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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얼마나 슬픈가: 훌륭한 당의 쇠퇴를 지켜보는 것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2. 5.

얼마나 슬픈가: 훌륭한 당의 쇠퇴를 지켜보는 것은[각주:1]


이언 버철(Ian Birchall) 

번역: 남수경 


[영국 SWP의 지도적 당원이었지만 2013년말에 탈당한 이언 버철이 SWP의 역사와 무엇이 어떻게 잘못돼 왔는지 매우 사려깊고 통찰력있는 관점으로 분석한다. 근본적 사회변혁과 그것을 위한 조직 건설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영감을 줄만한 글이다. 이 글을 번역해 준 남수경 동지에게 커다란 감사를 전한다. 

이 글의 출처는 http://grimanddim.org/political-writings/2014-so-sad/이다.]


오해하지 말아요군대가 완전히 부패한 아니에요.  최고사령부에는 훌륭하고 명예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문제에 대해선 군대의 이해를 다른 어떤 이해보다 우선에 거에요.  누구도 신전이 자신들 앞에서 무너지는 원치 않으니까요…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사관과 스파이> 등장인물이 드레퓌스 프랑스 군대 내에서 지지를 받는지를 설명하며[각주:2]

 

2013 12 15, 나는 내가 50 년을 담아왔던 사회주의노동자당 (Socialist Workers Party - 이하 SWP)에서 탈퇴했다. 나는 이상 나의 돈으로 당의 지도부를 지지할 수도, 그들의 규율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당을 떠나며 나는 이상 공개적으로 SWP 비판할 수 없다 했고, 그것을 지키려고 해왔다. 소규모 극좌파 조직들 간의 논쟁에 끼어 드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고 흥미로운 일들이 많다. 작은 혁명 조직의 분리에 관한 논쟁은 아주 지루한 경향이 있다.  문학 장르에 내가 보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아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기에 영국 좌파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그리고 내가 당원 임을 자랑스러워 했던 조직이 그리 빨리 쇠퇴했을까?  나는 IS(International Socialist: SWP 전신 조직번역자 ) SWP 50 이상 담았고, 7 동안 토니 클리프[SWP 창립자] 전기를 쓰는데 보냈는데, 클리프의 전기는 필연적으로 조직의 역사와 얽혀 있었다.  따라서 내가 관찰한 것들이 SWP 내부와 이제 새로 시작하는 다른 조직들 좌파의 일부에게 흥미로울 있을 것이다.



비록 어쩔 없이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지만, SWP 대한 공격 위해 것은 아니다.  작년 분파 투쟁에서 중앙위원회 (Central Committee  이하 CC) 지지하긴 했지만, 내에 심각한 문제들이 있고 당을 재건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는 인식하는 동지들이 많이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나의 분석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글을 논쟁에 대한 하나의 기여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더구나 나는 글이 자아 비판임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에 불거진 위기가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건강하지 못한 경향이 드러난 것이었다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방관한 것과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은데 대한 책임이 있다.

 

물론 좌와 우의 SWP 적들, 또는 맑스주의 좌파의 적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글을 문맥을 무시하고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결코 진지하게 토론하지 못할 것이다. SWP 나의 몇몇 친구들은 내가 침묵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거라는 안다.  


하지만 토론이 없이 어찌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할 시도를 있을까? 너무 오래동안 나는 그런 토론은 소수의지도부 비공개로 진행할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더이상 그런 방식이 충분하지도 실제로 될거라고 자신할 수가 없다. 어느 조직이든 스스로를레닌주의자라고 부른다면 레닌이 (1917 9월에) 다음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어제의 오류들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오늘과 내일의 오류를 피하는 방법을 배운다.”[각주:3]


나는 현재 어느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다. 여전히 혁명적 좌파에 열렬히 동조하지만 말이다.  나는 개인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글은 나의 인식과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나와는 다른 경험을 사람들은 주장에 덧붙이거나 또는 반박할 수도 있겠다.


나는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당을 떠났을때 나의 감정은 주로 당을 지경에 몰아넣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분노는 생산적인 감정이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서 분노는 수그러 들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한 개인들을 탓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은 어느 개인의 결함이나 잘못된 판단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개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는 하다. 만약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말하듯이 SWP 민주주의 모델에서강력한 지도부는 연례협의회에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면서 사업에 명확한 방향성을 주기 위해 내에서 조직적으로 활동[각주:4]한다면, 당에 해로운 실수를 저지렀을 개인들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만 한다.  


2013 1 위기가 터졌을 나의 반응은 인생을 낭비했다 끼는 것이었. 50 이상 동안 나는 때때로 직위에 적합하지 않는 동지들이 지역이나 심지어 전국 사무소에서 공식적 직함을 맡고 있는걸 보아왔다.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바로 당의 부패가 오래동안 진행되어 증거라고 보기가 쉽다.  여러 블로그에서 당원들이 그들이 당을 떠나게 계기가 되었던 나쁜 경험들을 묘사하는 읽으면서 나도 종종 공감하곤 했다.  역시 여러번 나쁜 경험들을 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기억도 많이 있었다.   


나는 IS/SWP에서 정치적 이론 아니라 노조와 공동전선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 어디에서도 얻을 없는 훌륭한 정치적 훈련을 받았다.  나는 정치적 원칙을 위해 자신들의 돈을 기꺼이 내고, 정치적 이상을 위해 자신들의 커리어와 개인 생활을 기꺼이 희생하는 수백 명의 훌륭한 동지들을 만났다.  (작년 분파 투쟁에서 가장 슬펐던 하나는 오랫동안 동지이자 친구로 여겨왔던 사람들과 반대편에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반나치동맹은 영국에서 극우의 준동을 막아냈고, ‘전쟁저지연합 (Stop The War) 영국 정부의 군사적 모험이 나아가는 막는데 도움이 .  1984~85 광부 파업과 인두세 저지 캠페인에 대한 SWP 개입은 크게 칭찬 받을만 했다. 수많은 다른 작은 분규와 캠페인에 대한 우리의 개입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개최되는 맑시즘, 북막스 출판사의 간행물들, 그리고 <국제사회주의> 저널은 국제적 좌파 어디에서도 비교대상을 찾기 힘든 정치적 교육과 이론적 혁신의 작업을 수행해 왔다. 한순간도 내가 IS 가입해서 오랜 세월 조직에 남아 있었던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나는 미래의 투쟁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가 조직을 건설했다는 믿음 가진채 행복하게 죽을수 없게 됐는가?  당의 위기를 초래한논쟁 대해 자세히 되풀이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러나 몇가지 점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델타[각주:5]동지에 대한 고발로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상황을 다루는 쉬운 방법은 없었고, 만약 내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역시 다른 동지들처럼 상황이 쉽지 않다는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도부를 선출할 때는 지도부가 어려운 상황들을 다룰 있는 지적인 능력과 경험이 있을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되돌아 보면 최선의 해결책은 분쟁위원회가 스스로 강간 사건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없다 것을 정하고, “당에 불명예를 초래했으므로 (이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델타 동지를 자격 정지에 처하거나 제명 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알려진 정보에 기반해서는 나는 델타 동지의 강간 혐의에 대한 유죄 여부를 수가 없다 (비록 여성들이 거짓으로 강간을 고발하는 경우는 거의 다는 증거가 지만).  측이 모두 받아들이는 사건의 내용에 따르면 그가 부적절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했고, 당에서 그가 지닌 지위의 특권을 남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여기서 나는 지도부는 아니지만, 일부 지도부 지지자들이 했던 피해 호소 여성들 또는 국가기관의 첩자였을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해야 겠다. 나는 이것이 분명히 과대망상증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로선 국가가 그런 방법을 써야 할만큼 SWP 위협이 다는 증거가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방법이 쓰일 어떤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델타 동지는 당의 고위 간부로서 이성과 관계를 맺을때 조심하지 않았다는 커다란 잘못을 지른 셈이.)     


나는 분쟁위원회 동지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연히 지켜보고 있던 당원들과 외부의 사람들에게 정의 실현할 아니라 그것을 여주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분쟁위원회는 그것에 참여한 사람들의 선정과 절차 모두에서 정의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확신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상황에 대해 CC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 


당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사실이 아닌 논점을 흐리는 비난들을 했다.  당원들은강간 옹호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말에는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다.  만약강간 옹호라는 말이 강간이 흔한 일이 아니고, 잘못된 신고가 많고, 과장되게 신고가 되고, 별로 일이 아니거나 또는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용납이 되는 [각주:6]이라는 주장을 받아 들이는 포괄적인 용어라면 이는 분명히 SWP 내가 아는 어떤 SWP 당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   


강간 부인자라는 말은 부적절하다.  만약 강간 부인자가 강간이라는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 뜻한다면 (여성들은 항상 성관계를 동의한다는 논리로), SWP 당원 누구도 그런 입장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용어가 특정한 상황에서 강간이 있었다는걸 부인하는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모든 성관계를 강간이라고 믿는 극단주의 페미니스트만이 부인하는 상식적인 입장 것이.  SWP 행사에서 여성들 위험 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말도 안된다.  SWP 행사들은 진행이 되고 여자들은 취한 자유민주당원들의 모임에서 보다 SWP 행사에서 훨씬 안전하다.  


