통적 입장과 대놓고 배치된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카우츠키가 1909년 이후 SPD 관료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초기 입장의 많은 부분을 번복했으며 10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전에 말하고 실천했던 바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국가와 혁명에 대한 카우츠키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급진적 지향이 제 2 인터내셔널의 "정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카우츠키 대 수정주의

 

카우츠키가 오늘날 사회주의 변혁에 관한 점진주의적 전망과 연관되어 거론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를 정확히 그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 제일가는 인물로 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잖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2인터내셔널에서 진행되고 있던 "정통주의""수정주의" 사이의 권력 장악 논쟁에서 카우츠키는 의심의 여지없이 급진적 관점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있는 이론가였다.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은 간단했다. 많은 이들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을 필요성 자체를 부인했다. 사회적 평등과 정의는 민주적인 권리, 공공 서비스, 노동자 계급 조직 (노동조합, 협동조합 등)을 점진적으로 확장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자의 권력 장악에 찬성했지만 그러한 목표가 기존의 민주적 제도 내에서 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선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자유와 의회민주주의가 있는 상황에서는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혁주의 이론가 에드워드 베른스타인(Edward Bernstein)의 유명한 선언처럼,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운동 자체가 모든 것이다."

 

제정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대 분파를 성급하게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변혁에 관한 이 논쟁이 당면한 차르 전제정 하의 상황과는 대체로 무관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정치적 자유나 의회가 없는 상황에서, 당시의 불법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모두 현존하는 국가가 무력 혁명을 통해 분쇄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1903년 폴란드 사회당(PPS)은 서유럽과 달리 "민족을 막론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주요한 장애물인 차르 제정을 제거하기 위해 무력 혁명을 선도하는 것이 첫걸음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카우츠키가 1904년에 설명했듯이, 그가 독일의 경우에 대해 주창했던 특별하고 조심스러운 전술적 입장은 제정 러시아의 전제주의 하에서까지 반드시 적합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인 상태에 처해 있는것이었다.

 

19172월까지 제정 러시아에서 국가 권력에 관한 주된 논쟁은 무장 투쟁으로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호소한 사회주의자들과 입헌군주정과 평화적 압력 전술을 주장한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있었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대개 19172월 혁명과 임시 정부의 설립 이후에야 부르주아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당면한 현안이 되었다.

 

오직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핀란드 대공국(의회,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을 가진 러시아 제국의 유일한 지역)에서만 "수정주의" 국가관이 영향력 있고 실천적인 정치적 문제가 되었는데, 차르 전제정 하의 상황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05년 혁명 이전에, 핀란드 노동자당은 대놓고 개혁주의를 표방했다.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는 드물었고 계급협조주의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다. 따라서 1899년 핀란드 노동자당(Finnish Workers 'Party: 1903년에 핀란드 사회민주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의 창립 강령은 권력 장악에 대한 요구를 회피했다. 지도자들은 대신에 "공동체와 국가의 권력에 참여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마르크스주의 "정통" 노선은 그러한 온건한 관점과는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모든 정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자신과 모든 피억압자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단언했다. 폴란드 사회당(Polish Socialist Party)1892년 창립 강령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정복을 제일 목표로 설정한다"고 선언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계급 대립의 깊이를 감안할 때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국가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점진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여러 정부 부처를 점진적으로 장악한다는 발상은 출산을 몇 달에 걸쳐 나눠서 하려는 시도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the Social Democracy of the Kingdom of Poland and Lithuania)1900년도 창립 강령은 정통적 합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오늘날의 국가는 자본에 복무하는 조직이며, 그 모든 행동은 자본의 이익에 지배받는다. 오늘날의 정부는 오직 자본주의 계급의 의지를 실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의 임무는 이러한 형태의 국가를 폐지하고, 국가를 자본주의의 손에서 빼앗고, 인민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도록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정치권력을 분쇄함으로써만, 정치적 국가를 패퇴시킴으로써만, 노동자들은 착취를 폐절하고 노동자 인민 대중 전체의 복리를 보장한다는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전환이라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카우츠키를 비롯한 급진주의자들은 오직 혁명적 단절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배 계급의 피할 수 없는 저항을 "결정적인 투쟁을 통해"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단절이 반드시 필요했다.

 

폴란드의 맑스주의자 카지미에르츠 켈레스-크라우츠(Kazimierz Kelles-Krauz)는 많은 영향력을 지녔던 카우츠키의 1902년 팜플렛 <사회주의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에 대한 진지한 사회주의적 토론을 개시했다고 칭찬했다. 실제로, 카우츠키의 긴 팜플렛은 제정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에서 가장 급진적인 이들의 손으로 거의 즉시 번역되고 재출간되고 불법적으로 배포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카우츠키와 그 사상적 동료들이 혁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은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판과 연결되어 있다. “정통사회주의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은 민주주의를 (쟁취는 고사하고) 일관되게 방어하는 것을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핀란드의 정통마르크스주의자 에드워드 발파스는 전형적으로 그다운 태도로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부르주아지의 정치가 점점 반민주적으로 되어가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지배와 충돌하는 길로 접어들게끔 할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견해로, 자본주의 하의 의회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와 진정한 의회제의 부패한 모조품이었다. 자본가들의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이 민주주의 절차를 치명적으로 침식한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기 위해 공화국이 제공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들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노동자들에 대한 기만을 자랑한다. 체계적으로 대중을 부패시킴으로써, 온 나라에 상업적으로 매수할 수 있는 언론이 넘치게 함으로써, 선거에서 표를 매수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포섭함으로써 이러한 노력들은 [민주]공화국에서 그 어디에서보다도 큰 성공을 거둔다.”

