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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불안정 노동, ‘압박’ 그리고 투쟁의 ‘도약’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5. 12.

킴 무디

번역: 박상우

 

<In Solidarity>의 저자인 킴 무디(Kim Moody)가 오늘날의 노동과 작업장 투쟁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이 토론은 이언 앨리슨(Ian A)의 글(http://rreload.tistory.com/156)에 케빈 크레인(Kevin Crane)이 반론을 펴면서 이어져왔다. 킴 무디는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해서 분석해 왔고 한국에도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가 번역된 바 있다.

 

출처:http://rs21.org.uk/2015/02/10/precarious-work-compression-and-class-struggle-leaps/

 

Ian A에게 답하는 글에서, Kevin Crane은 노조와 작업장에서의 사회주의자의 역할과 관련해 여러가지 진지한 쟁점들을 제기하였다. 내가 볼 때, 그가 말하는 논지의 핵심은 불안정 노동의 증가와 더 고전적인 형태의 정규직 고용이 감소함으로써 생겨난 문제들에 있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어쨌든 더욱 더 많은 일자리가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또한 불안정 노동이 특히 젊은층을 주로 타격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국 경제와 노동력을 구성하는 어느 분야에서도 불안정 노동이 일반적인 형태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지난 20여년간 불안정 노동이 얼마나 확대되어왔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나는 우선 작업장 또는 노동 그리고 계급 투쟁의 문제를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


역사적으로, 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반적이 아닌 예외적 시기에 속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제도화된 단체 교섭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과 실질 임금이 상승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 짧았던 시기 이전에는 수십 년 동안, 또한 이 시기 이후로도, 계속 불안정한 형태의 고용이 널리 확산되어있었고, 가장 많은 형태의 고용이기도 했다. 1888년 신()노동조합주의와 함께 시작된 영국에서의 노조 가입과 대규모 투쟁의 물결은 태반이 정규직이 아니었던 노동계급에 의해 진행되었었다. 이들 안에는 하도급이 널리 퍼져있었고,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전형적으로 소규모 사업체였다.


1888~91년의 신()노동조합주의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소녀들(임시직, 재택근로자, 반일 교육 시스템[의무교육법에 의해 8~13세 아동에게 하루 3시간씩 학교 수업을 듣게하고 6시간 반씩 노동을 하게 했던 제도]), 부두 노동자들(임시 고용, 여러 고용자 밑에서 일함) 그리고 가스 노동자들(계절 노동자) 이었다(Raw 2011, 41~42, 83; Hobsbawm 1964, 126-178). 


건설 노동자들은 더 크게 합쳐지기 전까지 직능별 노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도 임시직이었고 계절 노동자였다. 요약하자면, 만일 불안정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노조로 뭉치는 게 불가능했다면, 숙련 노동자들을 넘어선 20세기의 노동 조합 운동의 태반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정적인 직업이 노동조합을 낳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조합이 임금 상승과 노동 시간 단축, 단체 교섭을 낳았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개선을 기대함으로써 계속 그 직업에 남아있도록 하였다. 경영자들 역시, 2차 대전후 인상된 임금에 직면해서는 고용을 안정화시키는 게 생산성이 증가되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었다.


몇 가지 이론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조합과 노동(노동 과정)의 중요성을 알아챈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노동조합과 노동 과정에 중요성을 둔 이유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 안에, 자본과 노동이 만나 충돌하는 지점이 있고, 그곳에서 계급 투쟁은 시작되고 늘상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모순은 작업장을 넘어서까지 확장되고 사회의 거의 모든 틈새에까지 스며들지만, 자본의 이윤을 향한 끊임없는 욕구의 압박을 노동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경험하는 곳은 노동 과정이다. 이곳에서 노동조합이 최초로 생겨났고, 대중 투쟁과 정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작업장 조직화를 장려하는 계급 투쟁의 성격은 균등하거나 일관되지 않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하였듯이, 그것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발생하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좌절감을 느꼈고 그들에게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들이 우리 시대 이전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계급 투쟁이 침체되었던 시기(1850~1888)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였다. 좀 더 최근에는 에릭 홉스봄(1964), 비벌리 실버(2003) 그리고 다른 학자들이 노조와 계급 투쟁은 균등하게 진행되거나 선형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오히려 계급 투쟁과 그 조직적 결과물은 도약적으로 나타나며(홉스봄),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일종의 투쟁의]'물결로 드러난다(실버)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들을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홉스봄이 주장했듯이, 이러한 도약압박’, 즉 극심한 노동 강도, 빈약한 임금 수준, 임금 감소, 불안정한 고용, 국가 보조의 감소나 결핍 등의 결과이다.