하지만 이것이 당의 책임을 완전히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일부 동지들은 분명히 강간을대수롭지 않은 치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침실세’ (여분의 침실 수에 따라 주택보조금을 삭감하는 정책 - 역자 ) 반대를 조직해야 시간에 우리가 그토록 많은 시간을 일에 허비해야하는지 묻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동지들이 잊고 있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곪아 터져서 우리가 침실세 반대 투쟁을 조직하는데 훨씬 비효과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이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는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최근 호들이 보여준다.  2014 가을 타블로이드 신문들을 뜨겁게 장식했고 직장 내에서 광범위한 토론을 불러 두가지 이슈는 (강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반성 없이 축구선수로 복귀 하려고 ) 체드 에반스와 오스카 피스토리어스[남아공에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스포츠 스타] 살인혐의 재판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 문제들에 대해 한마디도 다루지 않았다.  분명히 에반스 사례 델타 동지 사건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신문이 뭐라고 했던 간에 망신스런 비판을 받을 것을 의식했던 .  피스토리우스 사건을 무시한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아는 중앙위원회 멤버 누구도 살인 혐의를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아마도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의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실 2 , SW에는 피스토리우스 사건에 대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훌륭한 기사[각주:7] 실렸었는데, 그걸 다시 싣거나 재활용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문제 전체를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낀 같다.  여성 억압에 대한 토록 분명히 시사적인 예들을 SW 토론할 없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아무리 리즈 보글[저명한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가] 대해 많이 학술적으로 분석을 한다해도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참으로 재앙적인건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였다.  2013 1월의 협의회에서 CC (중앙위원회) 분명히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깨닫지 못하면서 투표에서 이기는데 전력을 다했다.  협의회 후에 우리는 문제들이 토론된 후에 결정 다고 들었다.  이제 우리는 입을 다물 것을 요구 받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협의회 전에 분명치 않은 소문들만 들었고, 따라서 의사결정 과정에 거의 참여할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협의회 전에페이스북 4인방[페이스북을 이용해 영구분파를 만들려 했다는 누명을 받은 당원들] 제명다는 보고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분열이고, CC 알아서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분명히 나도 책임을 피할 없을만큼 형편없이 틀렸고, 당에 대한 충성이 결코 의식적 각성을 대신할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시켜 준다.) 


CC 부터 시작되어 지역의 지도부 지지자들이 충실하게 퍼트린 미사여구는토론하고, 결정하고 이어서 행동통일한다였다.  당의 전통과는 거리가 , 특히 토니 클리프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다수결] 투표에 대한 조잡한 형식주의 집착증 토론을 장악했다.  이것의 명백한 예는 마크 크란츠가 <소셜리스트 리뷰> 보낸 독자 편지에 나와있는데, 그는 러시아 혁명이 투표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나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버철이 주장하듯이봉기가 다수의 투표에 의해 이루어질 없다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세번에 걸쳐 봉기를 것인지에 대해 투표를 했다.  결선 투표에서 찬성 20, 반대 2, 그리고 기권 3표가 나왔다.  러시아 혁명이 무르익으면서 다수의 결정이 실행에 옮겨졌고, 봉기는 조직됐고, 그리고 성공하였다.  이것이 1917 10 혁명이었다.[각주:8] 

 

러시아 혁명을 단순히 중앙위원회의 투표 문제로 격하시키는 것은 내가 보기에 혁명적 전통을 완전히 포기하는 하다. 


상황은 악화됐다.  만약 델타가 그가 30년을 바친 조직을 최우선에 두었다면 그는 당장 모든 지위에서 사퇴하고 상당 기간 동안 자숙해야 했을 것이다. 대신에 그와 CC 그리스의 명망있는 강연에 그가 참석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것은 당연히 CC 비판하는 사람들을 일부러 모욕하는 것으로 비췄다.  (상당수의 회원들을 모욕하는 지도부는 명백히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 주변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맑시즘을 보이콧하겠다고 밝혔다.  


처음에 나와 많은 동지들은 아주 비관적이었고 망연자실 했다.  만약 CC 상황을 재평가하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이고 화해와 타협을 모색하려 했다면, 우리 다수는 그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을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CC 자신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입증하는데만 관심이 있는듯 했다.


CC 멤버는 내게 만약 당원들을 잃는다면, 그것이 당을 정치적으로 강하게 것이므로 좋은 이라고 했다.  그는 상황을 1975년의 조직 분리에 비유했는데, 그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다.  나는 그에게당원이 탈당할 때마다 당은 강해진다 힐리의 말에 동의하냐고 물었다.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마침내 우리들 일부는 분파를 결성하기로 했다.  우리는 특별협의회를 쟁취해 냈다. 


협의회 준비는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대의원들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당원 수에 기반해 선출되어서, 그게 과연 실제 회원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웠다.  CC 논쟁을 고무하는게 아니라, 이를 가로 막으려고 했다.  반대파들의 발언은 기껏해야 6분으로 제한됐다. 반대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협의회에 참석하는 막으려는 온갖 시도들이 이루어 졌다.  


내가, 과거에 클리프와 그의 중앙위원회는 진정한 논쟁을 위해 반대파 중에서 가장 명확한 동지들이 협의회에 참석할 있도록 모든 노력을 했었다는 지적하자, 캘리니코스 동지는 내가 (생전의 클리프를) 부드러운 클리프였던 것처럼 묘사하려 한다고 오만하고 경멸적인 어조로 힐난했다.  클리프는 나도 너무나 알듯이 부드러운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에게는 최고 수준의  공개적인 논쟁을 하고자 하는 정치적 자신감이 있었다.


협의회 준비기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일부 CC 지지자들은 아주 무례하게 행동했다.  예를 들면 완전히 정당한 반대파의 모임을 위해 예약된 장소들을 취소하기 위해 거짓으로 전화를 했다.  아마도 CC 그런 행동들을 대놓고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열성적인 지지자들에게 고삐를 채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분파투쟁에서는 누구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 같다. 거의 틀림 없이 일부 반대파 동지들도 이상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CC 협의회에서 승리했고, 다수파의 많은 지지자들이 저질스럽게 발을 구르며 - 이것은 이전의 행사들에서 보지 못한 것이었다 - 반대파가 당에서 나가도록 여력을 다했다. 수백 명의 당원들이 당을 떠난 것은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다. 


단계에서 나는 입장을 숙고하고 나서, 당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이전에도 당은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극복했었다.  나는 여전히 이제 지도부가 승리했으니 화해를 거라는 헛된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도부는 표피적인 변화 외에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맑시즘 직전에 CC 한걸음 물러나야만 하는 상황이 왔다.  CC 반대파의 지도적인 동지 네명의 자격을 정지시키자 맑시즘에 참여하기로 했던 상당수의 연사들이 행사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CC 한발 물러났다 (SWP 종종 주장하듯이 파업은 승리를 낳는다.')  그러나 CC 기회에 상황을 폭넓게 재평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것임이 드러났다.  


내게 최후의 결정타는 9월에 CC 재선거에서 상황을 악화시킨 모든 CC 멤버들을 전원 그대로 후보단으로 다시 세우겠다고 CC 발표한 것이었다.  이후 나는 사전-협의회 발의를 했지만, 안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점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2013 한해 동안 CC 보여준 리더쉽은 피트 시거의 노래 < 머디> (“The Big Muddy”)[각주:9] (원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노래) 요약될 있다.  작전 중인 소대원들에게 소대장이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린다. 강이 너무 깊은게 분명한데도 소대장은 완고하게 명령을 바꾸지 않는다.  진흙탕 속에 허리까지 빠져 있는데도, 멍청한 놈이 우리 보고 무조건 전진하라 하네”. 


과거에 그렇게 훌륭했던, 내가 진심으로 당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당이 어떻게 그리 나쁘게 변할 수가 있었을까?  상황이 나빠진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나는 주장들에 회의적이다.


1950: 틀림없이 몇몇 편협한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론을 발전시킨 때로 소급된다고 생각한다.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론이 지금보다 훨씬 추악한 1985년의 스캔들에서 WRP (노동자 혁명당 Workers Revolutionary Party) 구해주지 못했다는 기억하자.


1968: 클리프가 민주집중제로 전환한 것이 우리가 이후 내리막 길로 가게된 계기가 되었나?  틀림없이 클리프가 레닌을 과도하게 인용하면서 민주집중제로의 전환을 주장한 방식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있다.  그러나 일부 동지들[각주:10] 1968 이전의 IS 낭만적으로 그려 왔다.  나는 68 이전의 조직을 기억하고 있고, 이전에도 잘못은 있었다.  중요한 점은 1968년의 전환은 개입주의 조직으로의 전환이었다.  1968 이전 IS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은데서 주로 기인했다.  비록 1968 우리의 희망이 과장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요한 투쟁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우리가 투쟁들에서 영향을 미칠 있다는 합리적인 전망을 했었다.