 

국가 관료제의 팽창 또한 그 못지않게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이것을 관료적 기생이라고 불렀다. “남아도는 유형의 공무원들이 번창하고 행정부와 비선출직 정부 기구의 힘이 커지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의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우츠키는 정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대의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회에 대한 정부의 권력을 분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에르푸르트 강령은 뒤이어 작성된 제정 러시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강령과 마찬가지로 모든 국가 관료의 선출과 광범위한 지방 자치의 정립을 요구했다.

 

정통마르크스주의자들에 따르면 군사주의즉 국가의 무장력이 대규모로 팽창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카우츠키의 분석에 따라, PPS의 마리앙 비엘레키(Marien Bielecki)군사주의의 불길한 팽창이 유럽 국가들의 평화로운 민주적 변혁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우츠키는 현대 정부들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상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존의 주요한 국가 형태와 기구들을 자기해방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쁘띠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코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국가를 지배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것은 단지 경찰 관료들, 관료제의 수장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늘 상층 계급에서 선택되고 극히 가까운 연고를 통해 상층 계급에 가세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민 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대신 그들의 위에서 그들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것은 이 기구들의 본성이었다. 이것은 그 기구들이 언제나 반민주적이고 귀족적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전반적 분석으로부터 두 가지 핵심적인 전술적 결론이 도출되었다. 첫째, 카우츠키는 자본주의 하의 의회가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변혁을 추진하기 위해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기존 국가기구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다수파로 선출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길을 열 수 있다는 개혁주의적 믿음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또한, 의회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강조가 사회주의적 체제 전복이 인구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만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1910년 전에 그는 사회주의 변혁을 기도하기 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다.

 

카우츠키의 설명에 따르면 부르주아지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정부의 선출을 저지하거나 무효화하기 위해 힘에 의존할 확률이 매우 높았고, 그렇기에 정치와 제도의 혁명적 단절의 순간을 상정해야만 했다. 독일의 개혁주의자 막스 마우렌브레허(Max Maurenbrecher)와 논쟁하면서 카우츠키는 이렇게 썼다.

 

그는 우리가 자리를 하나하나 차지해가면서 그들의 것을 몰수할 준비를 하는 동안 착취자들이 선량하게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회 활동이 부르주아지의 우위를 위협하는 상황을 잠시 상상해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부르주아지는 의회 형태를 끝장내려고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들은 조용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투항하느니 보통 선거, 직접 선거, 비밀 선거를 폐지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순전히 의회적인 투쟁에 우리 스스로를 가둘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카우츠키는 그 결과로 일어날 혁명이 평화적일 것인지 폭력적일 것인지는 상황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희망과 선호는 명백히 전자를 지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력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반면, 카우츠키는 일관되게 정통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평화적 혁명을 바라고 주장하지만 물리적 수단을 사용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그렇게 하더라도 자본주의자들은 폭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폭력 사용을 미리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의회주의 크레틴병과 정치인 같은 교활함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카우츠키는 총파업을 조직하고 군대의 하층 병사들을 포섭한다면 평화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혁명이 폭력으로 귀결될 것인가는 지배 계급의 반응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예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노동자들은 무장할 필요가 있었다.

 

힘은 모든 새로운 사회의 산파라는 마르크스의 발언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옳다. 어떤 지배계급도 자발적으로 차분하게 권력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폭력이 새로운 사회의 산파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은 아니다. 부상하는 계급은 구 지배계급을 없애기 위해 힘의 필수 요소들을 수중에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무조건 그것들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향은 별로 개혁주의적이지 않다. 다만 초기 코민테른의 전략과 달리 카우츠키는 단절을 위한 전투는 오로지 지배계급이 민주적 기구나 정치적 자유에 반대하게 될 때에야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하기는 했다. 이 상대적으로 방어적인 지향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적들을 물리치기에 충분히 강해지기 전에 프롤레타리아의 축적된 힘을 짓밟고 파괴할 수 있는 명분을 지배체제에 주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전술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했던 카우츠키의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은 혁명적 위기가 일어나 사회주의자들에게 고유한 정치적 과제를 제기하겠지만, 이 사이에 당은 지배계급과의 섣부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해야 했다. 이러한 관점은 혁명 과정에서 대중 행동과 자발적봉기의 중심적 역할에 대한 전략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한 통찰을 구체화한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05년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이며 볼셰비키들은 1917년에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좀더 이른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도 카우츠키의 입장과 이러한 차이를 드러낸 사람들이 있었다.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잊혀지고 만 한 논쟁에서, PPS의 지도자 카지미에르 켈레스 크라우츠(Kazimierz Kelles-Krauz)와 마리앙 비엘레키(Marien Bielecki)1904년에 이미 카우츠키의 접근이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제정 러시아뿐만 아니라)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대중 총파업과 자본가 국가에 맞선 무장봉기를 적극적으로 선동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3년부터 카우츠키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장한 또 하나의 핵심적인 전략적 결론은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조건에서도 자본가 정부에 참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카우츠키나 볼셰비키 같은 정통마르크스주의자 몇몇은 러시아의 이례적인 환경에서는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지는 않으면서도 민주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 노동자(혹은 노동자 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를 지지했다.

