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아래 글은 박노자가 2024년 8월 5일자 제7차 연세한국학포럼에서의 박표한 연설문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졸서"는 박노자의 신간인 <전쟁 이후의 세계>를 가리킨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1. 자본주의: 국민 국가와 세계화 사이에서
우리가 이미 거의 4백년 동안 경험해 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한 가지 내재적 자기 모순을 늘 보여 왔다. 한편으로는 자본 축적 내지 자본의 운동, 상품의 유통, 생산과 소비의 과정은 애당초부터 세계적이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봐도 이 점은 확연히 보인다. 1876년 이후 조선의 세계체제에의 편입은, 조선산 쌀의 일본으로의 수출과 일본 업체나 동순태 (同順泰) 같은 화교 업체, 아니면 세창양행 (世昌洋行) 같은 구미권 업체를 통한 방직물을 위시한 외국 소비품의 수입 등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애당초부터 한국의 신흥 자본가란 수출입을 비롯한 여러 형태로 세계 시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본 축적의 과정은 늘 국민 국가를 그 기본 단위로 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국민 국가 없는 자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근·현대 한반도를 봐도 분명히 보이는 사실이다. 사실, 한국의 근대 거상 (巨商) 중에서는 관 (官), 즉 (초기적 형태의) 국민 국가와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구한밀이나 일제 초기의 대표적인 금융, 상업 업자인 조진태 (趙鎭泰, 1853-1933)나 백완혁 (白完爀, 1856-1938)만 봐도, 조선 말기의 세도가와 유착한 무과 급제자로서 나중에 총독부와 밀착해버린 정상 (政商)들이었다.
사실, 자본이 국민 국가 – 아니면 식민 국가 – 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상 이와 같은 궤도는 논리적이기만 했다. 해방 이후의 남한의 관 (官) 주도 개발이나 국가에 의한 재벌의 육성 역시 세계 자본주의 역사의 ‘보편’에 가깝다. 자본에게는 국가가 필요한 것은, 물고기에 물이 필요한 것과 같은 정도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만 해도, 조금 더 국가 중심의 시기들과 보다 세계화된 시기들은 계속해서 정기적으로 교체돼 왔다. 예컨대 1920년대는 중국과의 무역 등이 활발했던, 국제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시기였지만, 일본제국이 블록 경제로 전환한 1930년대에는 세계화를 대체한 것은 일본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 등과의 무역이나 만주에서의 투자였다. 1950년대의 원조 경제는 가히 ‘국제적이었다’고 할 만하지만, 1960-70년대는 국가 – 그것도 1970년대 이후에는 병영 국가 – 주도의 ‘국민 경제’ 시대였다.
무역 의존도가 84%인 오늘날의 한국은 심히 세계화된 경제지만, 앞으로 현금과 같은 전쟁과 지정학적 대립, 그리고 국민 국가 부상 (浮上)과 신보호주의의 시대가 지속되면 이와 같은 세계화된 한국 경제는 오히려 심각한 문제로 재인식될 것이다. 이처럼 한국 자본주의는 진자 (振子)처럼 ‘세계화’와 ‘국민 국가’ 사이에 부단히 왔다갔다한다.
한국 자본주의만도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운동도 같은 궤도를 따른다. 1876년 이후에 조선이 편입한 세계 자본주의적 질서는 그 글로벌화의 수준으로는 1980년대 이후의 시기를 예견한 것처럼 보였다. 제1차 세계화의 시대가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었던 1913년에는, 해외 직접 투자는 전세계 총생산 (global GDP)의 10%에 이르렀다. 해외 투자가 이 수준에 다시 오른 것은 동구권이 해체되고 중국이 한참 개혁·개방으로 나아간 1991년이었다.
한데 19세기와 20세기초의 제1차 세계화는, 머지 않아 제1,2차 세계대전과 그 사이의 전간기 (戰間期)라는, 국민 국가가 세계 시장을 대체한 ‘국가주의의 시대’로 이어졌다. 특히 세계대전의 시기는 국가 단위 자본주의 – 사실상 일종의 국가 자본주의 – 의 황금기였다. 1929년만 해도 미국의 총국민생산의 5%에 불과했던 연방 정부 지출은, 제2차 대전이 한참이었던 1944년에 42%에 달했다.