마지막 물결또는 고조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다. 이것은 2차 대전 후 시작된 신()관료적 산업 질서에 맞선 반란이었다. 이 관료적 산업 질서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작업장 대표가 급증하자 경영진들이 생산 현장을 더 엄격하게 통제하려고 하면서 발생하였다(Campbell, Fishman and McIlroy 2007, 69~113; McKinlay and Melling 2007, 222-241). 


경영진은 작업장 대표들의 자율성과 권한을 침범하였고(Cliff and Barker, 1966)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생산성 향상과 임금을 연동한] ‘생산성 협약과 함께(Cliff, 1970) 갈수록 더 야만적이고, 자동화되는, 그리고 탈숙련화되는 작업 환경을 강요하였다(Savage, 2007, 23-42). 


내가 보기에 이러한 투쟁의 흐름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 경기 순환때문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노동의 성격이 변하고 노동 압박이 증가된 결과이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노동 계급의 활동가층이 새롭게 전개되는 상황을 상대할 효과적인 방법을 알아내는 데는 보통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예를 들면, 1950년대와 1960년대 작업장 대표[보통 기업별 작업장에서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노동자 대표자를 일컫는다]와 작업장 조직화가 수적으로 급성장한 것은 1968~74년과 1977~79년 파업 운동의 절정으로 이어졌다(McIlroy and Campbell 2007, 93-130). 


이는 20세기 초반에 대량생산이 도입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198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해서 노조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새로운 형태의 노동들[린 생산방식(lean production), 적시생산 방식(just-in-time scheduling), 팀 작업, 외주화, 하청계열화, 불안정 고용, 신자유주의 환경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미국에서 보았던 불안정 노동자들(패스트푸드, 물류창고, 월마트 등)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최근의 각종 실험들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새롭고 진화하는 환경에서 무엇이 효과가 있을지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케빈 크레인은 이러한 노력들을 제대로 짚어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노력들이 불안정 노동자들이 고용된 일자리들과 이 노동을 특징짓는 형편없는 보수, 강화된 노동 환경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사회 운동적 노동조합주의의 핵심은 그것의 뿌리인 작업장이나 일자리를 간과한다는 뜻이 아니라, 운동을 거리로까지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카고 교사 노조(CTU)가 학교 폐쇄에 대항해서 싸우고 파업을 벌일 때 학부모들과 지역사회의 다른 모임들이 집회에 동참하였었다


왜냐하면 그들(CTU)은 노조 사무실을 얻거나 파업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수 년 동안 굉장히 강력한 평조합원 조직화와 작업장과 학교에서의 영향력을 건설해왔기 때문이다. 영향력과 통합력의 중심은 지역사회가 아닌 CTU에 있었다(Bradbury et al., 2014, 9-81).


오늘날 그러한 평조합원 운동 건설에 참여하는 중요한 목적은, 비록 파업이 다수에게 이례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파업과 다른 형태의 대중 투쟁이 더 널리 확산되어 살아있는 현실이 될 때(‘도약이든 물결이든)를 준비하려는 것이다. 만일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한 투쟁의 중심에 있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향력도 없고 주도적 역할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다시 한번 정치적 기회를 허비해버리고 마는 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도약이나 물결에 선행했던 반복되는 더 작고 잘 드러나지 않던싸움들을 싸워왔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노조가 중심이 된다. 기존 (관료적) 노조건, 현재 형성 중인 노조건, 미래 미국과 이곳에서의 (불안정한) 패스트푸드와 물류 창고 노동자들의 노조건 상관 없다.


몇 가지 사실


지난 30년간 불안정 노동이 증가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2년 전에는, 국립 통계청(ONS)에서 당시 임시 고용인(직원)’으로 불렸던 자영업 외에 대부분의 불안정 노동을 포함하던 분류에 대한 수치도 모으지 않았었다


1980년에 시작된 고용 관계 조사국(WERS)은 1984년에 '생산량과 고용 간의 더 밀접한 관련성을 높이기 위해 주변적 노동자들이 갈수록 더 많이 이용될 것 같다고 언급하였다(Millward and Stevens, 1986, 209~212). 