 

멘셰비키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대체로 노동자 정부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결과를 낳을 것인데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은 그럴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이런 관점을 반대했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핵심적인 지점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모든 조류가 자본가계급과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연립 정부를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행정주의(ministerialism: 사회주의자들이 자본가 정부에 입각하는 노선 옮긴이)”에 대한 이러한 반대가 갖는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로 이것이 1917년과 그 이후의 상당한 기간 동안에 정부에 관한 문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와 함께 연립 정부에 참여할 것인가는 1917년 제정 러시아의 혁명적 물결 속에서 국가 권력 문제에 관해 개혁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을 가르는 근본적 구분선이었다. 물리력의 사용이나 최선의 노동자 국가의 형태에 관한 논쟁들보다 훨씬 더 그러했다.

 

나중에 인민전선으로 알려지게 될 이 [노선]에 대한 중요한 논쟁의 기원은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유대주의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난 뒤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이 우익의 위협으로부터 공화국을 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한 것이 그 해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지도자 장 조레스(Jean Jaures) 같은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성취를 방어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라는 근거로 밀레랑을 지지했다.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국가를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변혁하는 데서 중요한 전략적 단계이기도 했다.

 

이 조치와 그것이 가지는 전략적 함의에 대해 정통사회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 사이에 당장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카우츠키나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급진주의자들은 권력을 조금씩 장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오직 노동계급이 분명한 계급 전선에 설 때만, 즉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국가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때만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러 해에 걸친 갈등과 논쟁 끝에, 급진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이 확실히 채택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1903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드레스덴 회의와 1904년 제2인터내셔널의 암스테르담 회의는 사회주의자들이 어떤 자본가 정부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하는 (카우츠키가 작성한) 역사적 결의안을 채택했다.

 

본 회의는 계급투쟁에 기반해 있으며 시험되고 검증된 우리의 전술을 바꾸고 정치권력의 장악을 기존 질서와 타협하면서 부르주아지와 고상하게 투쟁하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모든 수정주의적 시도들을 힘주어 거부한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전술은 부르주아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가능한 최대한도로 신속하게 변혁하고자 하는 즉 가장 좋은 의미에서 혁명적인 정당 - 을 부르주아 사회를 개혁하는 데 만족하는 정당으로 바꿔놓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 회의는 수정주의적 경향과 반대로 계급 대립이 사라지기는커녕 심화될 것이라 확신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당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기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해 어떤 책임도 거부하며, 따라서 지배계급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복무하는 어떠한 조치도 승인할 수 없다. 2)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어떠한 정부에 참여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쓴 마르크스주의와 공화국에 대한 일련의 중요한 글들에서 카우츠키는 이 결의안의 기저에 깔린 전략을 방어하고 세밀화했다. 이 글의 핵심 논지들은 상당수 위에서 인용했으므로, 여기서는 위기의 순간에 자본주의 국가를 곧추세우는 데 개혁주의자들이 수행하는 필수적 역할에 대한 카우츠키의 선구자적인 그리고 예언자적인 분석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카우츠키는 밀레랑이 정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프랑스의 약한 부르주아지가 사회주의자들의 지지 없이는 통치할 수 없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거대한 성장은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에 대한 기만을 어느 때보다도 긴급히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수단들로 노동자들을 사회주의로부터 형식적으로 전취해오고 그들의 너절한 깃발에 노동자들을 붙들어 매두는 것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들은 너무 많은 타협을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를 전부 잃어버렸다. 부르주아의 목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의회 대표들을 포섭해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이 너무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 시행할 수 없는 부르주아 정책들을 시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더 이상 사회주의를 죽여 없앨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사회주의를 길들여 종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개혁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의 연합이 결국 개혁주의자들로 하여금 혁명적 위기에서 바리케이트의 반대편에 서게 만들 것이라는 역사적 증거로써 카우츠키는 1871년 파리 꼬뮨을 압살하는 데서 프랑스의 온건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Louis Blanc)이 한 역할을 지적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부르주아지의 가장 진보적이고 고귀한 부위와 협력해야 한다는 그의 거짓된 믿음은 그가 프롤레타리아트를 패퇴시키기 위해 농촌 대지주들의 가장 후진적이고 폭력적인 분자들과 협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 때 그의 이론적 견해나 심정적 공감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계급적 분단은 그의 경건한 소망보다 강했다.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넘어왔으나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적으로 합류하고 부르주아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할 용기와 결의를 갖지 못한 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공감할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나 쉽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적들의 편으로 밀려날 수 있다.”