영국의 경우 1944년의 국가 지출은 아예 총생산의 62%나 돼 사실상 국가 자본주의로 잠시 이동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국가 본위 자본주의의 패턴은 구미권에서도 대체로 1970년대 중후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사실, 그 당시로 치면 박정희의 관 주도 개발은 예외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보편이었다. 한데 1970년대말-1980년대초부터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1914년 이전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제2차 세계화의 바람이 불었다.
한국에는 1994-8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착륙한 이 제2차 세계화는 한국의 1인당 국민 생산을 핵심부 국가들의 수준으로 올리는 데에도, 양극화와 빈부격차, 무한경쟁과 초(超)저출산을 초래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데 2008년 세계 위기 이후에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한 제2차 세계화는, 2020-22년 팬데믹 사태와 2022년 이후의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결국 그 종언을 맞이했다. 팬데믹과 전쟁 이후의 세계는 비록 세계화 시대의 일부 패턴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본격적으로 다시 한번 국민 국가 본위의 질서로 회귀할 것이다. 이 커다란 ‘국가로의 회귀’는 바로 졸서 『전쟁 이후의 세계』의 주요 테마다.
2. 자본주의, 지경학과 지정학 사이에
세계화의 시기들은 왜 하나 같이 결국 종언을 향해 가게 돼 있는가? 이는 결국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재적인 운동 법칙에 달려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일단 19세기의 영국이나 20세기의 미국과 같은 핵심부의 패권 국가에서는 세계화 시기의 말기에 이르러 제조업 등에서의 이윤율은 떨어지게 돼 있다. 마르크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 여기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예컨대 제2차세계화의 주도 국가였던 미국의 경우, 제2차세계화가 한참이었던 – 그리고 한국에서는 외환 위기가 터졌던 - 1997년 에는 금융 부문 이외의 이윤율은 17%나 됐다. 쉽게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 본산이었던 미국의 경제가 매우 잘 나갔던 시절이었다. 한데 팬데믹이 시작한 2020년에는 미국의 비(非)금융 부문의 이윤율은 불과 11% 밖에 안됐다. 제조업 등의 이윤율이 떨어지는 만큼 큰 돈들이 부동산 등의 투기 판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이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부동산 버블이 터지는 위기로 이어졌다.
세계체제 핵심부의 패권 국가에서 경제가 힘들어지는 한편, 세계체제 핵심부 변두리나 준(準)주변부에서는 그 도전 세력들은 국가 주도의 개발 모델을 이용해 훨씬 더 빨리 성장된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의 전년인 1913년에는, 패권 국가였던 영국의 전세계 제조업 생산에서의 비중 (13,6%)보다, 도전 국가였던 독일의 전세계 제조업 생산에서의 몫 (14,8%)은 더 컸다.
도전 국가가 기존의 패권 국가를 경제적으로 압도하게 된다는 것은 패권 국가로서는 패권 상실의 위기를 의미하며, 그런 국면에 쉽게 생기는 일은 바로 전쟁과 전시로서 불가피한 국가 주도 경제에의 전환, 즉 세계화의 포기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로 치면 세계 제조업에서의 미국 비중을 중국이 추월한 것은 2010년에 일어난 일이다. 바로 다음해인 2011년에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 즉 동유럽이나 중동보다 중국과의 경쟁에 중점을 두겠다는 정책을 천명했다.
중국과의 전면적인 경쟁은, 세계화의 틀 속에서는 불가능했다. 세계화의 법칙대로라면 미국의 하이테크 업체들로서는 인건비가 싸고 시장이 어마어마한 중국으로 생산을 외주화시키는 것이 논리적일 뿐이었다. 한데 미국의 2022년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이와 같은 자본의 이윤 극대화와 세계화의 논리를 물리치고 국가 안보 위주의, 국가에 의한 제조업 육성의 논리를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사실, 이와 같은 신보호주의적 법률이 채택된 그 순간, 세계화가 사망했다고 봐도 큰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탈(脫)세계화는, 바로 졸서가 그 주된 주제로 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주요 배경이 됐다.
미-중 대립, 즉 기존의 패권 세력과 도전 세력 사이의 대립을 그 중핵으로 하는 탈세계화 시대의 지정학적 긴장은, 과연 왜 하필이면 미국과도 중국과도 먼 동유럽에서의 열전 (熱戰)으로 이어지게 됐는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무대가 된 발칸 지역의 세르비아 등이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무대가 된 폴란드 등처럼,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현재의 세계 질서로서 다소 주변적이다.