다시 말해, 1980년대에 경제와 생산이 증가하고 노조는 패배를 경험했을 때, 고용주들은 풀타임이든 시간제든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임시노동자들을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고용하였다. 1984WERS 조사에 따르면 174.000명의 노동자가 (시간제 강사같은) 기간제 계약 상태에 있었고 161,000개의 임시직 계약이 있었다(Millward and Stevens 1986, 210-211). 


2014년의 ONS 수치에서는, 각각이 715,000331,000을 차지한다(ONS, EMP07, 2014c). , 상황이 1970년대와 심지어 1980년대와도 달라졌다. 그러나 각종 형태의 불안정 노동이 차지하는 실제적인 비율은 어느 정도나 될까?


ONS 수치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불안정(‘임시직’) 고용이 19921,220,000였던 것에서 19971,712,000까지 증가하여 정점을 찍었다. 이후 수치는 2008년 경제 위기 때 1,399,000까지 감소하였다가 다시 2014년 초기에 1,682,000까지 증가하였다


1992년에는 임시 고용이 전체 노동력의 5.5%를 차지하였는데, 1997년에는 7.4%, 그리고 2014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고용의 6.5%를 차지하였다(ONS, 2002, 84; 2010, 88; 2014, EMP01). 이 수치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늘어났고, 경기가 침체될수록 줄어들었다. 그리고 경기가 침체될 때는 고용주들이 그들의 불안정 노동자들을 내다버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불안정 노동은 노동력의 적은(그러나 중요한) 비율을 차지해왔다.


이 비율은 젊은 노동자층에게서 더 높게 나타나고, 숙박이나 음식점, 주점과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 더 높아진다. 따라서 집중 효과가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공공 부문의 고용주들(48%)이 민간 부문의 고용주들(32%)보다 더 많은 임시직 근로자를 사용한다(CIPD 2013a, 7). 임시직노동자들은 88%가 백인이고, 여자와 남자의 비율은 거의 비슷하게 나뉘어져있다(Forde et al, 2008, 12). 이는 나머지 노동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호출형 노동 계약’(zero hours contract)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달한 것이다. ONS는 약 50, CIPD(2013a, 7)는 더 현실적으로 2013년을 기준으로 약 백만 명이 조금 넘는 노동자들이 이러한 계약 형태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약은 임시직, 정규직, 시간제 구분할 것 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CIPD 조사에 따르면 공공 부문과 비영리 집단이 각각 28%42%의 비율로 호출형 노동 계약을 더 많이 사용하며, 민간 부문의 고용주들은 1/5만 그러한 계약을 사용한다(CIPD 2013a, 7). 가장 많은 직업군은 청소노동자, 간병인, 관리행정직, 콜센터 근무자, 그리고 교사이다.


외주화는 생산방식(lean production)의 가장 잘 알려진 특징으로 이제는 제조업 분야를 넘어서 국민의료보험 병원과 같은 서비스 직종에까지 확장되었다. 사실, 외주화와 하도급 계약은 공공부문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van Wanrooy 2013, 43). 위탁을 받은 일자리는 대부분 보수는 매우 적지만 정규직이고 풀타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주화는 명백히 노동자들의 불안감 형성에 기여하고 노조가 교섭을 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도록 한다. 그러나, 갈수록 주목을 끌고 있는 이 중 한 측면은, 많은 위탁 작업장들이 생산 공급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이는 보통 적시생산방식에 연결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노동 강도를 강화시키고, 생산 속도를 증가시키며, 압력과 감시를 증가시킨다 - , ‘압박을 축적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적시생산방식 연결망은 핵심 생산 라인과 물류의 교차점에 있는 노동자들에 의한 마비 시도에 매우 취약하다(Slaughter, 2012, 8-10). 이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은 노동 계급이 지난 30년간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워왔고 도약을 위한 더 많은 잠재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반적으로 ONSCIPD 조사에 따르면, 노동력의 70%가 풀타임 정규직이고 20%는 시간제 정규직이며, 10%는 임시직과 자영업, 비전형적인 고용 관계에 있는 대리 노동자들이다(CIPD, 2013a, 9). 정규직이라는 것은 평생 동안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 정년 보장은 1970년대 이래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전체 노동력에서 평균 근속기간은 2011년을 기준으로 여성의 경우 8, 남성의 경우 9년이다. 대부분이 5년 이상 고용되었었고 85%2년 이상 고용되었었다(CIPD 2013b, 4-5). 