1975: 그의 저서 <More Years for the Locust>[각주:11]에서 히긴스는 그리고 그의 여러 동지들은 히긴스와 로저 프로츠, 팔머 다수의 버밍햄의 전투적인 지도적 산업노동자들이 제명된 1975년의 사건이 조직의 근본적 몰락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상황이 잘못 처리 되었고 적어도 일부 동지들을 잃는것을 피할 있었다는걸 부인하기는 힘들다.  당시 CC, 특히 클리프는 인내심이 없었고 당원들이 무한 공급되기 때문에 간부 당원들을 쫓아내도 된다고 믿는 했다.  하지만 당이 분열한데는 히긴스의 리더십 스타일이나 프로츠의 전문적 저널리즘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일부 노조활동가들의 노조기구와 범좌파(Broad Left: 좌파 조직들이 힘을 모아서 좌파 노조 지도부를 세우는 전술 - 역자 )와의 타협 등의 분명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나는 히긴스의 서평[각주:12]에서 했던 나의 히긴스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1979: 1979 계급투쟁의침체 인지하고, 결과 평조합원 그룹을 해체하고 조직을 방향 전환시킨 것이 쇠퇴의 시작이었나?  “1979 이후 당은 벙커 아래로 들어갔고 모든 멤버들에게 정치적 동일성을 강요했다[각주:13] 주장이 있어왔다.  나는 주장에 강력히 반대한다. 클리프가 침체기를 인정했기 때문에 영국과 세계의 다른 많은 조직들이 자신들의 전망을 어려운 시기에 맞추지 않아 댓가를 치뤄야 했던 1980년대에 당은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 남을 있었다. 물론 클리프나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침체기는 훨씬 오래 지속되었고, 새로 맞이하는 시기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재분석을 했었야 했지만 말이다.    


1982: 1982 <여성의 소리> 폐간한 것이 건강한 조직으로서의 SWP 종말이었고 심각한 성차별주의가 거라는 경고였나?  1972 시작된 <여성의 소리> 여성억압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고, 압도적으로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여성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의 전환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거기에 문제도 있었다.  <여성의 소리> 존재하는 동안 여성 동지들을 <여성의 소리> 활동에 배치하고 나머지 조직과 노조, 캠페인 활동이 여전히 남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 <여성의 소리> 활동가들은 위험을 인지했다. 1984 노라 칼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우리들만의 코너에서 게토화 되고 있었을 보다 우리의 주장이 훨싼 많이 소셜리스트 워커와 소셜리스트 리뷰에 실리고 있다.”[각주:14]


1990년대: 소규모 브랜치로의 전환인1990년대의 전략은 많은 문제들을 낳았고, 되돌아 보면 잘못된 전망에 기반한 것이었던 같다.  하지만 결과들이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1980 대의 브랜치들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브랜치위원회가 장악했다.  1990년대의 변화는 멤버들을 좀더 자립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전환기에 대한 기대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반자본주의 운동같은 새로운 기회들에 제대로 대응했다.  9/11 직후 상황에 주도적으로 재빨리 대응했고, 이는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 활동으로 이어졌다.


2000:  클리프의 사망이 막다른 길이었나?  그의 죽음은 의심할바 없이 엄청난 손실이었다. 클리프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즉각적으로 나빠지지는 않았다.  전쟁저지연합은 아무리 실수가 있었고, 일부 지도적 인사들이 이후 변했다 해도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을 시작한 SWP 당원들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있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모든 반전운동들이 쇠퇴했지만, SWP 특히 2003 11 부시 데모로 여세를 유지했다.

 

2007:  리스펙트의 와해는 확실히 당의 주요한 후퇴였다.  지도부는 판단에 있어 심각한 실수를 했다.  조지 갤러웨이는착할 때는 아주 착하지만, 나쁠 때는 아주 무시무시하다 동요 가사처럼 어려운 동맹자였다. 리스펙트가 다른 세력들을, 특히 노동당으로부터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조직이 너무 지나치게 갤러웨이 개인의 성향을 중심으로 뭉쳤다는 뜻했다.  하지만 처음의 추동력은 틀리지 않았었다.  노동당의 대안으로서 좌파 선거연합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했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좌파 전체의 힘을 강화했을 것이고, SWP 안에서 활동할 있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정말로 나는 2012년까지 비교적 낮은 수준의 투쟁에 비해 SWP 여전히 비교적 건강한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2012 맑시즘은 내가 참가한 역대 맑시즘 최고로 훌륭한 맑시즘의 하나였다 (나는 1977 이래 한번을 제외하고 매년 맑시즘에 참가해 왔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로 가득 했었다.  나는 당의 미래에 대해 진심으로 낙관하며 행사를 마쳤다. 그것이 만에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게 나빠진 어느 하나의 전환점이 있었다기 보다는 일련의 부정적인 과정들이 계속됐고, 우리들은 이에 대해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침내 양이 질로 전환되었고, 그리고 재앙적인 위기가 닥쳤다.  직접적인 원인은 어떤 면에서는 우연적이었다.  투박하게 말해서, 만약 델타 동지가 아랫도리를 간수했다면 상황은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들이 종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나타났을 것이다.


한가지 중심적 측면은 당내 민주주의가 장기간에 걸쳐 퇴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심스럽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권력에 굶주린 지도부가 저항하는 당원들의 민주적 권리들을 빼았은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당원들도 적어도 지도부만큼 책임이 있고 또한 고참 당원으로서 상황이 나빠진데 대해 정당한 몫의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로 혁명조직 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격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조직은 우리가 미래에 건설하려고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그대로 보여 수는 없다.  혁명조직 내에서 균등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1962 국제사회주의자들 가입했을때 나는 맑스주의 서적을 읽은 대학원생이었지만 노동계급 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나는 엄청난 식과 경험이 있는 토니 클리프와 똑같이 표를 가졌다.  실제로는, 정당하게도, 결정을 내리는데 클리프의 영향력은 나와는 비교도 되게 엄청났다. 


그러나 혁명조직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필수적이다.  두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로, 리더쉽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검증돼야 한다.  아무리 개인들의 의도가 좋고 혁명적 헌신성이 있다해도, 도전받지 않고 재선출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지도부는 결국에는 게으르고 조심성이 부족하게 되고, 자신들의 결정을 설명하거나 정당화 필요가 없고 지름길을 찾게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 마음대로 있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혁명적 지도부는 노동계급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필요가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 읽는 것으로 그것을 없다.  지도부는 계급의 여러 다른 부문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고할 있는 동지들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클리프가 주장했듯이 


“… 그들은 동료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것만큼또는 그보다 많이 -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반복하자면, 임무는 지도하는 것이고, 지도하기 위해서는 지도하려는 사람들을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  리더쉽은 양방향으로 이루어 진다 많은 이들이 지도부를 신념, 이론, 조직적 능력과 지식의 집합소로 본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한다.  하지만 주로 지도부는 가장 배우는 사람들, 가장 예민한 귀와 단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각주:15]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의 좋은 예는 1992 광산 폐쇄가 발표 되었을때였다.   SWP 총파업 요구를 제안했다.  얼핏보면 항상 그런 슬로건을 초좌익적이라 거부해 우리의 입장과 모순되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 동안은 구호는 현장과 전국의 노조브랜치들의 분위기에 들어맞았다. 신문 판매와 신입당원 가입은 우리가 시류를 따르고 있다는걸 보여주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있었을까?  왜냐면 중앙이 쉬지 않고 전국의 조직자들과 핵심 활동가들과의 전화 통화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당원들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당원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보고해야 하는 것이지, 보이기 위해 중앙이 듣고자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보에는 따분한 승리주의만이 넘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지도부는 불편하거나 그들이 주창해 노선과 반대되는 진실도 들어야 한다.  만약 당원들이 지도부의 입장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주저하게 된다면 지도부는 그들이 미리 정해 놓은 입장에 순응하는 메아리만 듣게 것이다.  그러면 결국 커다란 진흙탕에 빠지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이론상으로는 괜찮은 민주적 메카니즘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왔다.  80 대에 강력한 브랜치 위원회가 있었을 브랜치 위원회는 연례 협의회에 보낼 대의원들을 슬레이트[집단적으로 구성된 명부] 선출했었다.  물론 당원들이 브랜치 위원회가 추천하는 것과는 다른 대의원단을 지명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으로 여겨져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브랜치 사회자가 브랜치 미팅의 의제를 얘기하며 그리고 협의회 대의원들이 공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실질적으로 그가 맞았다  –  보통 그런 식이었다. 


최근 몇년 사이에 지역의 협의회 대의원의 수가 과장되고 완전히 비현실적인 당원 수에 기반해 선출 되어서, 지역위원회에서는 종종 할당된 대의원단을 채우는게 불가능하기도 했다.  2013 1월의 북부런던 협의회 보고미팅에서 웨이먼 베넷 (중앙위원의 하나 - 역자 ) 아주 솔직하게 그가 거의 매년 CC 선출이 진행되는 동안 졸았다는걸 인정했다.  