한데 러시아가 광의의 중국 영향권에 속하고 우크라이나가 광의의 미국 영향권에 속하는 등 이 두 국가는 미-중 영향권의 경계선에 위치하는 점 이외에도 무력 갈등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 신생 국민 국가가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균질적인 ‘국민’ 집단은 각각 아직 그 형성 과정에 있었다. 침공을 결정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서부나 중부 우크라이나와 또 다른 동부·남부 우크라이나 출신들의 친러 성향 등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다.
한편 러시아는 예컨대 중국 등보다 외전 (外戰)을 감행하기가 훨씬 더 쉬운 정책 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당국가인 중국에는 정책 결정은 나름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개인 독재의 형태에 더 가까운 러시아에서는 푸틴과 주로 같은 안보 기구의 출신인 그 측근들의 밀실 결정은 사실상 ‘공식’ 절차를 대체한다. 대외적 모험주의로 나아가기가 훨씬 더 쉬운, 덜 제도화된 독재의 구조인 셈이다. 한데 러시아의 집권 관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침공을 감행한 것은 나름의 득실 계산의 결과이기도 했다. 러시아 지배자들에게 이 전쟁이 어떤 면에서 유익한가 라는 부분은 바로 졸서의 핵심적 파트다.
3. 자본의 러시아, 강함과 약함의 이중주
이 침략 전쟁을 감행한 러시아는 현재의 세계질서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면으로는 러시아 지배자들의 야망은 세계적 수준이다. 저들은 스스로를 미·중과 같은 레벨의 세계 질서의 ‘극’ (極)으로 인식한다. 저들이 내다보고 있는 탈세계화 시대의 청사진은 바로 미, 중, 러, 인도, 브라질, 남아공 등 위주의 ‘다극’ (多極) 질서다. 한데 또 일면으로는 러시아에게는 영토와 자원, 그리고 핵을 포함한 군사력 이외에는 세계 신질서의 한 ‘극’으로서 내세울 게 그다지 없다.
예컨대 세계의 제조업 생산 물량에 있어서는 중국과 미국은 각각 31%와 16%를 차지하지만, 러시아의 비중은 겨우 1,83%로 한국 (2,7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1,83%나 된다는 것은, 이 통계에 무기 생산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무기는 그나마 구미권 밖에서 팔리기라도 하지만, 러시아산 여객기나 선박, 자동차 등은 수출품으로서의 경쟁력은 아예 없다. 현대 제조업의 핵심은 반도체 생산인데, 글로벌 반도체 생산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비중은 아예 0,06%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제조업만큼이나 러시아 학지 (學知) 생산은 세계 교육계·학계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의 우방 (友邦)인 중국의 상해교통대학 (上海交通大學)이 만든 세계대학 순위를 봐도 100위 이상의 대학들 중에서는 한국 대학 한 군데 (서울대)가 있어도 러시아 대학은 전무하다. 사실 러시아 제조업이나 학술, 연구, 교육 기관들은 아직도 33년 전에 그들이 받았던 소련 붕괴의 충격으로부터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구미권 분석가나 상당수의 중국 분석가들까지 러시아를 가리켜 “쇠락해 가는 대국” (declining power)이라는 판정을 내려왔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국제 생산 분담·협업 구조에서의 러시아의 역할은, 크게 봐서 유럽이나 중국, 인도 등에 원자재를 공급해 주는 주변부 국가의 전형적인 역할이었다. ‘무역’이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는 세계화 시대에는 러시아는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과 달리 애당초에 ‘매우 저렴한 인력’이나 엄청난 규모의 해외 투자 같은 부분들이 러시아에 없어서 러시아로서 중국이 (내지 한국이) 밟아온 수출 주도 개발의 길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화 시기에 러시아는 계속해서 “주유소 격의 국가”와 같은 미국측의 자존심이 상하는 멸칭 (蔑稱)이나 들어야 했다.
하지만 – 졸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 탈세계화의 시대는 낙오자가 다 된 러시아에 ‘기회’를 주었다. 중국과 인도, 사우디 아라비아, 걸프 국가 등 비서구 세력들이 부상하면서 미국과의 거리를 두고,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의 규정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는 러시아는 다시 한 번 – 스탈린 시대의 따라잡기식 근대화처럼 – 국가 주도로 지난 33년 동안 잃어버린 제조업 등의 경쟁력을 회복해 볼 수 있었다.