 

1917년에서 23년 사이에 러시아와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의 흐름은 그의 분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이게도, 루이 블랑과 알렉산드르 밀레랑이 그랬듯 카우츠키 역시 결국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의 편에 서고 말았다. 레닌을 인용하자면, 카우츠키는 배신자가 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는 이전의 급진적 신념을 져버렸다.

 

사민당의 관료제에 굴복하고 이전의 비타협적 노선을 버리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1917년 이후 [블랑과 밀레랑과] 마찬가지로 독일 자본가들과의 연합을 주장하고 그들의 국가에 사민당이 참여하는 것을 변호했다. 이것은 독일, 러시아, 그리고 세계의 노동자 계급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밀레랑의 행정주의(ministerialism)” 노선을 따를 것인지는 1917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도 결정적인 정치적 현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전제주의의 무게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할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핀란드에서만 이 논쟁은 당면 현안으로서 제기될 수 있었고, 핀란드의 개혁주의 세력과 정통주의세력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고도 반복적으로 부딪혔다. Yrjö Makelin을 비롯한 당내의 협조주의 활동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이 핀란드 민족 정부에 참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밀레랑이 프랑스 정부에 들어간 것을 칭찬하고 모방할 만한 긍정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핀란드 정통파의 지도자 Edvard Valpas는 사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의 연립 정부라는 발상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밀레랑의 경험이야말로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노동자의 대의를 진전시키리라는 믿음이 기만임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실천적으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적 계급투쟁으로부터 자본주의 국가를 방어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190511월 핀란드 사회민주당(Finnish Social Democracy)의 온건파 지도자 J.K. Kari가 핀란드 정부에 합류했을 때 이것은 화급한 실천적 쟁점이 되었다. 부상하고 있던 사회민주당의 정통파세력은 부르주아 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칙에 위배된다고 단언하면서 당대회에 Kari를 제명할 것을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Kari의 제명이 예증하듯이,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독일 사민당과 달리 통합주의적, 계급협조주의적 방향으로 서서히 변화해가지 않았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05년 이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더욱 신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자유가 있는 상황에서 활동하는 유럽의 대중적 사회주의 정당들 가운데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핀란드가 제정 러시아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핀란드 사회민주주의는 그 숱한 서구의 사회주의 경향들과 비슷한 타협주의(accommodationist)의 길로 퇴행해갔을 가능성이 높다. [서구 사회주의 경향들은] 점점 관료화되고 의회에 통합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쯤에는 급진주의적 지도자들을 내부의 소수자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핀란드의 사회민주당은 유럽의 모든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들과 달리 1905년 혁명에 직접 참여했다. 가을의 총파업은 핀란드의 도시와 시골의 프롤레타리아들을 급진화시켰고 폭발적 대중 봉기를 촉진했는데, 이 봉기들은 당의 구 지도부를 쓸어내고 철저히 계급적으로 독립적인 전망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헌신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생 집단을 당내에 유입시켰다.

 

그리하여, 핀란드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늦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노동운동이 상층 계급과의 연대라는 오래된 전통과 단절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05년 이후 핀란드 사회주의의 경험은 정치적 자유와 의회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내심 있는 정통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동학과 가능성을 분석하기에 특히 유익한 사례가 된다.

 

민주 공화국과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앞부분에서 우리는 정통사회주의자들이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대안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가? 짧게 말하자면 공화국이었다.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이 이 민주 공화정을 정확히 어떤 것으로 상상했는지 명확하게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이 단순히 왕정이 부재한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와 연관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진정한 민주적 공화주의, 진정한 의회제는 급진적이고 궁극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전망이었다.

 