중앙위원회 선거가 그에게는 지루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직에서의 그의 지위와 판단을 내릴 있는 권한은 바로 그런 선거의 결과였다.  중앙위원이 민주적 과정에 대해 그렇게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우려할 만할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 나를 포함해서 -  회원들 내의 민주적 절차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한 이유들은 당의 문화에 깊게 뿌리박혀 있다.  이는 당에 널리 퍼져있는 외향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있다.  클리프는 그가 보기에 관심이내향적 동지들을 항상 신랄히 비판했다.  물론 그가 옳았다.  혁명조직은 외부에서 시작된 상황에 개입하고, 외부의 운동, 투쟁과 사람들에 결부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런 개입이 얼마나 효과적인가가 조직의 가치를 판단할 있는 유일한 척도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에 내재한 위험, 우리가 극적으로 치루어야 했던 댓가는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들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당원들의 몫이 아니고, CC, 전임상근자들, 지역위원회들 기구에게 맡겨져야 하고, 이런 기구들 스스로가 때때로내향적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당내 문제에 참견할 권리는 거부하는 것이었다.


당원들이 당내 민주주의에 대해 그리 무관심 했던 다른 이유는 기존의 체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1960 이후 계속해서 우리는 비교적 좋은 결과들을 얻었다.  소셜리스트 [노동당 청년조직] 내에서의 활동, 직장위원 생산성협약에 대한 클리프의 저작들, 평조합원 그룹들과의 관계, 반나치 동맹, 광부파업과 인두세 반대 캠페인에 대한 개입, 전쟁저지연합과 리스펙트까지.  


우리는 시기에 비록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CC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우리는우리의 체급을 넘어서 주먹을 날릴 있는능력을 발휘해 왔다.  지도부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데 협의회에서 심각한 의견대립을 이유는 없었다. (사실 활동적인또는 열정적인 - 회원들 있는 어느 소규모 그룹이든 간에체급을 넘어서 주먹을 날릴 있다.  그것 자체가 올바른 정치의 증거는 아니다.)


이런 성공들은 클리프, 던컨 핼러스, 그리고 크리스 하먼, 특히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  1968 부터 1990 후반까지 그들은 지도부의 핵심이었다.  다른 능력있는 다수의 개인들의 공헌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지지만, 세명은 그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다.  클리프에 대해서는 다른 얘기가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한 장편의 전기를 썼고, 그에 대한 나의 평가는 여전히 같다.  내가 썼듯이그는 내가 만난 사람들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있다”.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장점에 수반된 약점들이었다. 


던컨 핼러스는 공장 노동자였고, 영국 군대에서 반란을 주도하는데 역할을 했었었다.  그는 맑스주의 이론과 영국 노동자 운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73~74년에 그는 클리프에 반대해서 반대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자신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존중했던 클리프는 반대파에 맞붙기 전에 조심스럽게 그를 다시 설득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클리프의 제멋대로인 변덕스러움을 절제시키고,  레닌의 표현대로 지도부의 노선을  참을성 있게 설명하기 위해 기꺼이 클리프에게 도전하려 했다.


크리스 하먼은 아주 재능있는 지식인으로 클리프를 발전시키고 보충했다.  그가 젊었을때는 클리프에게 많이 배웠지만, 그는 70 후반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의 지향에 대한 클리프의 생각에 맞서 날카롭게 싸웠다.  그러나 클리프는 하먼의 판단을 존중했고, 하먼이 20 이상 신문의 편집장으로 있는 기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클리프와 던컨 사후에 크리스가 지도자로서 서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각주:16]


명이 서로의 관계를 상호보완하면서 회원들에게 효과적인 리더십을 제공할 있었다.  따라서 시기 동안은 지도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없었다.  그리고 명이 모두 세상을 떠났을 우리는 지도부에 도전하지 않는 관성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지도부는 똑같은 충성심을 누릴 있는 능력과 경험이 없었다.  지도부는 다른 리더쉽 스타일을 채택했어야 했다.  리더쉽은 성취하는 것이지, 투표로 강요하는게 아니다.  


물론 클리프의 지도부 실수를 했었다.  1984~85년의 광부파업과 인두세 반대 캠페인이 시작되었을 SWP 어느 정도 정당화 있는 초기 입장을 채택했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광부 지지위원회들과 세거부운동으로부터 종파적으로 고립될 있었다.  그러나 상황에서 모두 지도부는 상황을 주의깊게 관찰했고 입장을 조정할 필요를 인식했다.


나는 여기서 내가 확증 수가 없어서 그의 전기에는 싣지 않았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클리프에 대한 일화를 하나 보태겠다. 1972 3월에 IRA 연관이 있다고 잘못 의심받은 IS 멤버들을 체포하려고 경찰이 급습했었다.  전국서기인 히긴스가 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IS IRA 정치적 폭력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려고 너무 지나치게 나아갔다.  


운영위원회(지금의 CC역할을 ) 이에 대해 토론한 실질적으로 은폐작업에 동의했는데, 크리스 하먼 만이 이를 반대했다.  회의를 기록하고 있던 여성 동지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라며 눈물을 흘리며 회의실을 뛰쳐 나갔다. 이에 대한 클리프의 즉각적 반응은멤버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상황을 것이다라며 그의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고 운영위원회에게 성명을 번복할 것을 설득했다.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입장을 바꾸는 것을 아주 두려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이 약해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입장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유약함의 신호이고 그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의 결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클리프는 항상 상황이 요구한다면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데 능했다.  클리프가 있는 당원들은 필요하다면 진행 방향을 바꿀 있는 유연하고 민감한 지도부를 가지고 있다고 안심할 있었다.  따라서 그런 변화의 메카니즘과 그런 변화들이 당원들 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무오류의 지도부는 없고, 모든 지도부는 실수를 한다. 문제는 지도부가 스스로의 실수를 정정하고 그것이 초래한 손실을 회복할 있는지의 여부다.  만약 클리프가 살아 있을때 델타 스캔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할 있다.  생각엔 클리프가 처음에는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사내들이 그렇지 ”) 델타를 방어했을 것이다.  상상이 안되는 것은 클리프가 수백 명의 당원들이 당을 떠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었을 거란 것이다. 


클리프 사후 지도부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의 신호는 리스펙트에서 갤러웨이와의 연합이었다.  나의 다소 시니컬한, 하지만 정확하다고 믿는 판단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갤러웨이는 선거 활동을 실무자들이 필요해서 우리를 이용하고자 했고, 우리는 세간의 이목을 끌고 사람들을 많이 만날 있는 넓은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에 갤러웨이를 이용하고 싶어했다.  순진하고 멍청하게도 나는 우리가 경쟁에서 이길거라는데 의심이 없었다.  나는 반나치 동맹과 다른 공동전선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틀렸던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SWP 당내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핍을 겪어왔다.  이것은 단순히 지도부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지도부의 책임감 결여가 이것을 부추겼지만, 그것은 개입주의 정치를 원했고 성과만 낳을 있다면 그것에 만족한 회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따라서 델타 문제가 불거졌을때 그런 재앙적 결과를 가져온 민주주의의 부재는 당헌과 규약상의 문제라기보 훨씬 커다란 조직 문화의 문제였고, 상황을 치유할 있는 규약의 변화라는 간단한 해법은 없었다.[각주:17]


따라서 나는 분파 투쟁 과정에서 나온 여러 이슈들은 사실상 부차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모두들민주집중제 얘기했지만 말의 의미는 파악하기 힘든 것이었다.  한편으로 거의 모든 집단 행동은 일정한 민주집중제를 필요로 한다.  반드시 합의점을 찾을 방도가 있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집중제는 여러 형태와 변형이 있어서 그것을 본질로 축소하는 것은 어렵다. [특정한 형태의] 민주집중제 원칙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볼때 그저 혼란을 초래할 뿐이었다.


영구분파 문제는 CC 만들어낸,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방편이었다.  반대파에 가담한 일부 개인들이 영구분파를 옹호했을 수는 있다 구체적인 사안에서 분파는 단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분파의 요구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동안 나의 입장은 (내가 1969 영구분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영구분파는 논쟁을 양극화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슈들은 계속해서 바뀌 영구분파의 위험성은 그것이 내의 당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파 투쟁 CC 만들어 영구분파에 대한 도덕적 공포는 단지 이슈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내부 논쟁이 어떤 형태를 띄어야 하는지에 대한 제대로 토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슬레이트[집단명부 선출] 시스템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도입될 부터 지지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의 대안인 개인들에 대한 투표가 실패하는 것을 직접 봤기 때문이다.  개인들에 대한 인기 투표는 연사나 저자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작업장이나 지역에서 헌신해 동지들에 비해 훨씬 많이 득표하는걸 의미했다.  슬레이트 시스템에서는 서로의 능력들이 상호보완되는 균형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당선된다. 하지만 1973년에 전국서기가 믿을만한 동지들에게 비밀스럽게 슬레이트를 돌렸던, 시스템의 최악의 경험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들은 슬레이트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슬레이트 시스템은 CC 자신들이 인정하는 개인들을 임명하면서 무한정 스스로를 재선출 하는 수단이 . 게다가 이제는 정치적 커리어 진로가 분명히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학생 출신의 동지들이 상근자가 되고,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CC 멤버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 활동 대부분을 상근자 보낸, 따라서 직장이나 노조 활동의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CC 갖게 된다.  