단, 러시아의 경제가 이미 국가 주도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시장 경제로 이미 재편된 이상 이와 같은 시도를 하자면 러시아 내부 시장으로부터 러시아산 상품보다 훨씬 더 우수한 수출품들을 차단시켜야 했다. 즉, 경쟁력이 아직 약한 국산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 장벽’ 같은 보호주의적 정책이 필요했다. 거기에다가 스탈린 시대처럼 국가가 제조업 생산의 증산 (增産)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중앙집권적 투자를 실시해야 했다.
이런 보호 장벽과 이런 초(超)대규모의 국가적 투자가 완벽하게 가능한 상황은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전시 (戰時)라는 비상 상태였다. 내가 졸서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즉,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떻게 해서 러시아 지배자들의 새로운 국가 본위의 개발 전략의 핵심이 되었는가 라는 부분이다.
4. 전쟁의 참혹함과 “전시 (戰時) 호황”
전쟁이라는 대대적인 살육에 대해 ‘기회’라고 말하는 순간 왠지 죄스럽게 느껴진다. 1930년대의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김연수 (金秊洙, 1896-1979)의 경성방직 등이 일제 침략의 결과로 생긴 만주국과의 무역과 만주 투자를 기회 삼아 부를 축적해 나갔다는 사실이나 한국 전쟁이 일본 전후 부흥의 기폭제가 됐다는 사실, 베트남 전쟁이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가 됐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전쟁을 ‘기회’로 본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한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1991년 이후 쇠락 일로를 달려 온 러시아의 제조업으로서는 우크라이나 침략은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격의 ‘기회’였다. 서방(과 일본, 한국 등)의 제재로 ‘수입 대체’ (import substitution)와 ‘국산화’는 ‘국시 제1’이 되고, 더 이상 서방에서 투자될 수 없는 국가의 석유, 가스 수출 대금과 개인 부호 (富豪)들의 투자금이 국가가 육성하는 공업으로 흘러 들어갔다.
전쟁 경제로의 전환이 본격화된 2023년에 러시아 제조업 전체가 3,5%로 성장했는데, 금년 (2024년)도 이 정도의 성장이 예상된다. 그런데 예컨대 전선에서 가장 수요가 높은 전자제품 생산은, 2023년에 무려 20%나 늘었다. 그 중에서도 서방(과 일본, 한국)으로부터의 컴퓨터 수입이 문제되자 2023년에 그 러시아 국내 생산은 32%나 성장됐다. 소프트 개발 업체들의 매상고 역시 19%로 급성장했다.
사실 제재는 러시아의 – 아직도 «유치 (幼稚) 산업»이라고 부를 만한 – 전자 제품 및 소프트 생산, 반도체 생산 등에게는 일종의 보호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셈이 되었다. 제재로 말미암아 수입 상품과의 경쟁이라는 장벽이 낮아져 시장 진출이 쉬워지고 매상이 오른 것이다. 국가로부터의 국산화 투자 역시 산업 붐의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이 산업 붐이라는 요소 자체도 중요하지만, 졸서는 경제사 책은 아니다. 나에게는 탈세계화 국면에서의 러시아의 '전시 호황' 그 자체보다는 '전시 호황'에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더 중요했다. 역사의 교훈이란, 대개 '호황'을 가져다주는 전쟁에 산업 사회들이 쉽게 저항력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산업 호황을 가져다준 한국 전쟁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적어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에 저항한 리영희 (李泳禧, 1929-2010) 선생 등의 재야 운동가들이 있었지만, 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베트남 전쟁의 상징은 바로 김추자의 이 1969년의 노래였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과연 웃고 돌아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돈’을 가져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김상사”들은 수두룩하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전하는 러시아 군인들의 임금은 그 계급과 기술 등에 따라 다양한데, 대체로 한국 돈으로는 약260만~780만원 상당의 액수다.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가고, 또 많이 주민들이 러시아 군에 입대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변방의 가난한 지방인 부랴트 공화국의 평균 임금은 한국 돈으로 80만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는 그 주민들에게 아주 큰 돈일 수 있다.