1917년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에서와 달리 이 시기에 공화국민주주의의 개념은 내재적으로 부르주아지나 자본주의와 연결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ederick Engels)의 견해로,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우리의 당과 노동 계급이 민주공화국의 형태로만 지배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이미 보여주었듯이, 후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구체적 형태라고까지 할 수 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진정한 공화국은 단지 왕정을 없애버리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했다. 진정한 공화국은 상비군을 해체하고, 모든 국가 관료들을 선출하고, 지방 자치에 행정 [기능]을 이양하고, “대의 기구의 모든 구성원을 조직된 인민의 통제와 규율에종속시켜야 했다. 그래서 카우츠키는 미국과 프랑스 정부가 공화국을 자칭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공화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쓴 카우츠키의 중요한 글들은 이상적 민주 공화국의 모델로 1871년 파리 꼬뮌을 든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서 국가 형태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우리는 현재 지배계급이 중앙집권적 군주제의 모든 지배도구들로 무장하고 있는 [프랑스의] 3공화국과 같은 국가 형태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이것들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으로 부수는 일이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이다. 현재와 같이 구성된 제3공화국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의 기반을 제공할 뿐이다. 프랑스 국가는 제1공화국과 꼬뮌의 헌법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 변혁될 때에야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110년이 넘게 노력하고 싸우고 피를 흘리며 얻으려 했던 바로 그러한 형태의 공화국, 그러한 형태의 정부가 될 수 있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그랬듯이 카우츠키는 국가 권력의 분쇄에 대한 유명한 요구를 담고있는 꼬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전적 서술을 명확하게 인용하고 칭송했다. “낡은 정부권력의 오로지 억압적이기만 한 기구들은 제거되어야 하는 반면, 그 정당한 기능들은 사회로부터 우위를 찬탈하는 권력으로부터 탈환되어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들에게 맡겨져야 했다.” 카우츠키는 기존 국가 기구의 비민주적 성격에 대한 그의 분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국가 권력의 장악이란 단순히 정부 부처들을 장악해서 당장 기존의 지배 수단들 제도화된 국가 교회, 관료제, 그리고 경찰 - 을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러한 기구들의 해체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권력 기구들을 폐지할 만큼 강력해지지 않는 한 개별적 정부 부처나 혹은 정부 전체를 접수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주는 인상과는 반대로 그 책은 기존 국가 체계를 해체해야 한다는 카우츠키의 명시적인 호소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나는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 체계를 분쇄해야 한다는 호소를 기이하거나 비정통적인것으로 여겼다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카우츠키가 공화국에 대해서 쓴 저술들은 1905년에 팜플렛 형태로 독일에서 재출간되었고 곧바로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하여,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Latvijas Sociāldemokrātiskās savienība, Latvian Social Democratic Union)Mikelis Valters 역시 1905년에 노동 계급은 기존 국가 기구를 단순히 접수해서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을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칭송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를 해체함으로써만 사회적, 민족적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발트해의 이 새로운 사회는 라트비아의 민족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작업을 통해서만 건설될 수 있으며, 이러한 작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 나라의 정치적 활동을 지배하게 될 때만 수행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오로지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세움으로써만 - 다시 말해 계급 전쟁을 첨예화하고 그 귀결까지 전진시킴으로써만 라트비아 땅에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함을 노동자계급에게 보여주기 위해 분투한다. 그것은 새로운 라트비아, 라트비아의 국가, 라트비아의 민주정이 될 것이다.”

 

카우츠키가 그랬듯 Valters 또한 이러한 주장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지배적인 입장으로부터 단절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사회주의자 Jānis Bērziņš-Ziemelis의 기사 민주공화국 만세역시 진정한 공화주의에 대한 카우츠키의 분석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의 결론은 서구의 어느 공화국도 제대로 된 의미에서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의 이상은 파리 꼬뮌 모델을 따르는 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저술에서 파리 꼬뮌에 대한 명시적인 찬양이 주요하거나 계속 나타나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군대와 군사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의 국가관은 바로 이 지점에서야말로 가장 급진적이었다. 국가와 혁명의 문제는 결국 어떤 사회 계급이 사회적으로 폭력을 독점할 수 있는지로 좁혀짐에도 불구하고, 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놀랄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아 왔다.”

 

역사 서술이 의회냐 소비에트냐, 중앙집중화냐 분산화냐, 기존의 국가 관료를 포함하냐, 아니냐 등 노동자 국가의 정치적 형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쟁에 집중해온 결과 근본적인 지점 하나가 은폐되어 왔다. 모든 정통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배계급의 군사 기구를 해체하자고 주장했다는 사실 말이다. 카우츠키의 말을 인용하자면, 군대야말로 가장 중요한지배의 수단이기에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라 보기 어렵다. 마르크스가 강조하고 카우츠키가 찬성의 의미로 반복했듯이, 상비군을 폐지하고 민병대로 대체하는 것은 파리 꼬뮌의 제일 훈령이었다.

 

카우츠키를 비롯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군사주의의 성장이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 경향 중 하나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주된 위협이라고 보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상비군을 폐지하고 인민이 무장해야 한다는 호소는 1892년 에르푸르트 강령의 핵심 항목이었다. 역사가 니콜라스 스타가르트(Nicholas Stargardt)가 지적했듯이, 초기 SPD군대를 정치적, 사회적, 재정적 비판의 핵심으로 삼았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인민의 무장만이 무력의 지배를 영원히 종결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룩셈부르크 역시 자본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과 지배는 군사주의에 응집되어있다. 군사 체제에 대한 투쟁을 저버린다면 실천적으로 현재 사회 체제에 대한 모든 투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선언했다.

제정 러시아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비중을 증명하듯, 모든 정통사회주의 정당들은 상비군의 해체와 민병대로의 대체를 당면 (최소) 요구 중 하나로 채택했다. 전형적인 예로, 혁명 우크라이나당(Revolutionary Ukrainian Party)1903년 최소강령은 현재의 상비군을 분쇄하고 민병대를 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일의 수정주의자들은 이와 반대로 사민당에 이러한 입장을 버릴 것을 요구함으로써 1899년에 신시대(Die Neue Zeit) 지면에서 카우츠키와 그 반대자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논쟁을 유발했다. 같은 해에 핀란드에서는 노동당(Workers Party)의 개혁주의적 창립 강령이 이 입장을 명확하게 삭제했다. 그 대신 강령은 군비 부담이 대폭 감축되어야 하며 평화의 이상이 선전되고 실현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을 뿐이었다.