내가 내부 토론에서 점을 지적 했을때 CC 격분하며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우리들 네명은 이전 직장에서 파업을 조직하는데 기여했고, 두명은 2011년의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에 참여했다”.[각주:18] 이것은 자칭 노동자 당의 지도부로서는 그리 뛰어난 전력이 아니다.  2 전에 경험있는 노조 활동가가 비상근 CC 멤버로 들어갔다.  우리들 다수는 이것을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의 걸음이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동지가 감히 반대 의견을 표출하자마자, 동지는 바로 CC에서 제명됐다.        


나는 상당 수의 SWP 상근자들을 알고 있고, 대부분은 형편없는 보수에도 열심히 일하는 헌신적인 동지들이다.  하지만 상근자와 작업장 활동가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타임 스케일의 차이 말이다.  작업장의 활동가가 신임을 얻고 지도할 능력을 키우는데는 , 심지어는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전임상근자는 빠른 결과를 얻어야 하는 시간의 압력에 놓여있다.  사이에는 필요한 긴장이 있다.  1970 대와 1980 대에 그것은 일반적으로 건강한 긴장 관계였다.  작업장과 노조 활동가들은 쉽게 일상주의에 빠질 있었고, 상근자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CC 세계를 완전히 상근자의 관점에서만 보는 하다. 


어떤 면에서 과정은 정치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유사하다. <가디언> 지의 보도에 의하면다음 선거의 불안정 의석(근소한 득표 차로 당락이 좌우되는 의석 - 역자 ) 도전하도록 선정된 노동당 후보들의 절반 가량이 전직 특별보좌관, 상근자, 연구원, 로비스트, 또는 의원으로 웨스트민스터와 연계가 있다[각주:19] 했다.  이것이 바로 유권자들이 직업 정치인들을 점점 신임하지 않는 중요한 양상이. (클리프라면 달려들어서 열의를 다해 분석할 내용이다.)  하지만 SWP 노동당의 이런 점을 비판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스스로의 경력 구조와 유사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CC 뻔한 역량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동지들이 CC 지지한 것이 하나도 놀랍지 않은 하다.  우리는 민주적 권리를 너무나 오랫동안 사하지 않아서 어떻게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지를 거의 잊어버렸다.  반대파에 가담한 동지들도 바로 몇달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CC 지지하도록 멤버들에게 압력을 가한 또다른 요인들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내가 잘났다거나 거만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강조해야겠다.  그와 반대로 나도 매우 강하게 느꼈던 압력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나는 CC 지지했던 대다수 동지들의 진정성이나 그들이 문제가 이슈들을 깊이 뇌하며 생각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첫째로 조직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혁명가가 되는 이유는 억압과 착취에 기반한 세상에 분노하고 그것을 바꾸고 싶어서이다.  처음에는 반감을 느끼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오로지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만이, 조직의 일부가 됨으로써 어떤 효과적인 것도 성취할 있다는 깨닫게 된다. 조직은 사회 변화라는 목표의 수단이다.  그러나 정치 활동에 개입하게 되면서 수단이 목표 자체가 되기 쉽다.  특히 레닌주의 전통은 항상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레닌은 조직의 형태에 대해서는 아주 유연했지만, "우리에게는 조직이 필요하다 핵심 원칙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종종 조직 방어가 자체의 목표가 있다. 


결과는 종파주의이다.  SWP 당원들이 종파주의라는 용어를 올바른 의미인 계급의 이해보다 조직의 이해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SWP 아닌 다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쓰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SWP 선전에서우리에게 혁명적 당이 필요하다 올바른 입장이우리가 혁명적 당이다라는 다소 미심쩍은 입장으로 미끌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과대망상에 빠지기는 쉽다.  몇년 리스펙트가 도전하는 의회 보궐선거가 맑시즘이 열리는 주에 열렸다.  많은 SWP 동지들이 확신에 차서 노동당이 맑시즘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날짜를 그렇게 잡았다고 주장했다.  좌파 조직들이 자신의 규모나 조직의 취약함을 인정해야 하고, 자신들이 실제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할때에 이것은  특히 위험하다.   


다음에 신뢰의 문제가 있다.  많은 동지들이 나는 분쟁위원회를 신뢰한다 말로 논쟁의 결정타를 날렸.  나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이해했다. 비록 그들의 기쁨에 넘치는 표정이 마치 교리문답하는 아이를 연상시켰지만 말이다.  분쟁위의 동지들은 훌륭한 정치적 전력을 지닌 훌륭한 동지들이었다.


어느 조직도, 그리고 특히 혁명정당 같은 자발적 조직은 신뢰없이 존재할 없다.  이것은 수십년 SWP 한번도 회계장부를 공개하지 않고도 (그러면 국가의 괴롭힘에 노출될 있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로) 당원들과 비당원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회계장부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기구의 누구도 부자가 되지 않았고 우리 눈으로 직접 우리가 돈으로 만드는 신문, 플래카드 그리고 저임금을 받는 조직자들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내는 돈으로 월급을 받는 상근자들이 당원들의 이메일을 해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때 소문들을 악의적인 명예훼손으로 치부하기 쉬웠다.  


세번째로 충성심의 문제가 있다. 피터 세즈윅은 1956 이전 공산당 당원으로서의 그의 경험과 그가 당의 기관지에 실린 입장 받아들였는지를 아주 훌륭하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는 데모에서 경찰과 충돌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다음 신문에는 물론 데모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찼다.  웨스트 엔드의 폭동.  끔찍한 난동의 현장들.  나는 헤드라인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한무리의 빨갱이들이 경찰을 공격하다.’  우리는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백만장자들이나 냉전 시대 자유주의자들을 신뢰하지 않는 나은 신문이 있었다.  <데일리 워커>[공산당 기관지] 로비와, 행진과 경찰의 공격을 모두 감명 깊게 보도했다.  상황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라면 <데일리 워커>자본가 언론” (그냥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실제로 얻은) 신문들과 비교할 있었다. 노동 분규에 가담한 노동자들과 다른 투쟁들의 참여자들은 언론들을 비교할 있었고, <데일리 워커> 항상 높이 평가 했다…. 

서로 다른 관점의 현실들, 지배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과 피지배자들의 투쟁을 충실하게 보도하는, 서로 싸우는, 다수의 신문 하나, 엄청난 자본 투쟁기금의 푼돈들.  두가지의 관점; 버전들. 두개의 미디아; 두개의 메시지들

명의 <데일리 워커> 독자들은 신문이 보도하는 사실이 경쟁지들과 충돌할 , 예를 들면 소련의 5개년 계획이나 동유럽의 재판 같은 다른 문제들에서도 <데일리 위커> 보도를 받아들이곤 했다.[각주:20]  

 

비록 우리가 1950년대 냉전시대 같이 도덕적 마니교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느낌은 비슷하다.  우리는 SWP 우파 언론과 또한 종종 일부 극좌파에 의해 공격 당하고 비난 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의 즉각적 반응은 우리가 속해 있고,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하는 당을 방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델타 스캔들의 전말이 인터넷과 언론에 터졌을때 당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의심하는게 당연했다.   CC 당원들에게 상황에 대해 솔직히 전하기 보다는 토론을 막으려고 사실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조직적 충성심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 없이는 당원들이 실제로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위험할 수도 있다.


분파 투쟁 또하나 두드러졌던 CC 지지자들의 스타일이었다.  그것 또한 내게는 수년 전으로 되짚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SWP 고질적인 괴롭히기 문화가 있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각주:21]라고 소비에트 보이 (Soviet Goon Boy - SWP 위기에 대해 다룬 글들이 실린 블로그 하나 - 역자 ) 틀렸다고 생각한다.  50년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 종종 젊고, 경험없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  상근자들이 당원들을 괴롭히는 것을 적이 있지만, 그런 행동들은 예외였다.  대부분의 기간 당은 동지적이고 우호적인 곳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일부는 그렇게 오랫동안 당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SWP 일반적으로 내가 아는 대부분의 극좌 조직들 보다 훨씬 관대한 조직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맑시즘 행사와 수백번의 브랜치 미팅들에서 발표를 했지만 결코 CC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지시를 적이 없다.  나는 기관지에 계속적으로 글을 왔었다.  때때로 기사들이 수정되거나 심지어 개재되지 않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물론 나는 자기 검열을 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는 신뢰받고 있다고 느꼈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있었다.  클리프 전기의 초고를 제출했을때 나는 너무 과도한 비판으로 여겨질 거라 생각한 부분에 대해 삭제 부탁을 받을거라 예상했었다.  나의 원고가 거의 수정되지 않고 출판된 것은 전적으로 CC 특히 캘리니코스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오랜 시간에 걸쳐 우려스러운 건강하지 않은 논쟁 스타일이 나타났었다.  마음 속에 오래 남아 있는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리스펙트에 합류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을떄 결정을 지지하는 전체미팅이 런던에서 있었다.   미팅은 열정적이고 낙관적이었고, 우리들은 당이 중요한 전진을 시작한다고 느꼈다.  거의 모든 플로어 발언자들이 전략에 지지를 보냈, 또한 미팅의 열기를 공유했다. 