사실 복수의 증언에 의하면 러시아 군에 입대하는 이들이 많은 가난한 지방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종의 “위험한 돈벌이 기회”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주로 가난한 이들이 그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그 몸을 침략의 현장에 던져 “큰 돈”을 챙기는 바람에, 침략 개시 이전에 약 10%이었던 러시아의 빈곤율은 이제 약 8,5%로 떨어졌다. 전쟁이 일종의 “재분배 기제” 역할까지 맡은 셈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전쟁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넘어 저항으로
국내보다 이제는 주로 외국에서 거주하는 러시아의 재야 인사들은, 이 침공을 늘 “푸틴의 전쟁”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이 전쟁과 다수의 국민들을 분리시켜야 차후 러시아의 탈(脫)푸틴화(化)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인 셈이다. 한데 내가 졸서에서 밝혀 둔 것처럼, 비록 우리 마음에 안들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해야 한다. 전쟁 개전 이전까지 69%에 마물렀던 푸틴의 지지율이, 개전과 함께 83%까지 솟아오른 것도, 전쟁에 대한 지지 역시 70-75%로 계속해서 지속적이었다는 점도 엄연히 사실이다.
이 현상을 “프로파간다로 인한 여론 조작”의 탓만으로도 돌리기가 쉽지 않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러시아인들이 예컨대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국가적 프로파간다와 다른 정보도 충분히 접할 수 있다. 프로파간다가 선포하는 서사를 대중이 이처럼 비교적 잘 수용한다는 것은, 내가 졸서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번 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관계 있는 것이다.
이번 전쟁은, 군수 (軍需) 공업들이 주도하는 재(再)공업화 등 러시아 자본주의의 축적 양식에 있어서의 상당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쟁으로의 동원 속 저(低)실업과 공장들의 인력난, 인력난으로 인한 임금 인상 등 전시 호황의 호경기라는 조건하에서 다수가 이 전쟁을 –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 지지하거나, 적어도 적극적 저항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 역시 뚜렷하다.
그렇다면 전시 호황 속의 다수의 ‘전쟁에의 동의’, 침략 전쟁을 축적의 원천으로 삼는 정권에 대한 지지 등은 과연 영구적인가? 졸서에서 말한 것처럼 결코 그렇지 않다. 베트남 전쟁을 그 초고속 산업화 전략의 일부로 삼았던 박정희 유신 정권은, 결국 내부에서의 과잉 중복 투자와 다수 노동자들의 저(低)구매력, 즉 낮은 내수력, 그리고 외부에서의 오일쇼크 등으로 결국 1979년에 정치 위기로 이어진 경제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울려 퍼지고 나서 10년이 지난 뒤에 부산과 마산에서 도시 봉기 (“부마 사태”, 부마 민주 항쟁)에 나선 성난 주민들은 박정희의 초상화들을 손으로 찢어내고 발로 밟았다. “서울의 봄”은 결국 다시 군화에 짓밟혔지만, 곧 이어진 1980년대는 한국에서 노동계급이 계급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디어 갖게 된 시기가 됐다.
지금 러시아의 독재 정권이 탈세계화와 미국 패권의 위기를 특수한 세계사적 국면을 이용하여 전쟁을 통해 1991년 소련 몰락 이후 결코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의 위상을 높여보려 하고 전시 호황을 통해 조속한 재(再)산업화를 시도하지만, 이 계획이 성공할 경우 러시아의 노동 계급의 힘 역시 커질 것이다.
결국 그들은, “미국과의 신성한 싸움”으로 포장된 전쟁이 지배자들에게 그저 정치·경제적으로 ‘기회’에 불과했다는 사실, 러시아의 하층민 등이 지배자들이 제시한 돈을 보고 그 사정이 같은 우크라이나 빈민들을 죽이러 전선에 사실상 팔려 갔다는 사실, 그리고 산업 붐으로 노동자들이 챙긴 임금 인상에 비해 지배자들이 챙긴 이윤이 훨씬 더 컸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졸서에서 내가 거듭 강조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계급적 자각이 가능해지는 그 순간 러시아의 좌파 지식인들이 1980년대의 한국과 같은 노학 연대, 즉 지식인들의 ‘전위’와 민주 노조 건설로 나선 노동자들의 연대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만약에 공장에 간 진보 지식인들의 고투가 계급적 좌파의 재생 (再生)으로 이어진다면, 1991년 이후 보수적 민족주의가 주류였던 러시아에서의 좌파 르네상스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좌파는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을 힘은 지금 없지만, 전쟁 이후에 힘을 키우기 시작하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정치적 의제의 전반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권력자들과 팽팽한 대결을 벌일 수 있는 날이 – 수십년 후일 수 있겠지만 – 결국 올 것이다. 이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졸서에서 내가 내린 결론의 가장 낙관적인 부분이다.
(기사 등록 20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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