 

1903년에 강령은 민병대와 군대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표준적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당의 좌선회를 반영했다. “정통주의지도부가 들어선 1917년에는 이 항목을 지지하는 투쟁이 반자본주의적 단절을 향해 혁명을 밀고 나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05년과 1917, 그리고 그 이후의 경험은 어떤 형태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데는 지배계급의 군대를 분쇄하는 것이 선결조건임을 증명했다. 구 국가관료들의 활용, 중앙집중화의 정도, 의회 제도의 역할 등과 관련하여, 노동자 농민의 지배라는 형태에 대한 레닌과 그 동지들의 견해는 1917년과 그 이후 시기에 자주 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이 모든 입장의 기저에 있는 정치적 상수는 기존 국가의 억압 기구를 우선 분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17322일 볼셰비키당의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당의 견해로, 모든 반혁명 세력에 대한 승리와 혁명의 발전 및 심화를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인민 일반의 무장과 특히 전국적 노동자 적군의 즉각적 창설뿐이다.”

 

군대 - 그리고 민주공화주의 일반 - 에 대한 정통적입장은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을 철저히 구분했다는 흔한 주장을 반박한다. 가령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이러한 분리가 수십년 동안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관료화된 당 지도부에 관해서는 이 비판이 무척 일리가 있다. 하지만 카우츠키에게는 꼭 이러한 비판이 적용된다고 볼 수 없다. 사실 그는 나중에 이행적(transitional)” 접근으로 알려지게 될 입장을 자주 표방했다.

 

부르주아지가 점점 보수화됨을 강조하면서 카우츠키는 상비군 폐지와 같은 최소강령의 민주주의 조항들이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으며 혁명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자주 주장하였다. 그 요구가 현재 시스템 하에서 쟁취될 수 없기 때문에 폴란드의 독립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에 대해 카우츠키는 그런 논리로라면 사민당은 민주공화국과 국가 공직자의 선출에 대한 요구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반론했다.

 

현재의 정치적 관계 하에서 국가 공직자의 선출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환상은 어떤 사람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상비군을 해체하는 것 역시 국가 관계의 급진적 변혁을 전제로만 가능했다. 그는 그러한 요구들이 현재 질서와 양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병대와 전국적 연방제의 건설에 대한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령을 작성할 때 사회민주주의는 지배계급과 그들의 정당이 그것을 이룩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지를 따진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구체적 요구들이 다른 정당들의 요구와 겹칠 수도 있고 그 중 일부가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와 양립 가능하기는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실천적 요구의 총체성이러한 요구들이 지향하는 목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정당들과 구분되었다.

 

카우츠키는 1893년에 이미 라인 동쪽 지역의 유럽 부르주아지는 너무 나약하고 소심해진 나머지 관료와 군대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 권력을 획득할 수 있을 때에야 분쇄될 수 있을 것이며, 군사주의적 전제정의 전복은 곧바로 정치권력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게 말해, “정통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오늘날의 투쟁과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사이에서 필수적인 혁명적 가교 역할을 할 것이었다.

 

국가와 1917년 혁명

 

1917년에 국가 권력에 관한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은 현존 국가 기구를 활용할 것이냐 파괴할 것이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 짜르 국가 기구는 2월 혁명에 의해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새로운 임시 정부는 폭력을 독점하고 사회 위에 군림하기는 커녕 억압 기구를 완전히 장악하지조차 못했던 극도로 약한 기구였다. 그것의 미약한 정치적 정통성은 대개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에 관한 쟁점은 근로 인민이 상층 계급과 연합할 것인지 모종의 독립적 권력을 창출할 것인지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1917년에는 이 논점이 혁명에서의 또 다른 주요한 정치적 쟁점을 과잉결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을 끝내고, 농지 개혁을 실시하고, 민족 자결권을 부여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긴급한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부르주아지와 단절해야 했다.

 

볼셰비키와 핀란드의 급진주의자들 및 기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국가 프로젝트와 전략이 공유했던 근본적인 공통점은 노동계급의 독립성과 정치권력 투쟁에서의 헤게모니에 대한 헌신이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합을 전략적으로 배격하고 계급연합 정부를 거부한 데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대부분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 및 기타 비러시아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1917년에 당의 오래된 정통입장을 버리고 연합 정부에 참여한 반면 볼셰비키와 다른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역사가 마이클 멜랑콘(Michael Melancon)의 말처럼,

 