그런데 여성이 갤러웨이가 사담 후세인에게나는 당신의 용기, 강인함, 끈질김에 경의를 보낸다 아부한 것에 대해 문제제기 했다.  여러 사람들이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고, 특히 앞에 있던 청년은 깡패같이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결국 그녀는 발언을 마치지 못했다.  이것은 완전히 쓸데없는 행동이었다.  리스펙트를 지지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것에 영향을 받을 위험은 없었다.  


또한 나는 우리가 개입하려고 하는 선거 과정에서 바로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야유를 하던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하라고 했으면 멀리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수가 당신 편에 있을때 야유를 보내는 것은 쉽다.  사회를 보던 동지나 주제 보고를 CC 멤버 아무도 야유를 보낸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내가 야유자들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지 않은 항상 후회해 왔다.  따라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논쟁의 수준이 떨어지고 있던 징후에 대한 책임이 있다.         


분파 투쟁 당시 유감스럽게도 두드러진 또다른 토론의 특징은 논쟁이진정으로무엇에 관한 것인지 동지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었다.  


너는 강간에 대해 문제제기한 것이 다루어진 방식에 대해 반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반대, 영구분파에 대한 지지,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파 선언문에 서명한 직후 나는 논쟁과 상관없는 미팅에서 내가 십년 동안 좋아하고 존경했던 동지를 만난 기억한다.  인사말도 없이 동지는 바로 내가 만장일치제를 지지한다고 나를 야유했다.  나는 그런 입장이 아니었고, 내가 아는 이것을 지지하는 어떠한 의견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았었다.  그는 입장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그것이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공격한 것이다.  이런 식의 논쟁이 너무 흔해졌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할때 나는 종종 포퍼가  역사주의 반증하려고 그의 다음의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다음에 나오는 나의 비판을 강조하기위해 역사주의를 지지하는 주장을 제시하려고 대단히 노력했다.  나는 역사주의를 고안된 탄탄한 철학으로 보이게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알기로는 역사주의자들이 한번도 적이 없는 식으로 역사주의를 지지하는 주장을 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방법이 입장을 공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기를 바란다.[각주:22]

 

달리 말하면, 포퍼는 그의 반대자가 진짜로 말하려는 것을 그의 반대자 자신보다 알았다. CC 지도적인 지식인이 대단한 포퍼 숭배자인 것이 완전히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단지 소수의 지도부 추종자들만이 포퍼를 읽었겠지만, 의심할 없이 그들은 제레미 팍스만(영국의 방송언론인.  직설적이고 거슬리는 인터뷰 스타일로 유명- 역자 ) 보았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팍스만의 개성을 닮았을지언정 그의 재능은 하나도 없는 동지들이 논쟁 과정에서 잘난체하며 인터뷰 대상을 모욕하는 팍스만의 스타일을 많이 흉내냈다.  분파 투쟁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동지를 만나는건 거의 드물었다


확실히 당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봐라, 나도 나의 생각을 말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어떤 합의점에 도달할 있는지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각양각색의 작은 팍스만들은 그들이 올바른 노선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고, 내가 내부 회보를 주의깊게 읽었기 때문에 내게 CC 입장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 놓아야 한다고 간주하는 했다.   보통 입장을 설명하거나 심지어 그들이 소리지르며 묻는 질문에 대답할 있는 시간도 없었다.  대체로 이런 논쟁 스타일은 아마 어떤 반대자도 설득 못하겠지만, 지도부 추종자들은 그들이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열띤 논쟁과 격렬한 비판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한 것이 아니라는걸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상적인 것이고 건강한 것이다. 특히 걸려있는 문제가 커다란 것일때는.  내가 반대하는 것은 논쟁의 스타일이다.  무엇보다도 논쟁을 두려워 하는 것은 정치적 자신감 결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전국, 지역, 그리고 브랜치 차원에서 논쟁을 가로 막으려 하고, 조야한 논쟁의 술수와 조직적 계략 쓰는 지도부는 정치적 자신감과 진정한 논쟁을 수행할 수준의 정치적 이해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클리프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또다른 위험은 사람들과 토론하는 대신 일방적으로 설교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이에 대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항상 토론의 조건을 선택할 없다.”[각주:23]  

 

논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좌파들과의 관계에도 이어진다.  몇년 나는 찰리 킴버에게 내가 편집한 Revolutionary History 홍보하기 위해 영국공산당의 썸머 스쿨 참여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그들이우리의 정적이어서 안된다고 했다.  나는 기껏해야 27명의 멤버를 가지고 노동운동에 최소한만 참여하고 있는 조직이정적인지 아니면 별볼일 없는 유머작가들인지 정말 궁금했다.


내가 부정적으로 또다른 논쟁의 측면은 당의 과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었다.  레닌주의 방어하면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8 SWP 전신인 IS 레닌주의 조직 모델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기준을 레닌의 지도 하에 볼셰비키가 10 혁명에 이르는 시기 동안 조직한 방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각주:24]

 

없이 많은 지도부 추종자들의 입에서 주장은이것이 우리가 과거에 해왔던 방식이고 우리는 똑같은 방식을 계속 고수해야 한다 .  “1968년의 전환 계급 투쟁이 상승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루어졌고, 우리는 지금 그때와는 다른 시기에 있다는 것을 잊은 .


최근에 당은 점점 과거에 의존해 왔다.  조셉 추나라가 편집한 교육용 팸플릿들은 여러 면에서 유용했고 탐구할 중요한 텍스트들을 이용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이 지난 세기에 나온 것들이고 가장 중요한 공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클리프, 핼러스와 하먼의 것이었다.  최근의 자료들은 이론적이기 보다는 저널리즘적 글들에 치중된 경향이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라기 보다는레닌주의” (레닌 사후에 지노비에프가 만들어낸 용어) 대해 점점 많이 언급하는 경향도 이와 연관된 현상이다.  이것은 내가 볼때 비교적 최근의 경향인 하다.  내가 <삐딱이를 위한 레닌주의>  (CC 용인하에 2005년에 출간된)에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단지 네번 ( 한번은 제목에), 그리고레닌주의자라는 용어는 두번 나온다.  한번은신화적인레닌주의자 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문맥에서 쓰였다.


나는 역사의 중요성을 간과할 생각이 없다.  실제로 나는 스스로 역사가라고 생각한다.  과거와의 연속성은 매우 중요하고, 운동의 풍부한 역사는 많은 교훈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우리 경향의 강점은,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문건들과 함께 처음부터 맑스주의적 분석의 핵심을 우리가 살아서 싸우고 있는 세상의 변화하는 현실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클리프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당신이 만약 맑스의 어깨에 앉아 있다면 멀리 있다. 하지만 만약 맑스의 어깨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다면 아무것도 없다[각주:25] 것이다. 클리프가 말했던 것처럼, 전후에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런던 지하철 지도를 들고 파리 지하철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1962년에 가입했던 IS 그룹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우리의 활동 무대였던 소설리스트 내에서) 주로 사회주의노동동맹 (Socialist Labour League - SLL)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경향 사이의 정치적 논쟁은 우리 동지들 하나가 묘사한대로개인적인 욕설과 아무 의미없는 독설[각주:26] 탓에 전혀 생산적이지 않았다.


1960 IS 매력 하나는 우리는 비슷한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SLL 시대에 뒤떨어진 용어들을 조롱했다.  그들이 우리들을좌익 멘셰비키라고 비난하, 글래스고우의 동지들은좌익 멘세비키 남성합창단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SLL (1960년대 초에) 여전히 임박한 공황과 심지어 파시즘의 위협이라는 관점에 기반해 세상을 보고 있을때,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고찰에 바탕을 전망을 냈다.  우리에게는 토니 클리프, 마이크 키드론,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나이젤 해리스라는 눈을 크게 뜨고 맑스의 어깨에 앉아 있는 동지들이 있었다


우리가 그들 분석의 모든 세세한 면들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주요 논점들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정치적 자신감을 주었고 따라서 우리들은 침착하고, 공손하게, 반대자들의 말을 가로 막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논쟁할 있었다.  그런 자신감은 80 대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클리프의 침체기 분석 덕분에 우리들은 세계를 현실적으로 있었고, 패배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의지의 낙관주의와 지성의 비관주의를 결합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감은 사라졌다.  정치적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던 높은 수준의 정치적 분석과 이해와 함께.   

 

따라서 나와 동지들이 최근의 분파 투쟁 개인적인 욕설과 아무 의미없는 독설 대상이 되었을 나는 무엇이 변했을까 의아했다.  내가 아주 알듯이, 개인들은 나이가 들고 노쇠한다.  조직도 마찬가지일까? 조직들도 기간의 활력과 효율성 뒤에 천천이 무력감에 빠져 쇠퇴 하는가?