따라서, 오늘날 불안정 노동이 30년 전에 비해 더 두드러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반적인 고용 형태는 아니며, 고용된 노동자의 상대적 소수에게만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놀랍게도, 이는 노조 가입률이 가장 높은 공공 부문에 더 집중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자리를 관두느냐에 대한 수치는 굉장히 다양하다. ONS의 노동력 조사국에 따르면, ‘자발적 퇴직1990년대 중반 3%였던 것이 20111.5%로 감소하였다. 반면에 WERS 조사에 따르면, 훨씬 더 높은 자발적 퇴직율을 보이는데 1998년과 2004년에 14%였던 것이 2011년에 이르러 9.1%로 감소하였다


두 조사에서의 차이는 아마도 ONS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노동자들은 정부당국에게 자발적 퇴직을 강조하지 않기 쉽기 때문이다.[자발적 퇴직의 경우에는 실업수당을 받기 어렵다는 점과 관련있다] 반면 WERS는 고용주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 데, 고용주들은 일반적으로 고용인의 신뢰도를 낮춰 보기에 자발적 퇴직을 더 과장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수치가 현실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두 조사에서 모두 자발적 퇴직이 감소한 것은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경제가 호황일 때 일을 관두고 싶어하고 경제 위기가 닥치고 일자리가 증발할 때는 덜 관두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ONS 수치에 따르면 자발적 퇴직이 다른 연령층에서보다 16~24세 연령층에서 두 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ONS 2011, 5). 이를 다르게 설명하면, 24세가 지나 연령이 증가할수록, 자발적 퇴직은 눈에 띄게 감소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1970년대 이후로 노동력의 구성과 노동 계급이 급격하게 변화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1978년에는 제조업에 630만 일자리가 있었던 반면, 지금은 230만에 불과하다. (생산은 1980년 중반에 비해 두 배 더 많이 하고 있다) (ONS 2014b, JOBS03). 이는 숙박과 식품 서비스 분야(또는 다른 민간부문 그룹)의 노동자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치이다


따라서 여전히 그들(제조업 노동자)에게는 잠재적인 사회적 힘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비해 덜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1,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의 수는 1994324개였던 것이 201190개로 감소하였다(ONS 2012, 600; 1996, 140).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공장이 적시생산공급망에 연결되어 있고 이는 비록 기존의 집단 교섭에는 더 큰 불이익으로 작용하지만, 직접적인 노동자 행동에는 이점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여성들과 소수 민족, 이주 노동자들이 오늘날의 노동력을 구성하고 있고 이 같은 사실은 1970년대보다 인종과 성에 대한 쟁점들이 작업장의 중심에 놓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의 영국 노동자들은 수년간 지속되는 정규적인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자리 또한, 불안정 노동의 경우과 마찬가지로, 린 생산방식, 신경영방식, 빈번한 조직 개편, 괴롭히기, 감시의 증가, 경쟁의 출현과 함께 노동 강도가 더욱 세지고 더 많은 압박을 받는다


게다가, 평균적으로 1973년에 비해 오늘날의 임금이 더 적다. 지난 3년 동안 임금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20~29세 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Guardian 30/01/2015). 물론, 정년이 보장된 일자리도 제조업 노동자의 수가 갈수록 감소함에 따라 노동력의 감소나 작업장 폐쇄로 인해 사라질 수 있다


2011WERS 조사에서, 경기침체로 작업장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물었을 때, 오직 11%만이 부정적인 영향이 없었다고 답하였다. 임금 동결이나 삭감이 이루어진 경우가 2004년 모든 작업장의 11%였던 것에서 201130%로 증가하였다(van Wanrooy 2013, 15, 87).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게다가, 복지 국가, 국민의료보험을 비롯해 공영 주택등과 같은 더욱 더 많은 복지 혜택이 허물어져가고 있다. 고용행정심판위원회는 갈수록 접근이 어려워지고,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적 임금에 실제적으로 노동자들이 기댈 수 있는 부분은 1970년대에보다 더 적다. 어느 주요 또는 군소 정당에서도 이를 뒤바꿀 제안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홉스봄이 말했듯이 우리는 지금 압박의 국가에 살고 있으며, 일자리는 핵심적인 압박점이 된다.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언젠가 있을 계급 투쟁의 도약을 위한 주요한 잠재적 발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안 앨리슨이 올바른 관점에 서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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