부르주아 지향적인 정부나 사회주의-부르주아 연합 정부에 대한 의심과 완연한 거부는 볼셰비키의 선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노동자 계급 유권자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관점의 일부였다. 볼셰비키의 선동이 한 역할은 임시정부가 최소요구로 간주되었던 것들조차 달성하지 못했으며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그들과 그들의 당을 임시정부와 연합시키는 재앙적인 결정을 했을 때 [볼셰비키] 당을 대중의 분위기로부터 조직적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대중적 구호는 부르주아지로부터의 정치적 단절에 대한 광범위한 열망을 집약하고 있었다. 렉스 웨이드(Rex Wade)를 인용하자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에는 상류 및 중류 계급 분자들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과 급진적 변화에 대한 열망 모두가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물론 점점 많은 대중이 이 요구를 채택했지만 혁명적 방어주의(Revolutionary Defensist) 지도자들은 고집스럽게 이를 거부했다.” 10월 혁명은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로부터의 이러한 단절이 현실화된 사건이었으며, “정통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 지닌 혁명적인 내용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초기 카우츠키의 국가관과 레닌 및 볼셰비키들이 1917년 이후에 발전시킨 국가관이 전반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기는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차이들도 존재했다. 가장 중요한 점들 중 하나는 분명 보통선거권에 기반을 둔 의회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 요소일 것이라는 카우츠키의 견해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 제국에서 소비에트 (평의회) 국가 권력 모델은 부르주아와 지주에게서 투표권을 박탈했고, 보다 직접적 참여와 근로인민의 대표성에 기반을 두려고 했다. 레닌이 그랬듯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917년 이후 이러한 구조가 전통적 의회제보다 민주적이라고 주장했다. PPS 좌파(PPS-Left) 마리아 코쥬츠카(Maria Kozutzka)1918년에 이렇게 썼다.

 

현재의 의회제 시스템에서는 대중이 공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새로운 국가 조직 [평의회]에서는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하고, 낡은 인위적 구분을 제거하고, 지방 정부 기구를 전반적 국가 기구의 일부로 만들고, 입법권력과 행정권력 사이에 긴밀한 연관을 확립하고, 빈번한 선거의 원칙을 도입하는 등의 제도를 통해 이러한 단점이 제거된다. 러시아 공화국의 헌법은 근로 인민의 삶을 진정한 자기통치의 기반 위에서 조직하려는 최초의 중요한 시도다. 진정한 자기통치란 위로부터의 지배에 복종하는 대신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이다.”

 

1917년 이후 소비에트의 역할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이 논문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므로 여기서는 몇 가지 논평만 하도록 하겠다. 첫째, 소비에트가 초기 카우츠키조차 전망하지 못한 정도의 보다 직접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를 담지하기는 하지만 이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에 보았듯 카우츠키 역시 부르주아 의회제를 기만이라며 거부하고 모든 국가 공직자의 선출, 인민의 무장, 지방 자치의 확대, 행정권과 사법권의 융합을 통해 근로 인민과 국가의 괴리를 허물어뜨릴 공화정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의회제는 어떤 기존 자본주의적 민주정보다도 소비에트 모델과 훨씬 더 유사하다.

 

둘째,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 핵심적인 정치적 논쟁은 소비에트 대 의회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핀란드를 제외하면 제국에는 소비에트와 대립시킬 만한 국민 의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스스로를 임명한 비선출직 기구로써 제헌의회 소집을 계속 미루었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대부분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초기 정통사회민주주의는 언제나 차르 전제정의 독특한 맥락 때문에 러시아의 혁명과 그 조건에 적합한 마르크스주의적 전술과 전략은 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그것과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봉기는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 유산에 의해 특징 지워졌던 정치체에서 일어났으므로 이 분석은 그 때도 여전히 유효했다.

 

어떤 국민의회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소비에트는 애초부터 근로 인민이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지배적인 형태였으며 인민 대중은 여기에 점점 더 많은 참여와 열망을 투여했다. 1917년 내내 중심부와 주변부 모두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소비에트와 미래에 존재하게 될 제헌의회가 노동자·농민 권력을 건설하는 데서 상호보완하는 기구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19181월에 드디어 소집된 신생 제헌의회를 신생 소비에트 정부와 대립시키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이 입장은 변화하였다.

 

혁명과 그 성과를 방어하고 더 밀고 나가기 위해,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는 제헌의회가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그것을 해산하였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를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이 지적했듯, 1918년에 소비에트 권력이 제헌의회를 이기게 된 가장 중요한이유는 제헌의회에 대한 러시아 인민의 근본적인 무관심에 있었다.

 

이 구체적인 정치적 맥락을 보면 그토록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제헌의회의 해산이 레닌주의적 권위주의의 표출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의 전술이 정통사회민주주의와 어느 정도 단절하고 어느 정도 이어져 있었는지를 측량할 때는 러시아 제국에서 강력한 의회제 기구나 전통이 사실상 부재했다는 것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통사회민주주의는 러시아 혁명을 언제나 다소 독특한 역사적 현상으로서 보았던 것이다.

 

결국 1917년 이후 레닌과 초기 코민테른의 평의회에 대한 입장은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 가는 새로운 전략적 경로를 제시했다는 데서 국제적 중요성이 있었다. 의회제에 대한 카우츠키의 입장과 방어 전술에 대한 카우츠키의 강조와 달리 노동자 평의회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수적인 형태로 삼는 것은 의회 외부의 대중 행동과 당 및 노동조합의 조직된 부위를 넘어서는 가장 광범위한 층의 노동계급의 동원을 전례 없이 강조하는 전략과 나란히 가는 것이었다.