확실히 SWP 회원들 나이가 들었다.  2014 맑시즘에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그러난 그것은 약간 은퇴자들의 집회처럼 보였다.  자체로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30, 40 심지어 50 년을 혁명가로 살아온 동지들을 만나면 나는 사상의 -클리프를 통해 전파된 맑스주의 - 감동을 받는. 우리가 젊었을때 우리를 끌어 당긴 사상이 계속해서 우리들을 헌신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동지들이 가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잊어 버린듯 하다.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 해야 역사적인 주도력을 발휘한 어게인스트 레이시즘 (Rock Against Racism 70년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음악 축제 - 역자 ) 창시자 동지가 성질 사나운 노인네로 변한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물론 나이 많은 동지들은 젊은 동지들을 당에 가입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은 멤버들이 자신들의 젊었을 같기를 원한다.  불행히도 세상은 변했고 그런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나이 또래의 동지는 그의 지역의 반대파를 지지하는 젊은 동지들이 자신과같은 당에 있지 않다 내게 한탄 했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같은 당에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동지가 자신은 올바른 조직에 속해 있다고 자신하기를 바란다.  


세대간 갈등의 예는 분파 투쟁 초기에 리차드 이모어를 겨냥한 악감정이었다.  리차드는 여러 권의 유용한 책들을 펴낸 재능있는 젊은 작가이다.  그의 웹사이트 <레닌의 무덤> 전성기 일련의 주제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발랄한 토론의 장을 제공한 환상적인 자산이었다.  그의 웹사이트는 국제적으로도 뻗어 나갔다. 신문 판매 장소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텍사스 같은 곳에서 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그것은 등대 같았을 것이다. 


내가 클리프 전기를 위해 사람들을 인터뷰 했을때 그들은 여전히 40 클리프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던 기억했다.  나는 40 후에 운동의 베테랑들이 <레닌의 무덤>에서 접한 그들의 논쟁을 기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나는 리차드와는 이견이 있고 그가 이후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보증할 없지만, 그는 지금까지 그런 모욕을 받을만한 일들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제기됐다. 비록 사실이 아니지만 말이다.(실제로 나는 리차드가 분파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때때로 <가디언> 지에 기고를 한다는 이유로 출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개인적으로 나는 그와 어떤 이견이 있다 할지라고 <가디언>지에서 폴리 토인비나 윌리암스가 기사 보다는 리차드의 것을 먼저 보겠다.)  


그를 공격한 같은 동지들이 풋에 대해서는 온통 향수어린 칭송을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엄청난 위선이었다.  또한 한때 야망있는 젊은이로 부르주아 언론에 글을 썼었다.  클리프는 풋에게 엄청난 공을 들였는데, 그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확고하면서도 우호적으로 규율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지도부의 누구도 리차드에게 같은 종류의 관심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지도부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혐오가 지독했다. 내가 아는 고참 동지는 리차드가 글을 한번도 읽어봤고 그의 웹사이트 <레닌의 무덤> 가봤다는 인정했다.  하지만 리차드의 이름이 거론 되었을 그는 그의 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리차드가 당장 당에서 축출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는 그보다 더한 일을 당해도 싸다는.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한때 비정통적인, 특히 스탈린주의적인 알튀세르에 대한 애정 때문에 클리프와 하먼이 별로 탐탁치 않아했 똑똑한 - 그리고 야망이 있는 - 젊은이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사냥터 관리인이 그가 리차드를 볼때마다 젊은 시절 밀렵꾼 같았던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는걸까? 특별 협의회 후에 당을 떠난 리차드의 결정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럴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있다.


따라서 나는 SWP 쇠퇴는 정치적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클리프에게는 탁월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논쟁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파들과 맞서고 싶어했다.  1988~89 CC 투쟁 수준이 상승하는새로운 분위기 있다고 주장했었다.  내가 아는 동지가 분석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중앙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반대파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할 대표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녀가 반드시 협의회 대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파가 주장을 펴는데 지정된 6분에서 일초라도 얻지 못하게 하려고 손가락을 스톱워치에 끼고 논쟁에서 도망가는 지도부와 대조해 봐라.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IS/SWP 특징이었 자신감은 세계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클리프의 유명한 이론적 ' 기둥'(국가 자본주의론, 영구군비 경제론, 빗나간 연속혁명론)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타협, 3세계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탄력성에 대한 과소평가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다. 하지만 시대는 1989년에 끝이 났다.  노동계급의 변화와 제국주의의 새로운 발달에 대한 몇몇의 귀중한 책과 글들이 쓰여졌지만, 그것들은 단지 부분적인 기여이다.  내가 클리프의 전기 13장에서 썼듯이:


클리프 입장의 논리적 귀결은 만약 맑스주의가 오늘날에도 실천의 가이드 남아 있으려면, 후세대들이 맑스주의를 그들이 사는 특정 시대의 현실에 결부시킬 것이므로 새로운 이론적 기둥 필요할 있을 것이라는 이었다. 21세기의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패턴의 고용형태, 인터넷으로 비롯된 소통의 혁명, 세계화의 도전과 기후 변화로 발생한 재앙의 위협 등을 대면하고 있다.[각주:27]

 

누군가가 이미 그렇게 많이 나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황에 대한 산뜻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새로운국가 자본주의론 무엇이 될지 모르겠다.  신자유주의/상호교차성/기후 변화/ 센터/인디그나도스-데모스의 경험에 대한 알맞은 분석이 좌파의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 생각에는 다섯 주제 모두와 많은 문제들에 대한 분석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분석은 투쟁으로부터, 그리고 혁신적인 생각이 두려운 아니라 장려되는 환경에서 나올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될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자본론> 각주들을 면밀히 분석하거나, 또는 <파이낸셜 타임즈> 헤드라인을 트위트 하는데서 올거 같지는 않다.[최근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태도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SWP 살아남아 스스로를 쇄신할 있을까? 나는 정말 모르겠지만, 그러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SWP 몰락하거나 또는 의미없는 종파로 무력해지는 것은 이미 취약해진 좌파를 쇠약하게 것이기 때문이다.  SWP에는 작업장과 지역에서 존경받는 다수의 활동가들이 여전히 당원으로 남아있다.  비록 1950년대와 1960년대 공산당 당원들처럼 종종 그들이 신뢰받는 이유가 그들이 속한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자질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쇄신은 지도부의 거의 전면적인 변화와 중요하게는 내가 위에서 얘기한  문화의 변화를 의미한다. SWP에는 현재의 특출하지 않은 지도부를 대처할 있는 능력 있고 경험 많은 동지들이 많이 있다.  추측에 CC 다시 한번 자신들을 대로 재선출 하려고 추천할 것이다.  마치 지도부의 어떠한 변화도 유약함의 징후로 보일까봐.   


새로운 지도부는 당장 먼저 당원 수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것이다.  비록 최근에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당원 수와 실제로 참여하는 당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예를 들면, 양쪽 모두에 의해 총력적으로 집결되는 특별 협의회 사전 전체모임에 참여하는.)  그러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CC 도대체 자기들이 누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당원들 (일부 아주 순진한 신입 당원들을 제외하고) 밖의 사람들도 모두 공식 당원 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혁명가라면 거짓말이 때로는 정당화 된다는 안다.  문제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이다.)  그리고 결과는 당이 제시하는 다른 수치들도 (예를 들면, 기금 모금에 모인 금액)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문제는 <사회주의 노동자 - 이하 SW>이다.  1974 클리프는 아주 유능한 편집자인 로저 프로츠를 조직적으로 사임시켰는, 왜냐하면 그가 옳건 틀렸건 간에 클리프는 그럼으로써 신문이 훨씬 좋아질수 있다고 믿었다.[각주:28] 점점 단조롭고 지루해지는 신문에 대한 CC 자기만족과 비교해 봐라.  1980 풋은 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 독자 편지를 SW 보냈다.  


지난 , 다섯 호의 <사회주의 노동자> 중간 양면 페이지는 내가 보기에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 SW 많은 적들이 가두어 놓으려 하는 틀을 깨고 있다.  모험을 하고 있는데,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이다.  SW 자신감을 보일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각주:29]  

오늘날 <사회주의 노동자> 모험을 하지 않는다.  독자편지란에 어떤 작은 이견이 나오는 것도 두려워 하는 하다.  1970 대와 1980 대에 SW에는 피터 세즈윅,[각주:30]데이브 위저리, 에이몬 맥켄 같이 종종 공식적 입장에서 벗어나는 필자들이 있었다.  가끔 그들이 독자들을 열받게 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SWP 보이콧하거나 금지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델타 문제를 대강 덮어버릴 없다는 반대파 동지들의 주장이 완전히 옳았음을 보여준다. SWP 무고한 피해자인양 하는 것은, 아무리 양보해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이콧들은, 특히 알렉스 캘리니코스를 런던에서 열린 사적 유물론 학술대회에서 배제한 것은 (캘리니코스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가능케 ) 내가 보기에 잘못된 판단인 같다.     


