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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벗, 김득영 동지를 떠나보내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9. 9.

전지윤


우리의 소중한 벗이었던 김득영 동지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습니다. 우리는 최근에야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참담한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예전과 달리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안돼서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이미 8월초에 이제 마흔을 갓 넘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고인이 어떠한 고민과 얼마나 큰 고통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할뿐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너무나 미안하고 또 부끄럽게도 말입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고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왔습니다. 퀵서비스 등 고된 일을 해온 고인은 근래 줄어드는 일거리와 늘어나는 빚, 몇 달째 밀린 월세로 힘들어했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본 그의 고시원과 밤마다 술을 사갔다는 집 앞 가게 할머니의 말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왜 이제야 왔냐는 말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낡은 고시원의 그 좁은 방에서 외로이 술잔을 들었을 고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집 앞 골목길에는 그가 몰던 낡은 오토바이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왜 고인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요?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나야 했을까요? 도움이 되지 못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에 가슴을 칠뿐입니다.


고인은 2008년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변혁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고인은 이 체제가 낳는 부조리와 모순, 억압과 차별에 분노했고 해방된 세상을 염원했습니다. 고인은 더 많은 사람들을 이 투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함께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토론회 준비와 지원 등 매번 묵묵히 온갖 궂은일을 하던 고인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2010년에 고인은 거리에서 <레프트21> 신문을 판매하다가 동료 5명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천안함 국면에서 안보 위기는 사기다라는 이 신문의 제목이 당시 이명박 정부에게 거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인은 동료들과 함께 법정투쟁을 하며 끝까지 이 부당한 탄압에 맞섰습니다. 이 법정 투쟁 과정에서 제출하고 진술한 것을 보면, 고인의 꿈이 얼마나 뜨겁고 강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정부와 권력자들은 폭력과 탄압으로 지배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아랍 민중의 혁명은 자유와 민주를 향한 민중의 염원을 결코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자유와 민주는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15191심 최후진술)

 

정부와 권력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최상의 체제라고 말하지만 저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인류 최악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20111272심 최후진술)

 

이처럼 고인은 자본주의에 반대했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했으며 아래로부터 민중의 힘을 믿었습니다. 2013년말 박근혜 정부가 철도파업을 짓밟기 위해 민주노총을 침탈했을 때도 고인은 맨 앞에서 저항하다가 연행됐습니다. 고인은 또 재판을 받았고, 다음해 5월 이런 진술문을 썼습니다.

 

하나 둘씩 밝혀지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사람의 안전과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정부와 관료, 기업주들의 공모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끔찍한 참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박근혜 정부는 계속해서 사람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규제 완화를 추진합니다. 소수의 권력자와 자본가를 위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시민을 감시하고 언론을 통제하고 집회와 시위, 파업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모든 사람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 박근혜는 하야해야 합니다.”

 

고인은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도 앞장서 투쟁하고, 정권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던 용기있는 투사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의 귀는 성소수자 등 부당한 차별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항상 열려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2013년말 제가 가장 힘든 시기에 저의 손을 잡아 준 고인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는 당시 비난이 아니라 토론해야 한다며 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비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런 선택이 낳은 커다란 인간적 괴로움과 아물기 힘든 상처까지 견뎌내면서 말입니다.


그 후로도 고인은 변혁 재장전모임을 함께 하면서 저에게 이런저런 정치적 자극과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쓴 글에 포함될만한 정보와 사실을 알려주고, 치우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지적도 해주었습니다. 이견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특히 음악을 폭넓고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었고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 자신이 베이스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고인의 페이스북에 가면 수많은 좋은 노래들이 올려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 제가 특히 좋아하게 된 노래들은 바로 고인이 저에게 추천해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작은 체구에서 얼굴 전체로 퍼지던 김득영 동지의 사람좋은 웃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술과 술자리를 즐겼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그리고 왜 더 자주 연락하고, 찾아가고, 어려움을 더 파고들어 알아보려 하지 않았는지 너무나 큰 후회가 됩니다


왜 지난 봄에 고시원 옆방에서 누군가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할 때 더 심각하게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왜 페이스북에 더 이상 음악을 올리지 않는지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모임에 더 자주 나와서 토론해보자는 말만 하고 있었을까요. 이 미안함을 어찌 갚을 수 있을까요.


김득영 동지가 페이스북에 마지막으로 올린 한영애의 '완행열차' 노래가사가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 같습니다.

 

완행열차 타고서 간다 그리운 고향집으로

차가운 바람 맞으니 두 눈이 뜨거워지네

고향으로 가는 이 마음 이 기차는 알고 있겠지

말 못할 설움과 말 못할 눈물은 차창밖에 버리고 가자

 

김득영 동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고인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가 끝까지 멈추고 싶지 않았을 투쟁을 이어가겠습니다.


 

* 故 김득영 동지 추모식

 

9월 12일(토) 저녁 8시 / 언론노조 회의실(한국언론회관 18층, 시청역 4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