 

비슷하게, 이 새로운 입장은 보다 공세적이고 반란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권력 쟁취 전략을 정당화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주로 민주적 자유를 철폐하거나 의회에서 사회주의 당이 다수가 되는 것을 뒤집으려는 부르주아의 시도에 대응하는 방어적 대응이 될 것이라고는 더 이상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본주의 철폐를 무한정 미래로 미뤄두기를 거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평의회로 조직된 근로 인민 중에서 다수를 전취하는 것이 자본가계급 지배 하에서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선거에서 다수를 얻는 것보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재는 보다 현실적인 척도인 것으로 드러났다. 191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략적 결론을 도출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의회제 유치원의 가내 요령을 혁명에 적용하려고 시도해왔다. 뭔가를 실행하려면 먼저 다수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혁명도 그래야 한다. 먼저 다수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참된 변증법은 이 의회제 두더지의 지혜를 뒤집어버린다. 다수가 아니라 다수를 얻기 위한 혁명적 전술 그것이 길이다. 지도하는 법을 아는 당, 즉 사태를 진전시키는 법을 아는 당만이 몰아치는 정세에서 지지를 획득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카우츠키가 혁명가 시절에 주창했던 정통마르크스주의와는 분명히 다르고 완전히 반대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입장이 본질적으로 개혁주의적이라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핀란드 혁명은 여기서 중요한 비교점이 된다. 전체적으로 핀란드 혁명은, 10월 혁명이 그랬듯이, 국가와 혁명에 대한 카우츠키의 초기 입장이 지닌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확증해주었다.

 

핀란드의 강력한 의회와 의회제 전통은 사회주의자들이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마주치지 않았던 장애물과 기회를 낳았다. 제정 러시아의 여타 지역들과 달리 핀란드에는 정치적 자유와 의회의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정통교의가 주장했듯이,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의회 활동을 크게 강조했다. 사실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1916년 핀란드 의회에서 압도 다수를 차지했으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1917년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노동자 계급의 기초적인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 기구를 활용하려고 애썼다.

 

1917년 늦여름, 러시아 임시정부는 핀란드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의회를 불법적으로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했다. 이 반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쿠데타에 대해 핀란드의 사회주의 지도부는 매섭게 항의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위기와 반혁명이라는 조건이 봉기를 확실하게 의사일정에 올리고 있었음에도, 지도부는 의회 영역과 단절하기를 매우 주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의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설치하려는 핀란드 부르주아지의 모든 시도에 강경히 맞서 싸우기도 했다.(이 낡은 억압 기구는 핀란드에서도 19172월에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상당한 시간이 지연된 후, 기층 당원들과 중부 러시아의 혁명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결국 주저함을 극복했다. 이 주저함은 특히 당내의 온건한 의회주의 세력이 추동했던 것이었다. 19181월에 핀란드 사회주의자들은 무장 봉기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핀란드 혁명의 처음 목표는 보통 선거권에 기반을 둔 보다 민주주의적인 의회정을 설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핀란드의 신생 노동자 정부는 러시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황 때문에, 그리고 반혁명 때문에 원래의 의도보다 사회주의적 변혁으로 한층 더 진전하도록끔 떠밀려갔다. 노동자 정부는 피비린내나는 내전과 독일 제국의 침략을 거쳐 19185월에야 파괴되었다.

 

핀란드는 많은 면에서 카우츠키가 주장했던 전통적인 혁명관을 따랐다. 끈질긴 계급의식적 조직화와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했고, 이에 우익은 의회를 해산시켰으며,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혁명을 유발했다.

 

평화적, 방어적, 의회주의적인 전략에 대한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정통적인선호는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결국 기존 자본가 국가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반면 관료화된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8~19년 동안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것을 전복하려는 혁명적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을 폭력으로 분쇄했다.

 

핀란드의 경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모든 노동자 혁명이 따를 경로라는 뜻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전에 반드시 의회에서 다수를 얻어야 한다거나, 의회제 하에서는 소비에트 같은 기구가 출현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1918~23년 독일 혁명과 뒤이은 노동계급의 궐기는 이런 식의 단순한 도식화가 설득력을 잃게 만든다. 게다가 핀란드는 정통사회민주주의의 강점뿐만 아니라 잠재적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의회 영역을 버리기를 주저하는 태도, 과하게 수세적이 되는 경향, 평화적 전술에 대한 지나친 강조, 그리고 대중 행동에 대한 과소평가 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살아있는 계급투쟁의 경험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해갈 수밖에 없다. 1917~23년 동안에 일어난 제정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전역의 유례 없는 혁명적 궐기 덕분에 초기 코민테른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좋은 전통들을 계승하고 국가 권력과 정치적 전략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발전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1917년 이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정통사회민주주의와 단절성보다는 연속성이 많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카우츠키가 1909년 이후 개혁주의에 투항했고 전후 사회주의 봉기에서 반동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초기 이론들은 볼셰비키와 핀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해 자본가계급 지배를 공격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급진주의자들을 훈련시켰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우리는 1917년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유산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1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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