SWP 떠난 동지들 중에서 나는 RS21(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 동지들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들은 사려 깊음, 실질적 활동의 지향,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점을 인정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주로 개인적인 이유로 그들에 합류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나는 그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를 점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조직의 재편성에 대한 생각은 현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통합은 강령과 조직적 형태 모두의 동의를 뜻하는데, 그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 있다. 조이 디비젼 (Joy Division 영국의 밴드 - 역자 ) 노래를  개사하자면재편성은 우리를 다시 갈라 놓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조직적 통일이 아니라 우호적인 대화의 문화이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너무나 익숙한 (적어도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이 있는) 좌파 내의 진부한  표현이나 비난의 교환과는 매우 다른.  맑스주의 좌파는 규모가 작고 깊이 분열되어 있다.  어느 그룹이 미리 정해진 전위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있을 마다 같이 일해야 개방된 사상의 교환을 해야 한다.[각주:31]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42호에 RS21 동지들이 편의 글이 실리고, 저자들의 속한 조직을 표기한 것은 비록 작은 변화지만 환영할 만하다.  내가 당을 떠난 , 하나의 예만 제외하고, SWP 멤버들이 나를 우호적으로 대했다는 첨언해야 겠다.  나는 맑시즘 2014에서 연설해 달라는 초대를 아주 기쁘게 받아 들였다.  


자본주의 국가는 아주 고도로 중앙집중화 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항할 중앙집중화된 당이 필요하다.  이는 맞는 말이지만 현재로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말이다.  SWP 영국 극좌파의 어느 그룹도 부르주아 국가는 고사하고 술에 취한 떼의 축구광들도 대적할 없을 것이다.  현재 중요한 것은 사상의 싸움이다.  윌리암 모리스가 말했듯이사회주의자들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각주:32]


클리프가 지적했듯이사상은 강과 같고 강은 여러 개의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형성된다”.   많은 시냇물 중에 IS/SWP 하나였다.  나는 또한 우리의 국제 조직들이 국제사회주의 경향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좋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넓은 운동의 기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름을 지은 사람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해도).


모든 혁명 예고없이 온다.  우리는 미래의 투쟁을 예단할 없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적 이해에 있어서 최대한의 명확함과 실제 투쟁에 있어서의 최대한의 단결이다.  새로운 조직들이 떠오를 것이고, 그것들은 분명히 알렉스 캘리니코스나 내게 모두 낯선 것일 것이다.  조직들은 아마도 보통 의미의레닌주의 아닐 수도 있지만 클리프와 레닌에 기댈 것이다.  우리가 바뵈프, 맑스, 윌리암 모리스 등등에게 계속 기대듯이 말이다.


1972 집행위원회 회의가 끝나고 클리프를 집에 데려다 기억한다.  당은 발전하고 있었고, 회의에서 우리 모두는 예의 낙관주의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후 클리프는 좀더 철학적인 무드에 젖어 있었다.  우리가 성취한 것들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 동지들 일부는 다음 물결의 일부가 될거야”.  말은 언제나 내게 남아있었, 내가 장기적인 투쟁을 어느 특정 조직과 너무 가깝게 동일시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    

국제사회주의라는 작은 시냇물은 특히 다음과 같은 사상과 태도를 강에 보탤 것이다.


a)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 대한 거부와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 개념의 일부라는 사상 대한 .
b)
우리의 출발점은 항상 생산관계와 착취에 대항한 현실 노동계급의 투쟁이지 결코 '노동자 정당'이나 '노동자 국가' 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는 .
c)
미리 고안된 전략이나 강령이 아니라 현실의 투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것을 "진정으로 혁명적 노동운동이 저지른 오류 어떤 훌륭한 중앙위원회의 무오류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가치있고 유익하다[각주:33] 했다.  


오랜 세월 동안 SWP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런 사상을 옹호해왔고, 나는 우리가 성취해낸 것들에 대해 여전히 자부심을 느낀다.  2013년에 벌어진 일들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이전 50 간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에디뜨 삐아프 노랫말처럼,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2014 12

이언 버철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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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와 함께 이 주제들을 토론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SWP 전(前) 당원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또한 에벌리 브라더스 (Everly Brothers) 에게 이 글의 제목에 대해 감사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5Z3qOzsVviI ] (비록 영구분파에 관해서는 단과 필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본문으로]
  2. R Harris, An Officer and a Spy, Arrow Books, 2014, p. 386. [본문으로]
  3.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sep/22a.htm (이 인용구를 내게 알려준 마이크 존스에게 감사.) [본문으로]
  4. A Callinicos, “Is Leninism Finished?”, Socialist Review, February 2013, http://socialistreview.org.uk/376/leninism-finished [본문으로]
  5. 협의회 속기록과 온라인 상의 많은 글들에 그 동지가 델타라는 이름으로 불려졌기 때문에 나도 같은 이름을 쓴다. 그런 정보들에 기반해 문제의 그 개인에 대해 적절치 않은 판단을 내려야 했다. “델타”라는 이름이 어떻게 내가 알던 (잘은 아니지만) 피와 살이 있는 살아 있는 사람과 연결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문으로]
  6. http://rationalwiki.org/wiki/Rape_apology [본문으로]
  7. Socialist Worker 26 February, 2013, http://socialistworker.co.uk/art/30133/Pistorius+case+shows+South+Africa%E2%80%99s+divide [본문으로]
  8. Socialist Review, July/August 2013 http://www.socialistreview.org.uk/article.php?articlenumber=12351 [본문으로]
  9. http://www.youtube.com/watch?v=uXnJVkEX8O4 [본문으로]
  10. 다음의 예를 보시오. http://livesrunning.wordpress.com/2014/02/11/the-international-socialists-and-the-1960s/#comments [본문으로]
  11. http://www.marxists.org/archive/higgins/1997/locust/index.htm [본문으로]
  12. http://grimanddim.org/historical-writings/1998-review-of-jim-higgins-more-years-for-the-locust/ [본문으로]
  13. http://livesrunning.wordpress.com/2014/04/26/marxism-in-mono/ [본문으로]
  14. N Carlin, “Women and the Left”, City Limits, No. 141, June 15-21 1984, cited I Birchall, Tony Cliff: A Marxist for his Time, p. 473. [본문으로]
  15. International Socialism 81-82: September 1975, pp. 47-8. [본문으로]
  16. 다음의 부고에서 그에 대한 매우 조심스런 비판을 보시오. John Molyneux and Andy Durgan: http://revolutionaryhistory.co.kr/obituaries/obituaries/harman.htm [본문으로]
  17. 민주적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고찰을 위해. Phil Gasper, “Is Leninism Dead?” http://rs21.org.uk/2014/10/15/is-leninism-dead/ [본문으로]
  18. Central Committee, “A Reply to the Faction”, Pre-conference Bulletin 3, November 2013. [본문으로]
  19. 가디언, 2014년 6월 17일, http://www.theguardian.com/politics/2014/jun/17/labour-candidates-marginal-seats-westminster-insiders ; see also http://www.newstatesman.com/politics/2014/08/parliament-must-shed-privately-educated-and-westminster-bubble-mps-win-voters-trust [본문으로]
  20. Peter Sedgwick, “A Day in the Life of the ’Fifties” http://www.marxists.org/archive/sedgwick/1971/xx/fifties.htm [본문으로]
  21. http://sovietgoonboy.wordpress.com/2014/01/01/this-is-the-way-the-party-ends-not-with-a-bang-but-with-a-whimper/ [본문으로]
  22. A Pocket Popper (ed. D Miller), Fontana, 1983, p. 291 [본문으로]
  23. Socialist Worker, 19 November 1988. [본문으로]
  24. Socialist Review, February 2013, http://socialistreview.org.uk/376/leninism-finished. [본문으로]
  25. 1999년 맑시즘에서의 미팅. [본문으로]
  26. 그 당시 영 소셜리스트 내의 분위기에 대한 생생하고 재미있는 회고는 다음을 보시오. Jim Higgins, “A Weekend With the Lumpentrots” http://www.marxists.org/archive/higgins/1964/05/lumpentrots.htm [본문으로]
  27. Tony Cliff, p. 540. [본문으로]
  28. 더 자세한 내용은 Tony Cliff 9장을 보시오. [본문으로]
  29. Socialist Worker 24 May 1980. [본문으로]
  30. 1972년 노동계급 투쟁이 최고조일 때, In 1972, SW는 R.D. Laing의 정치에 대한 격렬한 편지를 실었다. See http://www.marxists.org/archive/sedgwick/1972/03/familyltr.htm [본문으로]
  31.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우리에게 “우리는 우리의 다른 프로젝트들의 사소한 자아도취증을 털어내야 한다… 역사는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를 준엄히 심판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Socialist Worker 14 October 2014, http://www.socialistworker.co.uk/art/39198/The+left+must+unite+to+be+an+alternative] 오늘날 영국 좌파의 상태로 봐서는, 내가 생각할 때 “역사”는 우리를 각주에서도 다루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정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본문으로]
  32. W Morris, “Statement of Principles of the Hammersmith Socialist Society”, https://www.marxists.org/archive/morris/works/1890/hammer.htm [본문으로]
  33. T Cliff, Rosa Luxemburg, Harrow Weald, 1959, p. 41에 인용됨. [본문으로]